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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쇼크 - 위대한 석학 25인이 말하는 사회, 예술, 권력, 테크놀로지의 현재와 미래 ㅣ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2
존 브록만 엮음, 강주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요즘은 아마도 누구나 하루의 대부분을 스마트-폰, PC등의 첨단기기를 통하여 인터넷이나 SNS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접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세상과 소통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WWW(World Wide Web)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에는 그야말로 세상의 공간이 PC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가상현실에 놀라워하고 저절로 세상의 통일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국가가 정보를 통제하는 이란, 중국 등의 곳에서는 그들이 접하는 웹 속의 정보가 현실의 정보와 동시성을 가질 수 있도록 다른 방식의 가상이 존재할까? 그런 국가를 제외한다면 다른 국가에서는 지금 과연 인터넷이 사람들에게 WWW에서 소통하며 꿈꾸는 세계를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매 순간 쏟아지기만 하고 걸러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골라 접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게 됨으로써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요즘 많이 이용하는 SNS는 또 다른 브랜드의 디지털 액세서리가 아닐까?
“하버마스는 키에르케고르가 살았던 시기를 극찬했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을 요약하면 카페와 신문이 유럽전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민주화된 공론이 형성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지나치게 많은 의견들이 돌아다니고, 무수하게 많은 천박한 이유로 사람들을 조롱하기가 너무 쉬우며, 아무도 뭔가를 강력하게 믿지 않은 현상을 우려했습니다. 사람들이 목숨을 바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에브게니 모로조프 Evgeny Morozov /디지털 파워와 그 반론자들>
모두가 비슷한 문장과 단어를 사용하여 동질감을 나타내고, 한 사람의 문장을 복사하고 복사하며 칭송하고 찬양하는 듯하지만 정말로 ‘목숨을 바칠만한 것이 없는’ 현실성이 없는, 뭔가를 ‘강력하게 믿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이성은 점점 더 석화되고 감정만이 꿈틀대는 것 아닐까?
나는 점점 더 첨단을 달려가는 인터넷의 전성시기를 살고 있다고 할만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에 걸맞은 발달된 소통의 문화를 즐기고 있지는 못하고 있지만 WWW가 주는 일방적 개방의 덕을 보면서 살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거 같다.
글을 쓰는 것을 즐기는 나는 손가락의 활동이 장애를 겪으면서 손으로 펜이나 연필을 들고 그림은 그릴 수 있어도 글을 쓰는 행동에는 제약을 받으며 산다.
그러나 독수리타법이라는 방법으로 워드 프로세서를 통해 이렇게나마 내 머리 속의 생각을 WWW에 옮기고 있으니, 아직 일방적으로 열려있기는 하나 그래도 글을 쓰고 난 후의 카타르시스를 얻을 때가 있으니 인터넷의 도움을 받고 산다고 하겠다.
만약 예전처럼 노트에 필기를 하는 식으로 글을 썼다면?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것은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굉장히 야릇한 통증을 주기 때문에 아마 중도에 그만 두었을 것이다.
내가 워드프로세서를 통한 글을 쓰면서 인용하는 WWW속의 정보는 글을 쓰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는 역할 이외에는 별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그 정보의 어느 것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으므로 주로 다수의 의견을 수긍하는 편에 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다수의 의견이란 블로거나, 지식코너, 포탈사이트의 사전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우리에게 죽은 백인 남자들이 하의한 것을 말해주지만, 위키피디아는 살아 있는 인터넷 사용자들이 현재 뜨겁게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준다.” <엣지 대담 코리 닥터로 Cory Doctorow 301p>
그래서 죽은 자들의 의문은 백과사전에서, 살아있거나 비교적 근대라고 생각되는 자들의 의문은 위키피디아에서 인용하거나 정보를 얻고 판단하고 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매일 매일 인터넷에 올리는 글들은 그 동기 면에서 볼 때 시작은 나처럼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의도였을 테지만, 그런 행위가 누구에게는 이타적인 행위로 이어지고 있을 수도 있는 정보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죽은 위인들의 브리태니커 보다는 위키피디아가 살아있는 정보의 구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Hive Mind라는 우려가 현실과 이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음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워드 프로세서 덕분에 우리글의 품격이 높아졌다기 보다는 우리 글의 양이 늘어났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반적인 사회를 뜻한다. 한편 인터넷 덕분에 우리가 얻는 정보의 질이 향상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얻는 정보량이 증가했을 뿐이다. 양 늘리기는 질을 향상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다. 이제는 쉬운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인터넷을 이용할 때가 되었다.
……
인터넷이 인간의 정신을 대신하진 못하겠지만, 우리가 사고방식을 바꾸고 더 나아가 시대정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꿔가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순간이 위험하다. 가상 대학들은 바람직하지만, 예컨대 가상 국가는 바람직하지 않다. 구성원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가상 국가는 인류를 산산조각 낼 위험이 있다.
……
따라서 전 세계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개인적인 정보로 가득해서 안타깝지만 누구도 그 이야기를 완전히 들을 수 없다. <인터넷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 David Gelernter>
그런데 이런 인터넷의 진화에 대하여 이 책 속의 나타나는 학자들의 의견은 여러 가지다.
긍정적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이제 그 역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반응, 더 진화된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의견 등. 그들의 전문 분야에 따라 생각도 여러 가지다.
그런 관점으로 나도 뭔가 한마디를 보탠다면 인터넷으로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현실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과 혼동되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의견에 더 솔깃하다. 인터넷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분명 존재하지만 실천하지 않고 방관적인 태도를 가진 인간은 그곳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즉 현실의 또 다른 거울일 뿐인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발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것이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날지 파멸로 이르게 할지는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강대국의 Hot Button으로 영화 “오블리비언”에 나오는 모습의 세상은 되지 않을 네트워크로 자라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기억의 양면을 가지고 갈등에 직면한 채 살고 있지만 지금처럼 공간을 이어주고 시간도 붙잡아 둔 WWW의 공간에서는 경험하는 자아 보다는 기억하는 자아가 미래를 예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므로 지금 불편해 보이고 거추장스러울지 모르는 과학적 진보에 대하여 양면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 면으로 앞으로의 WWW에서 정보는 살아있어야 하며 통제되거나 프로파간다에 의한 왜곡이 되는 것을 스스로 걸러낼 수 있는 인공지능이라도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과학적 사회적 미래를 위한 진보 발전에 대하여 정보를 나누고자 할 때
보수는 그들의 약점을 누군가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에 위험해 보인다.
진보라는 쪽 역시 장점을 아우르지 않고 약점과 어두운 면을 밝히는 방법론을 사용할 때 스스로 약자이거나 소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위험해 보인다.
정치가는 그 둘의 관계를 정립하고 처리하는데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투표로 한쪽을 매몰시키려 하기에 위험해 보인다.
투표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느 한쪽을 선택한 대가로 매장된다면 아무도 민주주의 꽃을 들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과학자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사물에서 뭔가를 분리하여 증명하려는 특성 때문에 위험해 보인다.
분명 과학자들은 논리적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 이론의 실행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지만 철학자처럼 전부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사회학자들처럼 네트워크적인 오류를 고려하지 않고 무시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실증적이다라는 점 때문에 그들의 이론과 실험을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의 가상 실험 재료나 경우의 수를 수학적으로 계산할 때 누락시키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전 지국적 관점은 단순한 미학의 문제가 아니며, 단순한 관점의 문제도 아니다. 전 세계적인 규모의 해결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아직 마련하지 못한 형태의 거버넌스Governance가 필요하고, 우리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테크놀로지도 필요하다. 생태학자들이 생태공학이라고 칭하는 것도 동원되어야 한다. 비버가 그렇게 하고, 지렁이가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동물들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방향으로 가는데 환경운동의 감상주의와 미학주의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 우리는 신으로 존재하므로 그 역할을 잘해야 한다./ Stewart Brand>
이의 주장은 그럴 듯 하다, 아니 모두 맞는다고 해도 무리하지 않다.
다만 세상을, 시간을, 역사를 본다면, Brian Arthur처럼 다소 道學的인 느낌으로 본다면 과학도 쉬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 쉼이나 느림에 반기를 들 사람은 호전적 정치인이나 탐욕적인 장사꾼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철학으로서의 도교에 심취하면서 만물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변한다는 道敎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도교 철학의 핵심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움켜질 수 있는 안정된 것은 없다. 온 세상이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사는 방법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순응하며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진화하는가? William Brian Arthur>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주장한 것이 충분히 근거가 있다면 인류가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 ‘총과 균 그리고 쇠’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움직인, 그 문명의 도구들을 움직이고 사용하고 승리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스튜아트 브랜드가 걱정하듯이 환경론자들의 감상주의와 미학주의가 유전자공학을 더디게 만들어 제3세계의 굶주림을 비롯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맞는 말일지는 모르지만,
핵 원자로의 발전을 반대하는 그린피스의 반대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게 하여 온난화를 가중시키는 것이 맞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유전공학의 피해나 핵에너지의 폐기물 걱정을 덜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또 다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Belle Époque시기처럼 말이다.
식량의 걱정이 없고 에너지의 걱정이 없으면 가장 먼저 늘어나는 것은 무엇일까를 역사의 한 면에서 배우며 생각하고 배려했다면 그 시대 이후의 폭력과 광기의 시기는 있었을까? 없었을까?
책을 보며 요즘의 머릿속을 정리해놓은 듯한 글이 있어 반가웠다. 이런 글들의 느낌이 거의 그렇지만 뭔가를 더 달아내면 안될 것 같다. –사실은 독수리 타법에 통증이 심해지는 탓에 싫증이 난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
Dawkins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비유전적 문화요소, 즉 밈(Meme)을 기생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밈은 기생충 같은 벌레보다 단순한 바이러스에 가깝다. 밈은 유전자와 유사한 것으로, 문화매개물(Culture medium) 의 반복하는 단위다. 그러나 밈에도 외부로 들어나는 표현형이 있다. 하지만 밈은 완전히 발가벗은 유전자 같은 것이 아니다. 밈은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바이러스는 어떤 모양을 띤 핵산의 띠에 불과하며, 단백질로 뒤덮여 있다.
바이로이드(Viroid)는 훨씬 발가벗겨진 유전자다. 밈도 어떤 모양을 띤 정보 다발이다. 밈에 입혀진 표현형이란 옷이 세상에 영향을 주며, 그 영향에 따라 밈의 복제가능성이 달라진다. 밈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 밈은 정보로 이루어지며, 그 정보는 물리적인 매개체를 통해 전달된다.
밈의 세계에서 궁극적으로 이익을 얻는 대상, 즉 최종적인 비용-수익계산이 적용되는 수혜자는 밈 자체이지 밈의 전달자가 아니다.
…….
그렇다면 밈에 감염된 우리 뇌의 분비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에게 스며든 밈들의 일부만 우리 자신과 동일시 하는 것이 문제다.
왜 그럴까? 우리에게 스며든 밈들 중에는 그런 일부의 밈과만 동일시하도록 부추기는 밈이 있기 때문이다. 밈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을 갖지 않는 한, 우리는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터전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밈들이 있다. 그런 밈들이 우리의 지금 모습을 만들어 냈다.
<문화의 진화/Daniel Dennett (Culture Shock/EDGE재단 와이즈베리 간(刊)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