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훔볼트가 넘어서기 위한 다섯 가지 조건 85p
1. 훔볼트는 다양한 교육을 섭렵했다.
- 청년 훔볼트는 독일 학문의 요람인 괴팅겐대학,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소통 공간인 예나대학, 해양 무역의 거점 도시 함부르크의 상업 아카데미, 광물학과 지질학을 비롯한 자연사에 관한 유럽 최고의 프라이베르크 광업학교에서 미래를 위한 기초를 다졌다.
- 훔볼트가 살았던 시기 독일의 대학은 '유체형' 시스템이었다. 한 대학에서만 공부하지 않고 다른 지역의 대학으로 이동하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한 대학에서만 공부해야 하는 '고체형' 시스템이다. 이런 교육체계에서는 다양한 학문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융합적 사유를 함양할 틈조차 없다.
- 청년 훔볼트가 환생해서 한국의 대학을 다닌다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한국에 근대적 대학체계가 시작된 이후로 교수도 학생도 고체형 생활문법에 철저히 길들여져 왔다. 이런 지식 공간에서 훔볼트와 같은 유목적인 융합형 인물을 배출할 수 있을까?
2. 다양한 국가와 사람들에 대해 경험할 수 있었다.
- 청년 훔볼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당대 최고의 열대 탐험가와 학자를 만났고 열대에 관한 예술 작품도 눈여겨 감상했다. 그리고 30대 초반에 약 5년에 걸쳐 아메리카를 누비고 다니면서 약 6만여 종에 달하는 자연사 자료를 수집했다.
3. 열대 탐험을 했다.
- 한국의 대학 사회는 서구적 근대의 열매를 수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열대 탐험이 어떻게 씨앗에서 성장해서 근대적 학문과 예술의 열매로 나아갔는지, 그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과정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
4. 학문적 융합을 했다.
- 윌리엄 휴얼은 영미문화권에서 1833년에 처음으로 '융합'(consilie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당시 유럽의 열대 탐험에 주목하면서 융합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융합은 열대 자연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반증한다.
- 훔볼트는 한평생 생물지리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사물을 융합적인 지평에서 탐구해 왔다. 융합은 열대 자연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생물지리적 공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 한국에서 융합을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열대 탐험이 융합적 지식과 실천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5. 다양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 훔볼트에게 독일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명제를 떠올려 보자. 30년간 독일어로 살았던 그가 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어로 탐험을 했고, 파리에서 22년간 프랑스어로 저술 활동을 했다. 또한 미국을 포함해서 서구의 수많은 정치인, 사상가, 학자, 외교관, 무역가, 문학가, 예술가들과 1년에 무려 3천 통이 넘을 정도로 서신 교류를 했다. 이런 훔볼트에게 어떻게 독일이라는 근대 민족국가의 표식을 붙일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것이 꽤 많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괴테
- 괴테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평생 수집했던 광물 표본이 5만 종이나 되었다.
- 철학자 니체가 독을 최고의 양서라고 높이 평가했던 '괴테와의 대화'(1836-1848)에서, 괴테는 두 가지 점에서 광물학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하나는 광물학은 이익을 실제로 가져다주며, 다른 하나는 태고 세계의 형성에 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 그는 어릴 적부터 자연사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다. 지금은 퇴화되어 버린 간악골이 사람의 신체에 원래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도 괴테다. 125p
-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괴테는 식물의 자연사에 관한 '식물의 변태'(1790)를 출간했다. 식물의 형태가 떡잎에서 줄기, 잎을 거쳐서, 가지에 붙어 있는 꽃의 배열 상태를 뜻하는 화서와 꽃받침, 마지막으로 꽃부리인 화관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117p
2. 나폴레옹
- 나폴레옹이 1798년에 '이집트학사원'(Institut Egyptien)을 설립하면서, 167명의 관련 전문가들이 여기서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나폴레옹은 이 학사원의 첫 모임에서 여섯 가지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빵을 완벽하게 구워 낼 수 있는가?
맥주를 제조하는 데 호프를 대신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나일 강물을 정화시킬 수 있을까?
카이로에 물레방아를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풍차를 만들어야 할까?
이 지역에서 나는 재료들을 가지고 화약을 제조할 수 있을까?
이집트의 사법 제도와 교육을 위해 어떤 개혁이 필요할까?
이 중에서 마지막 한 가지를 제외하면 모둔 자연사에 근거한, 기술과학적인 질문이다.
나폴레옹은 군사력만으로 이집트를 정복하지 않았다. 118p
황열은 미국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포기하면서, 미국은 1천 5백만 달러에 이 광활하고 풍요로운 영토를 낚아채었다.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아메리카의 역사적 경로는 혁명적으로 바뀌어 버렸다. 다시 말해서, 황열은 열대 아메리카의 자연사를 혁명적으로 전환시켰다. 194p
에스파냐 천연두의 아즈텍 침략
에스파냐의 하층 계급 출신인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1547)가 달랑 수백 명의 부대를 이끌고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na)를 침략하러 왔을 때, 어느 누구도 그의 부대가 수만 명의 아즈텍 군대를 이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천연두에 이미 면역된 군인과 그렇지 않은 군인 사이의 열대 전쟁. 양쪽 당사자들은 이를 전혀 몰랐다. 아니,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역사는 천연두라는 전염병의 창궐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139p
천연두를 비롯해 구세계의 미생물들이 신세계에 유입됨으로 해서, 인구가 얼마나 급격하게 감소되었는지 알아보자.
멕시코 영토 내의 토착 원주민은 1518년에 2,520만 명이었는데, 코르테스의 정복 전쟁이 끝난 후인 1532년에는 1,690만 명, 1548년에는 740만 명, 1568년에는 260만 명, 1608년에는 고작 100만 명 정도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서구의 미생물이 아즈텍 문명에 작용한 지 60년 만에 원주민 인구의 95%가 사라졌다.
유럽의 세균이 아메리카 인구의 90% 이상을 쓸어버리는 데는 한 세기가 걸렸지만, 그 인구가 정복 이전으로 다시 회복되는 데는 무려 4세기가 걸렸다. 140p
자연사의 복합적 층위
이에 대해서는 13p, 188p에 걸쳐 두 번에 나온다.
이 중 188p에 나오는 '자연사의 융합적 층위'는 필자가 10여 년에 걸쳐 열대와 서구를 직접 탐사하고 공부하면서 추가적으로 포함한 것인데, 생태학, 해양학, 민속 의약학 등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188p~189p)의 내용을 읽어보면 그 이유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