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사이 - 당신의 신앙을 보고 읽고 즐기는 것에 연결하라
대니얼 스트레인지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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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문화 사이 : 당신의 신앙을 보고 읽고 즐기는 것에 연결하라

대니얼 스트레인지 저/정성묵 역 | 두란노 | 20200318

 

 

주일학교 초등부 교사로 봉사하던 몇 년 전 일이다. 신임 전도사님이 오셔서 당시 유행하던 좀비 영화관람에 대하여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안 봐야 하는 영화라고 단정 짓는 말에 마음으로 실망을 느낀 적이 있다. 세상 문화를 무조건 나쁘다고 외면만 하는 것은 오히려 복음 전할 기회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복음 전파를 하려면 세상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또한 발달 단계에서 오는 호기심을 애써 짓누르며 고지식한 아이로 자라는 것보다 세상 문화를 한두 번 쯤 경험하는 활동을 통해 우상숭배 문화를 스스로 멀리할 수 있는 아이가 되도록 키우는 것이 더욱 건강한 일로 여겨진다.

지금이나 그때나 좀비 영화를 아이가 보기 원한다면 나는 봐야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 볼 때 부모가 동행하면 좋겠고, 관람 후 자녀와 함께 감상을 나누는 일이 필수라는 전제 조건만 지켜진다면 말이다. 부모가 동행할 수 없더라도 영화 리뷰나 자료를 참고하여 관람 후 지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만큼, 관람 후 리더의 지도는 필수로 따라야 할 전제 조건이다.

아이들이 세상 문화를 접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각종 미디어 홍수 속에서 저희들끼리 아는 것을 공유하며 친구가 되고 관계를 맺어가는 21세기 아이들이 크리스천이라는 명분으로 시대 조류를 모른 체만 한다면 일단은 무리에서 따를 당하고 맹신도로 취급당할 것이 염려되어서다.

그러므로 원한다면 좀비 영화를 보되, 보고나서 그것이 기독교 시각과 어떻게 다르며, 세상 문화의 폐해를 막는 기독교 세계관이 왜 중요한지를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세상 문화와 양육에 대한 나의 지론이다.

문화, 종교, 공공신학 교수인 대니얼 스트레인지 (Daniel Strange)<복음과 문화 사이>에 눈길이 간 것은 이러한 내 나름의 이러한 주장이 맞는 것인지를 새삼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복음과 문화 사이를 잇는 것이야말로 복음 전파의 첫걸음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복음과 문화 사이>를 누비며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법을 찾아나서 보았다.

세 개의 파트로 나누어진 이 책은 먼저 첫 파트에서 문화에 예수의 복음이 필요한 이유, 문화의 중요성, 죄로 얼룩진 문화의 추락, 문화 속에 숨은 거짓 우상, 문화의 시금석으로 추앙받는 영화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두 번째 파트는 복음으로 문화에 접속하는 방법으로써, 1세기 바울의 문화를 소개하고, 세상 문화를 해체시키고 십자가 소망을 심는 방법을 제시한다.

세 번째 파트는, 크리스천이라면 문화 크리에이터로서 예수 복음으로 세상을 리뷰하라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내가 질문하고 싶은 <좀비 영화>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죽은 자가 산 자를 잡아먹는 세상에 생명을 불어 넣으라는 소제목과 함께 편성되어 있다. 마치 나를 위한 책 같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컬러링북에 대한 제목도 있다. 컬러링북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하는 세대들을 향한 일침으로 저자는 하나님이 빠진 동산에 에덴동산의 평안을 보이라고 한다. 들새를 통해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엿보게 하고, 기술과 안전에 대한 집착을 영원한 복음으로 대체시키라는 충고도 들어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 마음속의 뿌리와 세계관의 산물로 존재하는 문화에 대한 이해와 복음 문화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복음으로 문화에 접속하는 방법과 문화 크리에이터들에게 복음 문화의 세밀한 성경적 렌즈를 제시하고 있다.

문화란 우리가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방식이다. 그리고 문화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참되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을 삶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37)

내가 찾는 <좀비 영화> 관람에 대한 견해는 <챕터4 문화의 시금석 : 이런 영화는 봐도 되나요?> 에 있다. 마치 마주보며 대화하듯 저자는 혹시 이번 장을 기다렸는가? 책장을 획획 넘기다가 이번 장에서야 비로소 정독하기 시작했는가? 사실, 이번 장을 쓰기를 계속해서 미루었다.”고 말한다. 문화 창출과 참여에 대한 논쟁은 과연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고 인류의 수만큼이나 많은 논쟁이었다.

저자는 곧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요약해 상황에 따라서라고 말해준다.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방송 시청을 예로 들면서 상황에 따라서판단하고 선택하라는 답은 정말 명답이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문제의 신학적 쟁점은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의 문제이며, 방종이나 율법주의를 초월해야하는 미묘한 균형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답변 역시 마음에 쏙 든다.

결국 이 문제의 답은, 제사 음식을 두고 이것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논쟁하던 제자들이 들은 답과도 같다. 문화 창조와 문화 참여가 개인 영적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스스로를 이끌어갈 자신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보든 무엇을 먹든 그것은 각자에게 맞는 각자의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타인의 방식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 섹스, 권력처럼 이미 그 위험성이 만방에 드러난 해로운 문화들을 조심하고 탈피하면서 인간 삶과 번영에 대한 성경적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백신 기술과 안전에 대한 집착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는 때, 이 책은 자신을 위한 자가 격리의 방에서 깊이 읽으며 기도했으면 좋겠다. 오랜 사회적 격리로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위로 한답시고 세상은 또 어떤 우상 문화로 세상 사람들의 갈망에 다가서려할 지 알 수 없기에. 문화 속에 우상숭배를 담는 한, 이 땅을 향한 재앙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적 문화, 어떠한 고난이 와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복음의 문화이다.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 참여 방법에 대한 성경적 제안을 실천하는 것은 곧 우리가 현재 당면한 문제의 답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는 것을 오늘도 스스로를 격리시킨 골방에서 무릎 꿇어 회개하며 기도하는 크리스천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성경적 문화 창출의 필요성과 성경적 문화의 정의로 최종 요약해 볼 수 있다. 성경적 문화 창출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분별력을 발휘하고 인간 삶과 문화의 번영에 대한 성경의 청사진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지 않으면 남들이 그릇된 청사진을 내놓을 것’(105)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문화를 창출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 나아가 그분의 위대함을 뽐내는 일‘(59) 이 되어야 한다. * 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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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우리가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방식이다. 심지어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들도 계속해서 의미를 찾는다, 문화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참되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ㄴ는지-을 삶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37

좋든 싫든 문화 참여는 피할 수 없다. 인간이 문화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매일 문화를 소비하고 창출한다. 문화를 떠나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는 문화에 ‘속해’ 있다. 문화는 우리 존재의 뗄 수 없는 일부다. --39 자의든 타이든---> 자의든 타의든


우상은 "내가 우상이다"라고 떠들면서 다가오지 않는다.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43

이성을 우리의 최종적인 심판관 혹은 권위로 삼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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