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로 하나 될 때까지
프랜시스 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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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로 하나 될 때까지 우리에게 잊혀진 그분의 꿈, 연합을 다시 열망하다

프랜시스 챈 저 | 두란노 | 20210616| 원제 : Until Unity

 

코로나 시대,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기억하게 된 목자가 있다. 그의 설교가 참으로 맛깔스러워서 나는 자주 온라인 예배를 드리며 은혜 받았다. 그런데 몇 주 전부터 설교단에 보이지 않아 안식년이라도 가셨나? 했다. 그러던 지난주일, 온라인상에서 그의 스캔들 정보를 접했다. 한 목자의 당연한 일상이었던 교단, 목자의 권위를 세워 주었던 설교단이 한 순간에 석고대죄의 단이 되어 있었다. 나처럼 타 교회 교인이거나 해외의 성도들로부터도 존경의 댓글을 받던 목사님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다고 울먹이는 목소리에 불쌍하고 연약한 목자가 나는 금방 용서되었다.

문제는, 목사의 사임 건을 둘러싸고 교인들이 두 패로 갈린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 기회에 교회 분립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더 큰 연합을 전제로 분열이 아닌 분립으로, 성숙한 작은 교회로 살기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실천으로 작은 거인이 된 어떤 교회들처럼. 하지만 나는 아무 권리행사도 할 수 없는 제3자일이니 아름다운 화평이 이루어지길 오늘도 기도할 뿐이다.

더 안타까운 문제는, 자신은 티끌만한 죄도 없는 양 교회의 꼬투리를 잡지 못해 안달하던 이단들이 목자를 비방하며 기독교의 위상을 깎아내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소속과 실명을 가리고 점잖은 척 목자의 탈을 쓰고 나온 이단아! 하나님은 반드시 죄 없다고 소리치며 남을 헐뜯는 너의 죄부터 물을 것이다!

이단이 아니라도 이럴 때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우리는 참 하나 되기 힘든 인간군이라는 사실이다. 연합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는 끝이 없다. 이 땅에서 같은 하늘 아버지를 품은 자녀임에도 개혁과 보수로 갈라진 양날의 검은 너무나 깊은 상처가 되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관계가 되었고, 금수저 흙수저로 양분된 민심도 갈수록 갈등의 골이 깊다. 그래서예수로 하나 될 때까지와 같은 책이 필요하다. 예수를 중심에 두고 우리, 한 순간이라도 하나가 되려면. 먼저 목차를 살피며 대강의 내용을 유추해 보자.

 

프롤로그. 어쩌다 우리는 하나 되려는 간절함을 잃었을까

Part 1. 예수로 하나 됨, 하면 좋지만 안 해도 그만인 옵션?

* 왜 교회는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가 *

Chapter 1. 온전한 연합, ‘삼위일체 하나님이 처음부터 바라시던 것

: 인간을 향한 위대한 창조 설계

Chapter 2. 온전한 연합, ‘내 영혼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

: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움직이던 초대 교회

Chapter 3. 온전한 연합, ‘죽어 가는 세상을 되살리기 위한 것

: 복음 전도 사명의 기초

Part 2. 깊은 분열의 골마다 연합의 바람이 일다

* 성령이 묶어 주신 것을 지키는 싸움 *

Chapter 4. 뼈아픈 회개, ‘연합의 긴 여정의 물꼬를 트다

: 내 안의 숨은 교만과 헛된 바람들

Chapter 5. 영성이 무르익을수록 사랑의 연합에 들어서다

: 영적 성숙의 가장 확실한 표지

Chapter 6. ‘절대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복음 안에서의 연합이다

: ‘신학적 견해 차이피상적 사랑의 문제

Chapter 7. ‘갈라진 틈에 서서참된 화평을 위해 힘써 싸우라

: 싸울 영역 분별하기

Chapter 8. 눈앞의 실제 사람들과 작은 연합부터 추구하라

: 당장 대규모 연합을 바라는 몽상의 위험

에필로그.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충만한 삶이 기다린다

 

저자는 우리가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교회의 분열 요인으로 서로 상충하는 욕심(4),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낳는 질투심과 이기적 야망(3), 미성숙한 믿음을 꼽는다. 이들 요인을 포괄하는 가장 궁극적인 것은 미성숙한 믿음이다.

스캔들에 싸인 목사님은 외로웠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잠시 이 세상에서 위로를 구했다고. 이 말을 두고 이단들은 예배드리는 목사가 외로웠다?’며 대자보로 펼쳐들며 원색적으로 비방한다. 외로웠다는 고백이 죄가 될까? 인자도 머리 둘 곳 없다며 예수님도 외로워하셨는데. 많은 성도들에게 둘러싸인 대형교회 목사일수록 군중 속의 고독도 깊었을 것이다. 가까운 동료, 성도의 옷을 입은 인간의 질투와 야망과 탐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리더일수록 외로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담임목사의 빗나간 실수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들킨 죄인의 정직한 고백을 얄팍한 상술로 이용하고 기독교 신념이 아닌 이단 종교의 확장을 위해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이단아들의 행위에 맞장구 쳐 주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죄성 지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할 일이 저자의 일상 중에 놓여있다.

 

나는 40년 전에 배운 신학의 기본을 지금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따로 시간을 내 매일 홀로 성경을 읽는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나는 내 침례교 뿌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탐구하지 못한 주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무엇에든 100퍼센트 확신한다는 말을 삼가게 된다. 내가 확신하는 몇 가지 사실은 내가 뭐든 부분적으로안다는 사실이다(고전 13:12). 그래서 늘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p.124-125

 

매일 하는 성경읽기와 묵상, 그리고 실천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이 책의 저자처럼 인간은 무엇이든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마치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나의 확신을 다른 이에게 확신시키려고 애썼던 적이 내게도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지금은 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해줄 것은 오로지 기도이다.

 

어찌된 일인지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설교자들이 말씀을 얼마나 잘 전하는지를 자랑한다.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보면 거의 교회나 예배 팀 밴드, 학교, 신학자, , 노래, 교단, 사역, 정치, 목사, 싱어들 등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그러다 결국 누구의 성경 해석이 가장 정확한지, 누가 가장 지혜롭고 똑똑한지, 누가 기름부음을 받았는지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다. 좋아하는 리더를 선택하면 다들 그를 예배하는 섬으로 들어간다. 그 순간, 다시 연합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리더나 신학에 관해서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모였으니까 말이다. 자기 리더의 강점과 다른 진영의 약점에 관해서 모두의 생각이 완벽히 일치한다.

그 섬에 머무르는 한 화합을 누릴 수 있다. 최소한 섬 안에서 누군가가 새로운 의견을 내놓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모아 다른 섬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그렇다.

--p.139-140

 

교인들이 둘 셋 모이면 어떤 목자의 설교에 대하여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나도 그렇다. 어느 목자의 설교에 대해 받은 은혜를 전하는 방식으로, 목자에 대한 우상화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수다를 떤다. 대부분은 우상화한 리더에 대한 의견과 감정이 일치함으로 유쾌함에 이르고, 화평을 누리면서.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평화려니 착각하며 우리를 둘러싼 관계망에 나름 충만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다. 사소한 일로, 어떤 오해와 마음의 배신을 통해 우리는 함께 만든 우상의 섬에서 쓸쓸하게 빠져나오는 경험, 누구나 한 번쯤 했을 것이다.

 

제자를 키우지 않아서 성숙해 가지 못하는 신자가 너무도 많다. 그들은 선생이 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우는 입장에 머물러 있다(5:12). 선생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을 때까지 자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준비를 하기 위해 수업을 받기는 한다. (이 책과 같은) 기독교 서적을 읽고 설교 영상을 열심히 찾아서 듣고 본다. 그것이 성숙의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그들은 참된 성숙의 길을 계속해서 걷지 않고 엉뚱한 길로 빠진다. 바로 지식 습득만을 추구하는 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식은 늘어나지만 겸손은 깊어지지 않는다. 지식으로 머릿속을 꽉 채우긴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비우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성령의 열매의 본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를 키우지 않는다. 그 결과, 자기 삶이 그리스도와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성경에 관해 많이 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성숙한 신자로 여긴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너무도 많다. 그들은 믿음의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 복음 전파에 삶을 걸지 않는다. -p.149-150

 

나도 제자를 키우기보다 배우는 데 더 깊은 관심과 열정이 있다. 제자를 키우려면 시간 내어 준비하고 관심과 사랑의 수고를 아낌없이 쏟아부어야하지만, 그래서 신경을 곱절로 써야하지만, 배우는 데는 나의 노력만 경주하면 되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챈 목사의 지적을 받으니 적절한 때에 선생 되기를 거부하는 것도 죄임을 알겠다.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하라, 는 온누리의 모토가 내 인생 모토이기에 나는 둘 중 하나만 하고 살아도 잘 사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복음을 들고 배움을 나누는 현장에도 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다.

 

신자임을 자처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연결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적으니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적을 수밖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계적이거나 아예 끊어져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하다. 사랑이 피상적이면 사소한 의견 차이 한 번으로도 서로 등을 돌리고 삿대질을 해 댈 수밖에 없다.-p.34.

 

세상에는 자기 인생의 깊은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이들이 숨겼던 심중을 드러낼 때,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타인의 가슴을 찌른다. 하나님을 경험했으나 때로 은혜가 사라져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기계적이 될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신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외로워할 때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주님은 너무나 소중해서 보이지 않는 사랑인데도 말이다.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 때 나는 교인들이 부담 없이 와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부담 없이 돌아갈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솔직히 교인들이 서로를 향한 사랑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내가 다니고 싶은 교회를 만들었다. 나는 많은 사람이 삶이 바쁘기도 하고, 친구도 워낙 많아 다른 교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과만 가까워지기 위해 교회에 온다고 생각했다. 내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다 보니 남들도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은 적중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 리더십들과 나는 우리 서로가 사랑한다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점점 죄책감이 찾아왔다. 물론 우리가 사랑이 없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몰려오는 것은 우리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매주 우리는 성도들에게 서로를,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부는 관심을 보였지만 대부분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다 내 탓이었다. 서로 적정한 거리에서 모이는 방식에 익숙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변화는 쉽지 않았다. 서로 관계를 맺도록 억지로 자리를 만드니 다들 부담스러워했고, 적지 않은 교인이 다른 교회로 떠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전까지 15년간 나는 오직 수적인 성장만 경험해 왔다. 나는 교인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출석 교인 숫자 증가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 함께했던 교인들이 속속 떠나갔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기였다.-p.155-156

 

목회자의 역할은 교인들을 하나 됨으로 이끄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논리로만 보면 사람들은 연합 따위에 관심이 없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 됨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들을 알아볼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따라서 교회 리더십들은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리는 연합이라는 가장 좋은 길로 가야 한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부담스럽지 않은 환경을 원한다. 배운 대로 꼭 행하지는않아도 되는 환경을 원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제자 훈련을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두 가지 가장 큰 계명을 자주 잊어버린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둘째,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22:36-40). 제자 훈련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이런 계명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이 계명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이다.-p.162-163

 

작은 교회에 등록해 느꼈던 문제가 이렇게 세계적인 추세인줄은 몰랐다. 코로나로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지경이니 거리두기가 모두를 위한 건강 면에서는 맞지만, 단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거리 때문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프랜시스 챈 목사의 통찰을 통해 배운다. 성도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교회 카페에서 심방을 받는 일이 마땅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이다. 목자들은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에 붙잡아 두기 위하여 교인들의 편의를 봐주는 척하며 부담스럽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니 저자 목사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교인과 목자, 둘 다 공범이다.

교회 안에서 오가는 동안 서로 낯은 익었지만, 그래서 친절한 양 인사는 하지만 까딱, 하는 인사, 거기까지인 관계! 신입교인을 위한 공간에서 온갖 친절한 모습으로 다과 서비스는 하지만 같은 구역에 산다는 정보에 미리 전화부터 차단해 놓는 모 권사의 모습에 씁쓸했던 적이 있다. 이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거리두기를 핑계로 이러한 관계는 더욱 정당한 모습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이마다 깨어있는 목자의 예리한 통찰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여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이웃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할 시점이다.

 

서로가 더 깊은 연민과 희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자.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시며, 각기 다른 일에 대한 열정을 주신다. …… 우리는 다 다르다.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어느 것 하나라도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모든 것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고 똑같이 참여할 수는 없을 뿐이다. 하나님과 달리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일이 우리와 가장 비슷한 사람들에게만 다가가기가 쉽다. 인생의 경험과 선택, 관심사가 우리와 가장 닮은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기가 쉽다. 성격이나 의견이 우리와 충돌하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기가 쉽다. 하지만 더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기치 아래 연합하는 공동체야말로 진정 아름답고 강력하다. 그런 공동체는 우리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차이보다 우리의 왕을 향한 공동의 사랑과 충성을 훨씬 더 중시한다는 점을 온 세상에 보여 준다. 말 그대로 천국을 보여 준다. 누구라도 자신의 교만 때문에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p.220-221

 

대개 같은 성향,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성향은 세대를 불문하고 보이는 뚜렷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다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도 공동체를 이루어 천국을 맛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님의 연합을 실천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연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어디서도 의미 있는 연합을 이룰 수 없다. (p.231)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 에서 출발한다고 저자는 일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말사랑으로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대화 속의 모든 문장을 사랑으로 함으로써 더 큰 연합을 이끌어내야 한다. 당신이 가장 최근에 나눈 대화를 돌아보라. 사랑과 연합을 이루는 표현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p.231)

 

연합을 위한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다. 사랑을 담은 말 한 마디! 그런데 말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으니 바로 각자의 삶이다.

 

교회 안에 더 큰 연합이 나타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작은 데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부터 정돈하라.(p.229)

 

나의 삶을 정갈하게 정돈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사랑을 담은 말이라도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일침. 한 순간의 실수라도 삶이 뒷받침되지 않아 대중에게 전한 메시지가 그 힘을 상실하게 된 경우를 이번에도 보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가족 관계, 교우 관계 등등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것은 없다. 나는 나의 삶을 돌아보며 그저 지금사랑하는 것처럼노력할 뿐이다.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이자 명령이며 제자 된 자들이 이 세상에 대하여 예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큰 증거이기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의 사명이라는 말에 밑줄 긋는다.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연약한 지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 2021.7.15.

 

 






교회 안에 더 큰 연합이 나타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작은 데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부터 정돈하라.(p.229)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연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어디서도 의미 있는 연합을 이룰 수 없다. (p.231)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 ‘말’에서 출발한다고 저자는 일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말’을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대화 속의 모든 문장을 사랑으로 함으로써 더 큰 연합을 이끌어내야 한다. 당신이 가장 최근에 나눈 대화를 돌아보라. 사랑과 연합을 이루는 표현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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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로 하나 될 때까지
프랜시스 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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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이자 명령이며 제자 된 자들이 이 세상에 대하여 예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큰 증거이기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의 사명’이라는 말에 밑줄 긋는다.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연약한 지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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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라는 선물 - 우리 몸에 새겨진 복음의 경이한 한 몸의 의미
폴 브랜드.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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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는 것

-[몸이라는 선물] 서평

 

몸은 정말 선물일까? 나는몸이 선물이라는 말에 슬픔을 넘어서 반감을 느낀다. 영혼까지도 파괴될 것 같은 육체의 질고를 알기 때문이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져 살아내야 하는 삶의 질고도 만만치 않은데 온몸으로 감당해야하는 만성통증을 달고 사는 사람에게 몸이란 벗어버리고 싶은 짐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누구나 한 여인의 육체가 찢기는 고통 속에서 이 세상에 와 본향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생로병사의 고통이다. 그래서 몸이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필시 인간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의 강도가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결국 우리의 끝은 죽음인데, 죽음을 담보로 주어진 삶 앞에서을 선물로 느낄 수 없는 이들이 분명 있을 테고 (부활을 믿지만, 부활하기까지의 고통은 어쩌란 말인가?) 그런 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인간에게 육이 없이 영만 존재하도록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몸이 생로병사를 겪지 않고 질병의 고통을 모르도록 창조되었다면 더욱 완벽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고통의 근원과 인간사 갈등의 사유가 적어도 반 이상은 사라져버렸을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완벽하신 주님이 왜 우리에게 거추장스러운 몸을 주셨을까? 그리고 누군가는 몸을 선물이라고까지 말할까? 저자에게 내 마음의 반론이 설복당할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책장을 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나의 이런 반박과 궁금증에 대한 정답을 새롭게무마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동안 기독교 채널로 배운 내용을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그렇다하여 이 책이 지닌 고유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독특하고 아래 열거할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내가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는 의구심들을 몹시 학구적이고 의학적인 방법으로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 책은 우선 표지의 제목과 책 내용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외과 의사이자 의료 선교사로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폴 브랜드와 탁월한 필력을 지닌 작가 필립 얀시가 공동 저자로 집필한 이 책의 원제는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심히 기묘하게 지음 받은)In His Image(그의 형상을 따라). 두 책을 압축하고 개정한 합본이다. 이 책은=산물이라는 표제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인체의 신비를 통해 은유적으로 도출해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의 표제 몸이라는 선물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 몸의 은유인 것이다.

일찍이 한 몸의 지체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연대할 것을 강조한 나의 사부는 헨리 나우웬이라는 영적거장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우리 각자에게 독립된 하나의 몸을 주시며 개개인들이 서로 떨어져 지낼 것이 아니라 서로 연합하라 이르셨다. 몸을 낮추어 지체들을 섬기고 각각의 은사와 개성을 더해 하나로 연합하여 더 큰 하나가 되라 하신 것이다. 헨리 나우웬이 주장하는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이미 일독한 적이 있어서 폴 브랜드와 필립 얀시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이 새로운 건 아니었다. 다만 의학적이고 학구적인 은유에 끝없이 밑줄을 그으며 문체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발췌한 밑줄에 감상을 피력하는 식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건강한 몸은 가장 약한 부위의 아픔을 함께 느낀다’-308

고통은 인체 세포를 보호할 때만큼이나 공동체의 지체들을 통합하는 데도 중대한 역할을 한다. 건강한 몸은 가장 약한 부위의 고통을 느낀다. 신체 조직이 다치면 아파서 부르짖는데 그 소리가 온몸에 들린다. --314~315.

 

폴 브랜드는 인간의 몸을 개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고 표현한다. 개개의 건강한 세포들이 몸 전체를 위해 협력하듯이 우리 각자에게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기여할만한 은사로 하나가 되라고 한다.‘건강한 몸은 가장 약한 부위의 아픔을 함께 느낀다’(308). 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려면 서로의 고통에 연대해야한다는 의미이다. 그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개개인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어서 저자의 사상에 내 감정이 산뜻 따스해지진 않았다. 저자는고통을 다룰 때 현실과 동떨어져 학구적으로만 접근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으나 학구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느껴져서 그 이론의 적합성을 강요받는 느낌도 조금은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책의 몸에 대한 기록이 권력과 풍요로움 가득한 외과의사의 연구실이 아니라 고난과 빈곤의 대명사같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실이라는 걸 알아채면서 서서히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문장의 행간에 박혀있는 저자의 눈빛이 젖어있는 걸 본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장면이 있다. 루이지애나 병원에 있는 우리 환자들이 자신의 손발과 주고받던 소통을 잃을 때다. 통각이 사라지면 그들은 자신의 팔다리를 여분의 부속물로 본다. -312

 

자신의 환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정형외과 의사의 처연한 눈빛이 이렇게 책갈피에,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에서 울고 있었다. 통각 잃은 환자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눈빛.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이룬 지체의 특징이다.

 

내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몸의 통합성을 일깨우려 해도, 통증이 없는 그들로서는 도무지 태평한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고통이 몸을 통합시켜 주듯이 고통을 잃으면 그 통합성이 무너져서 되돌릴 수 없게 된다. -313.

저자는 이렇게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을 대신 느끼며 자신의 환자들을 온 마음으로 껴안았고, 그렇게 하여 혁신적인 의술의 발전과 날카로운 통찰력과 깃든 이 책을 쓸 수 있었으리라.

 

인체는 개개의 세포들로 구성된 하나의 공동체. 예컨대 백혈구는 아메바와 매우 비슷하지만 자율성은 아메바보다 훨씬 떨어진다. 백혈구의 임무를 전체 유기체가 결정하므로, 백혈구는 때로 유기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 그런데도 백혈구의 필수 기능은 다른 아무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아메바는 위험을 피해 달아나지만 백혈구는 위험에 맞서 싸운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도 백혈구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당신과 나도 마찬가지다.

사도 바울은 이 비유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고찰했다. 바울의 비유를 내가 더 보충해 보았다. <몸은 일체로되 다세포로 되어 있으니 많은 세포가 한 몸을 이루느니라. 만일 백혈구가 나는 뇌세포가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하였다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속하지 않은 게 아니요 만일 근육세포가 나는 시신경세포가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하였다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속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온몸이 시신경세포면 걷는 기능은 어디서 나며 온몸이 청신경이면 시각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모든 세포를 몸에 두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느니라. 만일 모든 세포가 동일하면 몸은 어디냐. 이제 세포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32~33.

 

저자는 정형외과 의사답게 피부의 복원력, 뼈의 힘과 구조, 근육의 역학적 균형을 가진 인체를 우주에서 가장 경이로운 공동체로 비유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진술해 나간다. 몸이 있음으로써 치러내야 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생각한다면 선물이란 말은 분명 대치되는 언어인데 몸에 고통이 있음으로써 삶,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은 환자에게 헌신한 의료 선교사의 경험과 의학지식에서 온 것이기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 저자는 계속 몸 어디에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통각으로 몸의 신경세포를 마비시키기 시작해 종국에는 자멸의 상황까지 치닫는 한센병 환자들의 실태를 세밀 묘사해 보여준다. 한센병 환자가 입는 부상은 한센병에서 온 상처가 아니라 통증에 무감각한 결과라며 의구심 많은 독자의 반론을 가볍게 맞받아치는 것이다. 건강한 몸은 수십조() 개의 세포가 제 몫을 하며 긴밀히 협력해 통증 신호를 보내는데 비해 통각을 잃은 한센병 환자는 통증에 대한 자각을 못하다보니 적절한 대처를 못해 몸의 세포를 상실하게 된다는 논리는 의학적 사실에 기반해 설득력을 지닌다 해도 너무 극단적이지 않은가? 한센병이 이 시대 그리 흔한 병은 아니기에 나는 저자의 논리가 처음엔 좀 낯설었다. 그런데 이것이 21세기에도 너무 흔한, 당뇨병 환자에게도 적용되는 예여서 다시 주목하여 본다. 브랜드 박사의 통증에 대한 혁신적인 연구로 해마다 수만 병의 당뇨병 환자가 발을 절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지론인, 통증이야말로 생명 유지의 열쇠이며 선물이라는 결론은 이렇게 그의 삶과 밀착되어 있는 삶의 결론임에 밑줄 긋게 되었다.

는 일종의 하드디스크처럼 우리의 동작을 하부 뇌에 저장한다. 어떤 행동이든 오래 반복되면 잠재의식의 반사 작용으로 굳어진다. 그래서 예컨대 걷는다는 생각이 없이도 걸을 수 있다. -276

는 지배할 때도 있고 위임할 때도 있다. 뇌가 내리는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결국 인체 곳곳에 있는 국소의 자율 세포(평범한 최종 관문)에 달려있다. 각 신경세포 속의 초소형 컴퓨터가 내 의도를 파악하고, 다른 근육들과 상의하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계산하고, 모든 통증 신호를 감시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해당 근육 집단에 할지 말지 명령을 보낸다. -358

 

근육이 어찌나 충직한지 인간의 의지로는 심장 박동이나 호흡을 멈출 수 없다. 아무도 숨을 참아서 자살할 수는 없다. 허파에 이산화탄소가 쌓이면 이때 유발되는 기제가 의식적 욕망보다 우세해 늑골과 횡격막과 허파의 근육을 움직이게 만든다. ---물리적 몸이든 영적 옴이든 근육은 자꾸 써야 한다.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면 근육도 위축되고 작아져 나머지 몸에 흡수된다. -279

 

인체의 모든 작용에는 그에 맞먹는 반작용이 있다. 근육도 서로 짝을 이루어 길항 작용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삼두근이 수축하면 이두근은 이완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경생리학 분야 선구자인 찰스 셰링턴 경이 입증했듯이, 모든 근육 활동에는 억제와 흥분이 동시에 수반된다. 근육이 문장이라면 문장마다 그러나로 이어지는 대등절이 있어 앞뒤의 균형을 잡아 준다. -280

 

충직한 세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경청이다. 나는 몸 된 교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파악하고, 다양한 메시지를 숙고하고, 준비된 자세로 기다려야 한다. 성령께서 다양한 통로로 말씀하시며 내게 갈 길을 알려 주시겠지만, 이는 내가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나야 곧장 행동으로 뛰어들고 싶을 수 있지만, 그것이 성령께서 감화하신 반응이 아니라면 몸 된 교회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390-391

 

그는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매력적인 소통 기관으로써 피부를 소개하고, 방어의 최전선인 피부가 각종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몇 년 전, 23일 교회 수련회에 다녀와서 한 달이 넘도록 아토피 피부염에 시달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아토피를 앓던 공동체의 아이를 위해 매일 매순간을 드려 중보 했다. 동병상련의 고통을 통해 중보자로 섰고 몇 개월 뒤 놀랍게도 아이가 아토피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에게 고통을 통해 중보자로서의 행동을 펼치라고 그 고통을 주셨던 걸까? 고통에 대한 삶의 화두를 다시 꺼내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힘과 재물과 미모를 떠받들지만, 하나님은 나를 한센병 환자들 속에 두셨다. 그들은 대게 약하고 가난하고 볼품없다.’(42)

 

일찍이 내가 존경하는 영적 거장 헨리 나우웬처럼 이 책의 저자 폴 브랜드도 그의 지혜롭고 영리한 두뇌와 몸을 이 지구상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인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와 연구로 보냈다. “열한 자녀 가운데 누구를 가장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아픈 자녀를 몸이 성해질 때까지 사랑하고, 떠나 있는 자녀를 집에 돌아올 때까지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존 웨슬리 어머니처럼 매번 고통당하는 이들의 편에 섰던 예수의 마음으로 그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다.

두꺼운 한 권의 책을 통해 다양하게 펼쳐지는 은유에 비해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너무나 단순하고 간결하다. 고통이라는 선물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특권을 놓고도 감사하라는 것이다(347).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고통을 가진 지체들과 연대하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질문처럼 내가 처음에 가진, ‘따뜻한 사람이 어떻게 추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316)’하는 의구심을 폴 브랜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하고 초라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묘사로 가볍게 종식시켜 주었다.

건강한 몸은 가장 약한 부위의 아픔을 함께 느낀다.’- , 지금 건강한가? 그렇다, 통증을 느낄만큼 건강하다! 고통이행동을 촉구하는 자극이 될 수 있도록 고통에 감사해야한다는 이 책의 결론을 뼈에 새긴다.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니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야지. 인간을 충분히 영적인 존재만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몸을 주시고 당신이 먼저 몸을 통해 고통 받으심으로 인간과 연대하신 주님을 기억해야지. 만성통증이라는 고통에 지배당하지 않고 싶은 이들, 몸이 내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의식의 전제를 늘 기억함으로 강인함을 유지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매일 외치며 잊지 말아야겠다.-‘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언제나고통이라는 선물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밑줄 긋기
사랑을 수표나 신용카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면 인격 대 인격의 반응을 놓치고 만다. 반면에 몸으로 부대기는 사랑은 인격적 소통을 이끌어 낸다. 세상에 도움이 필요한 지역이 많지만 모두가 타국까지 가서 봉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감옥과 노숙자 쉼터를 방문하고, 집이나 병실에 갇혀 사는 환자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한부모 가정을 지원하고, 부모 없는 아이를 입양해 기르는 일 등은 우리도 할 수 있다. 굳이 멀리서만 사랑하면 자신도 빈곤해진다. 사랑은 직접적인 소통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 진리의 가장 좋은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의 리더이신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신데도 이 땅에서 사셨고, 그 경험 덕분에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에 능히 공감하신다(히4:15),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서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을 보시고 우리 곁으로 오셨다.
…우리가 세상을 다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이 땅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고자 함께 힘쓸 수는 있다. 우리가 도우려고 내미는 손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의 손이다. (44쪽) : 이 구절은 내가 이 책에서 찾아낸 기도의 응답이었다. 어쩌면 이리도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는지 놀랐다. 이 말씀을 붙들고 나는 다음 주부터 감호시설의 청소년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정했다.

하나님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눈에 띄는 대로 다 해결하라고 명하신 적이 없다. 다만 그분이 당신에게 주신 특정한 관심사와 남다른 전문 기술과 독특한 기회가 있다. 당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라. 유난히 마음이 끌려 돕고 싶은 분야는 어디인가?

작은 도움이나마 장기간 베풀면 어떤 가치가 있는가? 예를 들어 당신 동네나 교회에 있는 금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 한 명을 도울 수도 있다. --345쪽.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므로 그 영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신비롭기 그지없게도 하나님은 그 형상을 우리처럼 평범한 수많은 사람을 통해 드러내기로 하셨다. 이 형상을 우리는 한 몸과도 같은 집단으로서 지닌다. 누구든지 혼자서는 온전하지 못한 형상에 그쳐, 마치 박살 난 거울의 파편처럼 일부는 틀리고 늘 일그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각양각색의 우리가 공동체로 모이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 p.30-31
인체는 개개의 세포들로 구성된 하나의 공동체다. 예컨대 백혈구는 아메바와 매우 비슷하지만 자율성은 아메바보다 훨씬 떨어진다. 백혈구의 임무를 전체 유기체가 결정하므로, 백혈구는 때로 유기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 그런데도 백혈구의 필수 기능은 다른 아무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아메바는 위험을 피해 달아나지만 백혈구는 위험에 맞서 싸운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도 백혈구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당신과 나도 마찬가지다.
세포는 유기체의 기본 단위다. 세포는 자기만을 위해 살 수도 있고 전체 유기체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동일한 원리를 이웃 공동체와 심지어 국가 같은 인간 집단에도 적용할 수 있다. …
사도 바울은 이 비유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고찰했다. 교회를 인간의 몸에 빗댄 본문인데, 날마다 인체의 세포를 다루는 내게는 특히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바울의 비유를 내가 더 보충해 보았다.
몸은 일체로되 다세포로 되어 있으니 많은 세포가 한 몸을 이루느니라. 만일 백혈구가 "나는 뇌세포가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하였다"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속하지 않은 게 아니요 만일 근육세포가 "나는 시신경세포가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하였다"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속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온몸이 시신경세포면 걷는 기능은 어디서 나며 온몸이 청신경이면 시각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모든 세포를 몸에 두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느니라. 만일 모든 세포가 동일하면 몸은 어디냐. 이제 세포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32~33쪽.


실아남으려면 수시로 멈추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들이마셔야 하고, 의식적으로 내 사고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쪽으로 돌려야 한다. 성령님과 생생하게 교제하지 않고는 이질적인 이 땅의 대기에서 영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거리를 내다보면서도 생각과 영혼은 예루살렘에 가 있었다.-268-269
몸 된 교회가 움직이려면 많은 지체들이 원활하고 자발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각가의 뜻을 머리이신 주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힘차고 대단한 행동도 전체 몸에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288

한센병 환자는 끊임없이 속삭이는 세포 간의 대화를 잃었기 때문에 5킬로미터를 걸어도 걸음걸이를 바꾸거나 체중을 옮기지 않는다. -- 고통은 다양한 어조로 대화한다. --위험이 커지면 고통의 속삭임이 보통의 말소리로 변한다. --305

인체에서 고통을 감시하는 장치가 고장 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해 영구 손상을 입을 수 있다. --306
통증은 적으로 간주될 때가 너무 많지만 사실은 가장 헌신적으로 우리의 건강을 지켜 주는 감각이다. --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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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문화 사이 - 당신의 신앙을 보고 읽고 즐기는 것에 연결하라
대니얼 스트레인지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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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문화 사이 : 당신의 신앙을 보고 읽고 즐기는 것에 연결하라

대니얼 스트레인지 저/정성묵 역 | 두란노 | 20200318

 

 

주일학교 초등부 교사로 봉사하던 몇 년 전 일이다. 신임 전도사님이 오셔서 당시 유행하던 좀비 영화관람에 대하여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안 봐야 하는 영화라고 단정 짓는 말에 마음으로 실망을 느낀 적이 있다. 세상 문화를 무조건 나쁘다고 외면만 하는 것은 오히려 복음 전할 기회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복음 전파를 하려면 세상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또한 발달 단계에서 오는 호기심을 애써 짓누르며 고지식한 아이로 자라는 것보다 세상 문화를 한두 번 쯤 경험하는 활동을 통해 우상숭배 문화를 스스로 멀리할 수 있는 아이가 되도록 키우는 것이 더욱 건강한 일로 여겨진다.

지금이나 그때나 좀비 영화를 아이가 보기 원한다면 나는 봐야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 볼 때 부모가 동행하면 좋겠고, 관람 후 자녀와 함께 감상을 나누는 일이 필수라는 전제 조건만 지켜진다면 말이다. 부모가 동행할 수 없더라도 영화 리뷰나 자료를 참고하여 관람 후 지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만큼, 관람 후 리더의 지도는 필수로 따라야 할 전제 조건이다.

아이들이 세상 문화를 접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각종 미디어 홍수 속에서 저희들끼리 아는 것을 공유하며 친구가 되고 관계를 맺어가는 21세기 아이들이 크리스천이라는 명분으로 시대 조류를 모른 체만 한다면 일단은 무리에서 따를 당하고 맹신도로 취급당할 것이 염려되어서다.

그러므로 원한다면 좀비 영화를 보되, 보고나서 그것이 기독교 시각과 어떻게 다르며, 세상 문화의 폐해를 막는 기독교 세계관이 왜 중요한지를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세상 문화와 양육에 대한 나의 지론이다.

문화, 종교, 공공신학 교수인 대니얼 스트레인지 (Daniel Strange)<복음과 문화 사이>에 눈길이 간 것은 이러한 내 나름의 이러한 주장이 맞는 것인지를 새삼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복음과 문화 사이를 잇는 것이야말로 복음 전파의 첫걸음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복음과 문화 사이>를 누비며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법을 찾아나서 보았다.

세 개의 파트로 나누어진 이 책은 먼저 첫 파트에서 문화에 예수의 복음이 필요한 이유, 문화의 중요성, 죄로 얼룩진 문화의 추락, 문화 속에 숨은 거짓 우상, 문화의 시금석으로 추앙받는 영화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두 번째 파트는 복음으로 문화에 접속하는 방법으로써, 1세기 바울의 문화를 소개하고, 세상 문화를 해체시키고 십자가 소망을 심는 방법을 제시한다.

세 번째 파트는, 크리스천이라면 문화 크리에이터로서 예수 복음으로 세상을 리뷰하라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내가 질문하고 싶은 <좀비 영화>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죽은 자가 산 자를 잡아먹는 세상에 생명을 불어 넣으라는 소제목과 함께 편성되어 있다. 마치 나를 위한 책 같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컬러링북에 대한 제목도 있다. 컬러링북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하는 세대들을 향한 일침으로 저자는 하나님이 빠진 동산에 에덴동산의 평안을 보이라고 한다. 들새를 통해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엿보게 하고, 기술과 안전에 대한 집착을 영원한 복음으로 대체시키라는 충고도 들어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 마음속의 뿌리와 세계관의 산물로 존재하는 문화에 대한 이해와 복음 문화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복음으로 문화에 접속하는 방법과 문화 크리에이터들에게 복음 문화의 세밀한 성경적 렌즈를 제시하고 있다.

문화란 우리가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방식이다. 그리고 문화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참되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을 삶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37)

내가 찾는 <좀비 영화> 관람에 대한 견해는 <챕터4 문화의 시금석 : 이런 영화는 봐도 되나요?> 에 있다. 마치 마주보며 대화하듯 저자는 혹시 이번 장을 기다렸는가? 책장을 획획 넘기다가 이번 장에서야 비로소 정독하기 시작했는가? 사실, 이번 장을 쓰기를 계속해서 미루었다.”고 말한다. 문화 창출과 참여에 대한 논쟁은 과연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고 인류의 수만큼이나 많은 논쟁이었다.

저자는 곧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요약해 상황에 따라서라고 말해준다.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방송 시청을 예로 들면서 상황에 따라서판단하고 선택하라는 답은 정말 명답이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문제의 신학적 쟁점은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의 문제이며, 방종이나 율법주의를 초월해야하는 미묘한 균형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답변 역시 마음에 쏙 든다.

결국 이 문제의 답은, 제사 음식을 두고 이것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논쟁하던 제자들이 들은 답과도 같다. 문화 창조와 문화 참여가 개인 영적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스스로를 이끌어갈 자신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보든 무엇을 먹든 그것은 각자에게 맞는 각자의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타인의 방식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 섹스, 권력처럼 이미 그 위험성이 만방에 드러난 해로운 문화들을 조심하고 탈피하면서 인간 삶과 번영에 대한 성경적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백신 기술과 안전에 대한 집착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는 때, 이 책은 자신을 위한 자가 격리의 방에서 깊이 읽으며 기도했으면 좋겠다. 오랜 사회적 격리로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위로 한답시고 세상은 또 어떤 우상 문화로 세상 사람들의 갈망에 다가서려할 지 알 수 없기에. 문화 속에 우상숭배를 담는 한, 이 땅을 향한 재앙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적 문화, 어떠한 고난이 와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복음의 문화이다.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 참여 방법에 대한 성경적 제안을 실천하는 것은 곧 우리가 현재 당면한 문제의 답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는 것을 오늘도 스스로를 격리시킨 골방에서 무릎 꿇어 회개하며 기도하는 크리스천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성경적 문화 창출의 필요성과 성경적 문화의 정의로 최종 요약해 볼 수 있다. 성경적 문화 창출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분별력을 발휘하고 인간 삶과 문화의 번영에 대한 성경의 청사진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지 않으면 남들이 그릇된 청사진을 내놓을 것’(105)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문화를 창출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 나아가 그분의 위대함을 뽐내는 일‘(59) 이 되어야 한다. * 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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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우리가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방식이다. 심지어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들도 계속해서 의미를 찾는다, 문화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참되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ㄴ는지-을 삶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37

좋든 싫든 문화 참여는 피할 수 없다. 인간이 문화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매일 문화를 소비하고 창출한다. 문화를 떠나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는 문화에 ‘속해’ 있다. 문화는 우리 존재의 뗄 수 없는 일부다. --39 자의든 타이든---> 자의든 타의든


우상은 "내가 우상이다"라고 떠들면서 다가오지 않는다.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43

이성을 우리의 최종적인 심판관 혹은 권위로 삼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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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길 - 미혹과 불안의 시대, 예수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
헨리 나우웬 지음, 가브리엘 언쇼 엮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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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길서평

 

나에게 성경 곁에 놓아두고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바로 헨리 나우웬의 저서들이다.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하버드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장애인 공동체로 들어간 헨리 신부님. 이 지구상 어딘가에, 명문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장애인 공동체로 들어가 정신지체장애인들과 벗하며 살다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인의 관심은 집중되는데, 그의 행보는 겉으로 보이는 인간적인 선행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내밀한 고통의 흔적이 승화된 기록을 통해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살아있다.

그가 남긴집으로 돌아가는 길(The Road to Daybreak, 포이에마),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Life of The Beloved, IVP),영적 발돋움(The Three Movements of the Spiritual Life, 두란노),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 두란노) 등의 책을 집어 드는 순간, 그의 기록, 그에 관한 기록들은 나의 내면에 스며들어 위로와 치유의 선물로 현재화 된다. 책의 행간마다 녹아있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의 삶에서 내 영혼의 구세주 예수가 걸어 나온다.

불안한 시대를 사는 법이라는 주제 강연 아래 여섯 편의 세부 주제로 나뉜 사순절 강연록예수의 길은 때마침 전 세계가 코로나19에 잠식당해 불안한 때, 우리가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이웃을 향한 긍휼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기에 더없이 소중하다.

여섯 편의 소주제 핵심어는 초대, 부름, 도전, 대가, 보상, 약속으로 다음과 같다.

 

CHAPTER 1. 초대 - “와서 보라

나의 길을 떠나 예수의 길에 들어서다

 

CHAPTER 2. 부름 - “나를 따르라

익숙한 두려움에서 일어나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다

 

CHAPTER 3. 도전 -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충만히 사랑받고 자유로이 사랑하게 되다

 

CHAPTER 4. 대가 - “너희 십자가를 지라

답 없는 내 실상을 예수 십자가에 잇대다

 

CHAPTER 5. 보상 -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으리라

마음이 시린 날에도 생명의 하나님을 누리다

 

CHAPTER 6. 약속 -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살아 내다

 

여섯 개의 챕터에서 내게 가장 다가온 것은 원수에 대한 이야기. (3번째 챕터), 그리고 5,6번 챕터에 있는 기쁨과 죽음에 대한 말씀이다.

내 마음 속에도 원수가 있었다. 미숙한 진료와 실수로 노모를 중태에 빠뜨리고는 사과 한 마디 없이 중환자인 노모를 다른 병원으로 가게 했던 무지한 의사, 그리고 보험사의 뇌물에 미혹 당했는지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는 환자를 퇴원하게 만들었던 정형외과의를 저주하며 마음에서 지워내는 데 수 년이 걸렸다. 그때, 용서의 유익을 알고는 있었지만 감정과 이성은 내 뜻대로 분리되지 않았다. 돌아보건대,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차오르고서야 나는 매일 생각나던 증오의 감정을 조금씩 잊었고 의지적으로도 차츰 내려놓을 수 있었다.

헨리 나우웬은 성경 말씀이니 무턱대고 원수를 용서해야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심리학자답게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했을 때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억울한 대가를 치러야하는 현실적 손해를 인지하게 한다. 말하자면, 증오의 굴레에서 산다는 것은 계속 자신의 내면을 원수의 지배 아래 두는 일이 된다. 원수의 지배에 사로잡혀 예수의 사랑과 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헨리 나우웬은 성경 말씀과 심리학에 기초를 둔 처방으로 독자가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크든 작든 용서의 문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문제일 것이다. 나라도 구제 못한다며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만 치부되었던 예전의 가난한 생활에 비하면 현대의 가정 경제는 정말 풍요로워졌다. 그런데 콩 한 쪽도 나눠먹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인정이 넘쳤던 옛날에 비해 현대의 가정은 더 많이 붕괴되고, 사회 속에서의 인간관계는 더욱 계산적이고 이기적이 되어버렸다. 코로나가 아니어도 홀로 격리된 내 일상 속으로는 인간에 대한 긍휼, 진정한 사랑의 부재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 삭막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들려오고, 나는 저마다의 가슴에 죄와 원수가 동시에 사는 것을 보곤 한다. 그로 인해 가장 아픈 것은 결국 자기 자신. 관계의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이 책의 용서챕터를 읽어주고 싶다.

 

또 한 챕터, 밑줄 그은 말씀들은 기쁨과 죽음에 대한 헨리 신부님의 해석들이다.

코로나로 전 세계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나는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일마저도 참으로 미안하게 느껴졌다. 서서히 물속으로 침잠해 죽어가는 아이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만 했던 세월호의 고통이 고스란히 되살아나서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세월호 사건이 우리사회의 부실을 전 세계에 드러낸 수치였다면, 이번 코로나19는 전 세계 사람들이 죽음의 바다로 침몰하는 코로나호 사건이라고나 할까. 세계 각국 특히, 아름다운 음악과 유적과 낭만의 나라 이탈리아가 매일 수백,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내며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뉴스에 경악했다. 봄이 되면서 서서히 바이러스 종식의 기미는 보이고 있지만, 어쩌면 지난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진 소리 없는 전쟁이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 누구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이번 전쟁이 무사히 끝난다 해도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또 다른 신종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이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해야 할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건으로, 사는 곳은 달라도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임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누군가의 안부를 챙기며 잘 살아있자고 파이팅을 외치는 일이 참으로 미안하게 여겨졌다. 이미 많은 이들이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신종 바이러스에게 목숨을 빼앗기고, 누군가는 아직도 철저하게 격리된 병동에서 외로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우리만 미안하게 살아있거나, 우리라도 겨우겨우 살아있거나, 그러자고 몰래(?) 결의하는 일이라니.

그런데 헨리 나우웬은 나의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위로해 준다. 헨리가 죽음을 통해 가리켜 보이는 것은 성령님의 임재였다.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편지를 쓰는 동안 우리 안에서 친밀함이 자라나듯, 이 세상에 부재한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곁에 있는 것이라는 걸 새삼 알게 했다. 보혜사 성령처럼 이 세상 삶을 마친 이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곁에 머물며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킨다는 말씀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예수님처럼, 내 육신의 아버지처럼, 죽음의 이름으로 이 세상 삶을 마친 이들은 기실 죽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은 우리가 이제야 막 익힌 사회적 거리 두기의 가장 심화단계가 아닐까. 비록 보이지 않는 사회적 거리를 두게 되었으나 마음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져 마침내 내밀한 영혼의 교감이 이뤄지는 죽음의 신비!

 

죽음으로 우리를 떠나간 이들은 마음속에 남아 계속 우리를 양육한다. 계속해서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 삶을 심화시킨다. 이는 위대한 신비다. 이 신비를 예수님이 가장 적나라하게 계시해 주셨다. --158

 

만일 코로나 이후에 우리 사회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죽음의 대가일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 안에 바람직한 성장이 이뤄진다면 먼저 간 사람들이 일러주는 영혼의 속삭임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다보면 죽어서도 누군가의 내면에서 성장의 밑거름으로 움틀 수 있는 한 알의 밀알이 될 삶에 대한 의무가 마음을 조금은 무겁게 한다. 그래서 다시 앞장을 넘겨 헨리 나우웬이 가장 중요하게 일러준 말씀들을 살핀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8

헨리 나우웬은 이 말씀을 네가 정말 사랑 안에 있으면 스스로 택하지 않은 곳이라도 능히 남에게 이끌려 갈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에도 갈 수 있다.”는 뜻이라고 풀어준다.

세상 논리라면 늙어서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느니라라고 나와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반대인 네가 젊어서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나 늙어서는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이끌려 가리라.” 한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고 남이 데려가는 자리로 가는 삶의 선구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었다는 것을 헨리 나우웬은 짚어 준다. ‘영적 삶은 점점 더 남에게 잘 이끌려 험지로 가는 삶이라는 말씀에 이어 예수의 십자가 삶, 베드로, 바울과 모든 제자에게 찾아온 고난의 삶을 펼쳐 보이면서 말이다.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라면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상처와 고통을 초월하기에 험지로 가는 삶은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부모가 아픈 자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아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녀의 곁에 남을 수 있는 힘을 얻듯이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물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참사랑 안에 있으면 우리의 시선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대상에게 머문다는 것이다. , 헨리 나우웬은 이 세상에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의 관심은 고난에 집중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고난을 이기는 위대한 힘은 그리스도의 사랑임을 설파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어떤 대단한 결심을 하고 한 알의 밀알의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를 따르다보니 두려움 없이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되었고, 예수의 길을 따라간 한 발 한 발이 모여 거대한 영적 발자취를 일궈낸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감사함으로 현재의 고통을 경축하는 일이다. 코로나19가 가져다주는 현실적인 난관에 시선을 집중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그 고통을 경축하는 일의 사례를 나는 어제 주일 예배에서도 들었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 이 지구상에서 잔혹하게 지속되어온 전쟁이 사라졌다고 한다. 인간의 덧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끔찍한 전쟁, 그렇게 끝내라고 빌어도 듣지 않고 전쟁을 일삼던 자들이 총성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고통을 경축하자니,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유명을 달리한 분들과 유가족을 생각하면 이런 말마저 언어도단이 될까 조심스럽다. 그러나 부활의 하나님, 죽음이 영생의 다른 이름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먼저 들어선 새로운 삶의 방식에 경축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조금 더 일찍 영혼의 집에 다다랐을 뿐이고 이 땅의 우리는 아직도 영혼의 집을 찾아가는 길 위에 있다.

헨리 나우웬은 영혼의 집을 찾아가는 도상에서 맞닥뜨리는 인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문제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북돋워 준다. 나에게 헨리 나우웬은 기쁨과 평화의 사도이다. 20200427.

 

 

 

-------------밑줄 긋기-----------------------

긍휼이란 주님만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과 함께 고난당하도록 초대받았다는 뜻이다. --105



십자가를 지는 삶도 나를 따르는 제자도의 일부니 네 십자가를 나와 연결하라. 네 모든 짐을 하나님의 길과 연결하라. --108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강권하여 고통을 십자가 앞으로 가져요ㅘ 치유받게 하신다. 이것이 기도 생활이다. --108




영적 삶은 점점 더 남에게 잘 이끌려 험지로 가는 삶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고 남이 데려가는 자리로 가는 삶이다. 예수님께 그곳은 십자가였다. 베드로에게도 십자가였다. 바울과 모든 제자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었다. 이는 성향이나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는 자학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머무는 삶이다. 철두철미하게 사랑 안에 있다 보니 원하지 않는 곳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사랑 안에 있으면 아무리 험한 곳으로 가도 고통이 사랑을 앞서지 못한다. 나는 고난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고난에 집중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114~116



당신이 말하는 모든 문제가 내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예수님을 따를 뿐이에요.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나 역시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발 한 발 주님의 사랑의 인도함을 받아 왔을 뿐입니다. -116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순전히 그분을 사랑해서 따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117쪽



참으로 사랑 안에 있으면 우리의 눈길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대상에게 머문다. --115



영적 삶은 점점 더 남에게 잘 이끌려 험지로 가는 삶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남이 데려가는 자리로 가는 삶이다. --115

기쁨이란 움직이지 않는 자리, 곧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꾸준한 운동이다. ……기쁨이란 정체된 곳에서 벗어나 생명을 향해 뛰어오르는 것이다. 기쁨은 늘 새로운 삶의 경험에 관한 것이다. --127



순종이란 온몸으로 듣는다는 것 ----134



"내 아버지는 결코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신다." 이것이 바로 기쁨의 닻이다. 기쁨의 닻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소통에 연결되어 있다.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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