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볼트 세계사 : 自然史 혁명
이종찬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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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만큼 학문의 융합적 성격을 갖춘 인물은 아직 본 적이 없다. - 괴테

이 말은 1장의 시작에 쓰여 있는 글이다. 나는 책을 읽기 전까지 '훔볼트'가 누구인지 몰랐다. 이 책이 그냥 흔히 알고 있는 세계사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펼치면서 다른 세계사 책과는 뭔가 다른 것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타 세계사 책에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느낌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감사의 글을 읽으며, 분명 뭔가 다른 것이 들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감사의 글의 첫 시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책 머리에 : 왜? 훔볼트 세계사인가'를 읽으면 알 수 있듯이, 《훔볼트 세계사》는 그의 탄생 250주년을 단순히 기념하기 위해 쓴 평전이 결코 아니다.

왠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사의 글에 들어 있는 수많은 석학들의 이름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책 머리에 들어있는 《코스모스》라는 단어, 그리고 그의 말년에 남긴 대작이라는 설명, 《코스모스》는 칼 세이건이 쓴 책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훔볼트세계사》를 읽기 시작했다.

1장을 읽기도 전에 이미 충분한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1장 한국에서 훔볼트는 어떻게 환생하는가

훔볼트는 1769년에 태어나 1859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49p

훔볼트는 스무 살이나 많은 괴테와 실러, 부유한 은행가 가문의 작곡가 멘델스존, 영국의 왕립학회 회장과 동인도회사의 총재와 규식물원 원장을 맡았던 조셉 뱅크스, 프랑스 자연사 분야에서 권위자로 군림했던 조르주 퀴비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유럽 최고의 인물들과 자유로이 교류했다. 훔볼트의 열대 아메리카 탐험이 파리와 베를린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유럽의 저명한 인물들과의 광범위한 소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50p


책 속에서

훔볼트가 넘어서기 위한 다섯 가지 조건 85p

1. 훔볼트는 다양한 교육을 섭렵했다.

- 청년 훔볼트는 독일 학문의 요람인 괴팅겐대학,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소통 공간인 예나대학, 해양 무역의 거점 도시 함부르크의 상업 아카데미, 광물학과 지질학을 비롯한 자연사에 관한 유럽 최고의 프라이베르크 광업학교에서 미래를 위한 기초를 다졌다.

- 훔볼트가 살았던 시기 독일의 대학은 '유체형' 시스템이었다. 한 대학에서만 공부하지 않고 다른 지역의 대학으로 이동하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한 대학에서만 공부해야 하는 '고체형' 시스템이다. 이런 교육체계에서는 다양한 학문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융합적 사유를 함양할 틈조차 없다.

- 청년 훔볼트가 환생해서 한국의 대학을 다닌다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한국에 근대적 대학체계가 시작된 이후로 교수도 학생도 고체형 생활문법에 철저히 길들여져 왔다. 이런 지식 공간에서 훔볼트와 같은 유목적인 융합형 인물을 배출할 수 있을까?

2. 다양한 국가와 사람들에 대해 경험할 수 있었다.

- 청년 훔볼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당대 최고의 열대 탐험가와 학자를 만났고 열대에 관한 예술 작품도 눈여겨 감상했다. 그리고 30대 초반에 약 5년에 걸쳐 아메리카를 누비고 다니면서 약 6만여 종에 달하는 자연사 자료를 수집했다.

3. 열대 탐험을 했다.

- 한국의 대학 사회는 서구적 근대의 열매를 수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열대 탐험이 어떻게 씨앗에서 성장해서 근대적 학문과 예술의 열매로 나아갔는지, 그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과정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

4. 학문적 융합을 했다.

- 윌리엄 휴얼은 영미문화권에서 1833년에 처음으로 '융합'(consilie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당시 유럽의 열대 탐험에 주목하면서 융합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융합은 열대 자연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반증한다.

- 훔볼트는 한평생 생물지리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사물을 융합적인 지평에서 탐구해 왔다. 융합은 열대 자연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생물지리적 공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 한국에서 융합을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열대 탐험이 융합적 지식과 실천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5. 다양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 훔볼트에게 독일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명제를 떠올려 보자. 30년간 독일어로 살았던 그가 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어로 탐험을 했고, 파리에서 22년간 프랑스어로 저술 활동을 했다. 또한 미국을 포함해서 서구의 수많은 정치인, 사상가, 학자, 외교관, 무역가, 문학가, 예술가들과 1년에 무려 3천 통이 넘을 정도로 서신 교류를 했다. 이런 훔볼트에게 어떻게 독일이라는 근대 민족국가의 표식을 붙일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것이 꽤 많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괴테

- 괴테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평생 수집했던 광물 표본이 5만 종이나 되었다.

- 철학자 니체가 독을 최고의 양서라고 높이 평가했던 '괴테와의 대화'(1836-1848)에서, 괴테는 두 가지 점에서 광물학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하나는 광물학은 이익을 실제로 가져다주며, 다른 하나는 태고 세계의 형성에 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 그는 어릴 적부터 자연사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다. 지금은 퇴화되어 버린 간악골이 사람의 신체에 원래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도 괴테다. 125p

-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괴테는 식물의 자연사에 관한 '식물의 변태'(1790)를 출간했다. 식물의 형태가 떡잎에서 줄기, 잎을 거쳐서, 가지에 붙어 있는 꽃의 배열 상태를 뜻하는 화서와 꽃받침, 마지막으로 꽃부리인 화관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117p

2. 나폴레옹

- 나폴레옹이 1798년에 '이집트학사원'(Institut Egyptien)을 설립하면서, 167명의 관련 전문가들이 여기서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나폴레옹은 이 학사원의 첫 모임에서 여섯 가지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빵을 완벽하게 구워 낼 수 있는가?

맥주를 제조하는 데 호프를 대신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나일 강물을 정화시킬 수 있을까?

카이로에 물레방아를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풍차를 만들어야 할까?

이 지역에서 나는 재료들을 가지고 화약을 제조할 수 있을까?

이집트의 사법 제도와 교육을 위해 어떤 개혁이 필요할까?

이 중에서 마지막 한 가지를 제외하면 모둔 자연사에 근거한, 기술과학적인 질문이다.

나폴레옹은 군사력만으로 이집트를 정복하지 않았다. 118p

황열은 미국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포기하면서, 미국은 1천 5백만 달러에 이 광활하고 풍요로운 영토를 낚아채었다.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아메리카의 역사적 경로는 혁명적으로 바뀌어 버렸다. 다시 말해서, 황열은 열대 아메리카의 자연사를 혁명적으로 전환시켰다. 194p

에스파냐 천연두의 아즈텍 침략

에스파냐의 하층 계급 출신인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1547)가 달랑 수백 명의 부대를 이끌고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na)를 침략하러 왔을 때, 어느 누구도 그의 부대가 수만 명의 아즈텍 군대를 이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천연두에 이미 면역된 군인과 그렇지 않은 군인 사이의 열대 전쟁. 양쪽 당사자들은 이를 전혀 몰랐다. 아니,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역사는 천연두라는 전염병의 창궐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139p

천연두를 비롯해 구세계의 미생물들이 신세계에 유입됨으로 해서, 인구가 얼마나 급격하게 감소되었는지 알아보자.

멕시코 영토 내의 토착 원주민은 1518년에 2,520만 명이었는데, 코르테스의 정복 전쟁이 끝난 후인 1532년에는 1,690만 명, 1548년에는 740만 명, 1568년에는 260만 명, 1608년에는 고작 100만 명 정도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서구의 미생물이 아즈텍 문명에 작용한 지 60년 만에 원주민 인구의 95%가 사라졌다.

유럽의 세균이 아메리카 인구의 90% 이상을 쓸어버리는 데는 한 세기가 걸렸지만, 그 인구가 정복 이전으로 다시 회복되는 데는 무려 4세기가 걸렸다. 140p

자연사의 복합적 층위

이에 대해서는 13p, 188p에 걸쳐 두 번에 나온다.

이 중 188p에 나오는 '자연사의 융합적 층위'는 필자가 10여 년에 걸쳐 열대와 서구를 직접 탐사하고 공부하면서 추가적으로 포함한 것인데, 생태학, 해양학, 민속 의약학 등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188p~189p)의 내용을 읽어보면 그 이유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만하다.

 


열대의 다양성

열대에 대한 훔볼트의 관점은 명료하다. 열대에 접근하면 할수록, 식물의 구조가 더욱 다양해지며, 형태가 더욱 우아해지고, 여러 유형의 색깔이 더욱 많아지며, 생명력을 더욱 오랫동안 지속하게 된다. 유럽과 같은 온대 지역에서 한평생 살거나, 식물지리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열대 식생의 이런 특성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훔볼트는 '식물지리학: 열대 자연도'에서 풍경화야말로 열대 자연사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런 무지를 보완할 수 있는 탁월한 예술이라고 말했다. 258p


이 책은?

어렵다. 그리고 세계사 책은 아니다. 세계사 이야기를 생각하고 이 책을 펼쳤다면 끝까지 세계사에 대한 내용을 찾지 못하고 책을 덮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런 기대를 하고 책을 읽으려고 한다면 다른 책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책은 훔볼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책이다. 나도 그렇지만 훔볼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그는 다윈에 비교될 사람이라고 얘기되며, 그가 교류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에 의해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책에 나오는 몇 사람의 이름들(괴테, 가우스, 멘델스존, 볼타)의 이름만 보아도, 우리는 훔볼트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자연사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상이 그렇듯, 광물학과 자연에 대한 많은 얘기들이 나온다. 우리는 역사라는 것을 말할 때, 개별적 사건들만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역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간 이야기이지만 모든 사람은 자연의 바탕 위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자연계의 현상과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를 얘기할 때는 반드시 자연에 대한 얘기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이전의 역사와 그 후의 역사를 엮어서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훔볼트의 연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많은 자연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 번에 같이 연구한 사람, 그리고 다양한 언어를 통해서 그 문화를 들여다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훔볼트를 넘어서기 위한 다섯가지 조건'에도 써놓은 것처럼 이런 다양한 사항들을 융합적으로 연구하여 결론을 내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훔볼트는 그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훔볼트라는 사람에 대해 아주 작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280여 페이지인 이 책을 통해 훔볼트를 조금 들여다봤지만, 아직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 사람의 이야기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정도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종찬'도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책을 쓰면서도 약 300페이지 만으로는 훔볼트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상당히 어려운 책이다. 쉽게 읽을 수 있지는 않지만, 그만큼 흥미로운 책이다. 그리고 충분히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책이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 훔볼트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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