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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로 하나 될 때까지
프랜시스 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6월
평점 :
예수로 하나 될 때까지 우리에게 잊혀진 그분의 꿈, 연합을 다시 열망하다
프랜시스 챈 저 | 두란노 | 2021년 06월 16일 | 원제 : Until Unity
코로나 시대,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기억하게 된 목자가 있다. 그의 설교가 참으로 맛깔스러워서 나는 자주 온라인 예배를 드리며 은혜 받았다. 그런데 몇 주 전부터 설교단에 보이지 않아 안식년이라도 가셨나? 했다. 그러던 지난주일, 온라인상에서 그의 스캔들 정보를 접했다. 한 목자의 당연한 일상이었던 교단, 목자의 권위를 세워 주었던 설교단이 한 순간에 석고대죄의 단이 되어 있었다. 나처럼 타 교회 교인이거나 해외의 성도들로부터도 존경의 댓글을 받던 목사님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다고 울먹이는 목소리에 불쌍하고 연약한 목자가 나는 금방 용서되었다.
문제는, 목사의 사임 건을 둘러싸고 교인들이 두 패로 갈린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 기회에 교회 분립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더 큰 연합을 전제로 분열이 아닌 분립으로, 성숙한 작은 교회로 살기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실천으로 작은 거인이 된 어떤 교회들처럼. 하지만 나는 아무 권리행사도 할 수 없는 제3자일이니 아름다운 화평이 이루어지길 오늘도 기도할 뿐이다.
더 안타까운 문제는, 자신은 티끌만한 죄도 없는 양 교회의 꼬투리를 잡지 못해 안달하던 이단들이 목자를 비방하며 기독교의 위상을 깎아내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소속과 실명을 가리고 점잖은 척 목자의 탈을 쓰고 나온 이단아! 하나님은 반드시 죄 없다고 소리치며 남을 헐뜯는 너의 죄부터 물을 것이다!
이단이 아니라도 이럴 때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우리는 참 하나 되기 힘든 인간군이라는 사실이다. 연합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는 끝이 없다. 이 땅에서 같은 하늘 아버지를 품은 자녀임에도 개혁과 보수로 갈라진 양날의 검은 너무나 깊은 상처가 되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관계가 되었고, 금수저 흙수저로 양분된 민심도 갈수록 갈등의 골이 깊다. 그래서『예수로 하나 될 때까지』와 같은 책이 필요하다. 예수를 중심에 두고 우리, 한 순간이라도 하나가 되려면…. 먼저 목차를 살피며 대강의 내용을 유추해 보자.
프롤로그. 어쩌다 우리는 하나 되려는 간절함을 잃었을까
Part 1. 예수로 하나 됨, 하면 좋지만 안 해도 그만인 옵션?
* 왜 교회는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가 *
Chapter 1. 온전한 연합, ‘삼위일체 하나님’이 처음부터 바라시던 것
: 인간을 향한 위대한 창조 설계
Chapter 2. 온전한 연합, ‘내 영혼’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
: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움직이던 초대 교회
Chapter 3. 온전한 연합, ‘죽어 가는 세상’을 되살리기 위한 것
: 복음 전도 사명의 기초
Part 2. 깊은 분열의 골마다 연합의 바람이 일다
* 성령이 묶어 주신 것을 지키는 싸움 *
Chapter 4. 뼈아픈 회개, ‘연합의 긴 여정’의 물꼬를 트다
: 내 안의 숨은 교만과 헛된 바람들
Chapter 5. 영성이 무르익을수록 ‘사랑의 연합’에 들어서다
: 영적 성숙의 가장 확실한 표지
Chapter 6. ‘절대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복음 안에서의 연합’이다
: ‘신학적 견해 차이’와 ‘피상적 사랑’의 문제
Chapter 7. ‘갈라진 틈에 서서’ 참된 화평을 위해 힘써 싸우라
: 싸울 영역 분별하기
Chapter 8. 눈앞의 실제 사람들과 ‘작은 연합’부터 추구하라
: 당장 대규모 연합을 바라는 몽상의 위험
에필로그.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충만한 삶이 기다린다
저자는 우리가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교회의 분열 요인으로 ‘서로 상충하는 욕심(약 4장),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낳는 질투심과 이기적 야망(약 3장), 미성숙한 믿음’을 꼽는다. 이들 요인을 포괄하는 가장 궁극적인 것은 미성숙한 믿음이다.
스캔들에 싸인 목사님은 ‘외로웠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잠시 이 세상에서 위로를 구했다고. 이 말을 두고 이단들은 예배드리는 목사가 ‘외로웠다?’며 대자보로 펼쳐들며 원색적으로 비방한다. 외로웠다는 고백이 죄가 될까? 인자도 머리 둘 곳 없다며 예수님도 외로워하셨는데. 많은 성도들에게 둘러싸인 대형교회 목사일수록 군중 속의 고독도 깊었을 것이다. 가까운 동료, 성도의 옷을 입은 인간의 질투와 야망과 탐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리더일수록 외로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담임목사의 빗나간 실수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들킨 죄인의 정직한 고백을 얄팍한 상술로 이용하고 기독교 신념이 아닌 이단 종교의 확장을 위해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이단아들의 행위에 맞장구 쳐 주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죄성 지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할 일이 저자의 일상 중에 놓여있다.
나는 40년 전에 배운 신학의 기본을 지금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따로 시간을 내 매일 홀로 성경을 읽는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나는 내 침례교 뿌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탐구하지 못한 주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나이를 먹을수록 무엇에든 100퍼센트 확신한다는 말을 삼가게 된다. 내가 확신하는 몇 가지 사실은 내가 뭐든 “부분적으로” 안다는 사실이다(고전 13:12). 그래서 늘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p.124-125
매일 하는 성경읽기와 묵상, 그리고 실천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이 책의 저자처럼 인간은 무엇이든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마치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나의 확신을 다른 이에게 확신시키려고 애썼던 적이 내게도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지금은 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해줄 것은 오로지 기도이다.
어찌된 일인지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설교자들이 말씀을 얼마나 잘 전하는지를 자랑한다.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보면 거의 교회나 예배 팀 밴드, 학교, 신학자, 책, 노래, 교단, 사역, 정치, 목사, 싱어들 등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그러다 결국 누구의 성경 해석이 가장 정확한지, 누가 가장 지혜롭고 똑똑한지, 누가 기름부음을 받았는지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다. 좋아하는 리더를 선택하면 다들 그를 예배하는 섬으로 들어간다. 그 순간, 다시 연합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리더나 신학에 관해서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모였으니까 말이다. 자기 리더의 강점과 다른 진영의 약점에 관해서 모두의 생각이 완벽히 일치한다.
그 섬에 머무르는 한 화합을 누릴 수 있다. 최소한 섬 안에서 누군가가 새로운 의견을 내놓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모아 다른 섬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그렇다.
--p.139-140
교인들이 둘 셋 모이면 어떤 목자의 설교에 대하여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나도 그렇다. 어느 목자의 설교에 대해 받은 은혜를 전하는 방식으로, 목자에 대한 우상화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수다를 떤다. 대부분은 우상화한 리더에 대한 의견과 감정이 일치함으로 유쾌함에 이르고, 화평을 누리면서.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평화려니 착각하며 우리를 둘러싼 관계망에 나름 충만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다. 사소한 일로, 어떤 오해와 마음의 배신을 통해 우리는 함께 만든 우상의 섬에서 쓸쓸하게 빠져나오는 경험, 누구나 한 번쯤 했을 것이다.
제자를 키우지 않아서 성숙해 가지 못하는 신자가 너무도 많다. 그들은 선생이 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우는 입장에 머물러 있다(히 5:12). 선생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을 때까지 자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준비를 하기 위해 수업을 받기는 한다. (이 책과 같은) 기독교 서적을 읽고 설교 영상을 열심히 찾아서 듣고 본다. 그것이 성숙의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그들은 참된 성숙의 길을 계속해서 걷지 않고 엉뚱한 길로 빠진다. 바로 지식 습득만을 추구하는 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식은 늘어나지만 겸손은 깊어지지 않는다. 지식으로 머릿속을 꽉 채우긴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비우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성령의 열매의 본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를 키우지 않는다. 그 결과, 자기 삶이 그리스도와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성경에 관해 많이 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성숙한 신자로 여긴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너무도 많다. 그들은 믿음의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 복음 전파에 삶을 걸지 않는다. -p.149-150
나도 제자를 키우기보다 배우는 데 더 깊은 관심과 열정이 있다. 제자를 키우려면 시간 내어 준비하고 관심과 사랑의 수고를 아낌없이 쏟아부어야하지만, 그래서 신경을 곱절로 써야하지만, 배우는 데는 나의 노력만 경주하면 되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챈 목사의 지적을 받으니 적절한 때에 선생 되기를 거부하는 것도 죄임을 알겠다.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하라, 는 온누리의 모토가 내 인생 모토이기에 나는 둘 중 하나만 하고 살아도 잘 사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복음을 들고 배움을 나누는 현장에도 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다.
신자임을 자처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연결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적으니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적을 수밖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계적이거나 아예 끊어져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하다. 사랑이 피상적이면 사소한 의견 차이 한 번으로도 서로 등을 돌리고 삿대질을 해 댈 수밖에 없다.-p.34.
세상에는 자기 인생의 깊은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이들이 숨겼던 심중을 드러낼 때,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타인의 가슴을 찌른다. 하나님을 경험했으나 때로 은혜가 사라져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기계적이 될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신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외로워할 때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주님은 너무나 소중해서 보이지 않는 사랑인데도 말이다.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 때 나는 교인들이 부담 없이 와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부담 없이 돌아갈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솔직히 교인들이 서로를 향한 사랑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내가 다니고 싶은 교회를 만들었다. 나는 많은 사람이 삶이 바쁘기도 하고, 친구도 워낙 많아 다른 교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과만 가까워지기 위해 교회에 온다고 생각했다. 내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다 보니 남들도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은 적중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 리더십들과 나는 우리 서로가 사랑한다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점점 죄책감이 찾아왔다. 물론 우리가 사랑이 없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몰려오는 것은 우리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매주 우리는 성도들에게 서로를,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부는 관심을 보였지만 대부분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다 내 탓이었다. 서로 적정한 거리에서 모이는 방식에 익숙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변화는 쉽지 않았다. 서로 관계를 맺도록 억지로 자리를 만드니 다들 부담스러워했고, 적지 않은 교인이 다른 교회로 떠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전까지 15년간 나는 오직 수적인 성장만 경험해 왔다. 나는 교인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출석 교인 숫자 증가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 함께했던 교인들이 속속 떠나갔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기였다.-p.155-156
목회자의 역할은 교인들을 하나 됨으로 이끄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논리로만 보면 “사람들은 연합 따위에 관심이 없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 됨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들을 알아볼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따라서 교회 리더십들은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리는 연합이라는 가장 좋은 길로 가야 한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부담스럽지 않은 환경을 원한다. 배운 대로 꼭 ‘행하지는’ 않아도 되는 환경을 원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제자 훈련을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두 가지 가장 큰 계명을 자주 잊어버린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둘째,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마 22:36-40). 제자 훈련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이런 계명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이 계명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이다.-p.162-163
작은 교회에 등록해 느꼈던 문제가 이렇게 세계적인 추세인줄은 몰랐다. 코로나로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지경이니 거리두기가 모두를 위한 건강 면에서는 맞지만, 단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거리 때문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프랜시스 챈 목사의 통찰을 통해 배운다. 성도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교회 카페에서 심방을 받는 일이 마땅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이다. 목자들은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에 붙잡아 두기 위하여 교인들의 편의를 봐주는 척하며 ‘부담스럽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니 저자 목사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교인과 목자, 둘 다 공범이다.
교회 안에서 오가는 동안 서로 낯은 익었지만, 그래서 친절한 양 인사는 하지만 까딱, 하는 인사, 거기까지인 관계! 신입교인을 위한 공간에서 온갖 친절한 모습으로 다과 서비스는 하지만 같은 구역에 산다는 정보에 미리 전화부터 차단해 놓는 모 권사의 모습에 씁쓸했던 적이 있다. 이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거리두기를 핑계로 이러한 관계는 더욱 정당한 모습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이마다 깨어있는 목자의 예리한 통찰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여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이웃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할 시점이다.
서로가 더 깊은 연민과 희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자.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시며, 각기 다른 일에 대한 열정을 주신다. …… 우리는 다 다르다.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어느 것 하나라도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모든 것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고 똑같이 참여할 수는 없을 뿐이다. 하나님과 달리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일이 우리와 가장 비슷한 사람들에게만 다가가기가 쉽다. 인생의 경험과 선택, 관심사가 우리와 가장 닮은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기가 쉽다. 성격이나 의견이 우리와 충돌하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기가 쉽다. 하지만 더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기치 아래 연합하는 공동체야말로 진정 아름답고 강력하다. 그런 공동체는 우리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차이보다 우리의 왕을 향한 공동의 사랑과 충성을 훨씬 더 중시한다는 점을 온 세상에 보여 준다. 말 그대로 천국을 보여 준다. 누구라도 자신의 교만 때문에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p.220-221
대개 같은 성향,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성향은 세대를 불문하고 보이는 뚜렷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다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도 공동체를 이루어 천국을 맛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님의 연합을 실천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연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어디서도 의미 있는 연합을 이룰 수 없다. (p.231)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 ‘말’에서 출발한다고 저자는 일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말’을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대화 속의 모든 문장을 사랑으로 함으로써 더 큰 연합을 이끌어내야 한다. 당신이 가장 최근에 나눈 대화를 돌아보라. 사랑과 연합을 이루는 표현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p.231)
연합을 위한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사랑을 담은 말 한 마디! 그런데 말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으니 바로 각자의 삶이다.
교회 안에 더 큰 연합이 나타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작은 데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부터 정돈하라.(p.229)
나의 삶을 정갈하게 정돈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사랑을 담은 말이라도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일침. 한 순간의 실수라도 삶이 뒷받침되지 않아 대중에게 전한 메시지가 그 힘을 상실하게 된 경우를 이번에도 보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가족 관계, 교우 관계 등등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것은 없다. 나는 나의 삶을 돌아보며 그저 지금‘사랑하는 것처럼’노력할 뿐이다.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이자 명령이며 제자 된 자들이 이 세상에 대하여 예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큰 증거이기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의 사명’이라는 말에 밑줄 긋는다.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연약한 지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 2021.7.15.
교회 안에 더 큰 연합이 나타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작은 데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부터 정돈하라.(p.229)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연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어디서도 의미 있는 연합을 이룰 수 없다. (p.231)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 ‘말’에서 출발한다고 저자는 일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말’을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대화 속의 모든 문장을 사랑으로 함으로써 더 큰 연합을 이끌어내야 한다. 당신이 가장 최근에 나눈 대화를 돌아보라. 사랑과 연합을 이루는 표현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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