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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깨알 재미
손유미(요우메이) 지음 / 파랑새 / 2025년 10월
평점 :
요즘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문자를 읽기보다 영상을 통해 여가를 즐기고 정보를 얻는 일이 더 흔해졌다. 쉽고 재미있는 영상이 넘쳐나다 보니 점점 글을 읽고 해석하는 일을 멀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어휘력도 떨어져 독서가 어렵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한국어 어휘에서 한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에 이를 정도로 절대적이지만, 한자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고려하면 앞으로 어휘력이 자연스럽게 향상되기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사실 한국어의 상당수 단어는 한자에서 비롯되었거나 그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한자를 이해하면 단어의 뜻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어휘를 유추하고 확장하는 능력까지 생긴다.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단어가 많은 한국어에서, 한자는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한자어는 고유어보다 추상적이고 전문적인 개념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기 때문에, 전문 분야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즉, 어휘력을 높이기 위한 한자 학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한자는 어휘의 뿌리를 형성하고, 한국어가 지닌 다층적이고 전문적 의미를 이해하게 해주는 가장 효율적인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중요성을 알면서도 한자와 뜻만을 암기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면 흥미를 잃기 쉽다. 한자의 재미를 느끼면서 어휘력을 넓힐 방법은 없을까? 이런 고민을 가진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다. 바로 이번 주 독서 모임에서 읽은 손유미 작가님의 <한자의 깨알 재미>다.
이 책의 저자 손유미(깨미) 작가님은 우리 독서 모임 <새온독>의 멤버이기도 하다. 인연은 약 4년 전, 블로그 활동을 활발히 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로의 글에 댓글을 남기며 교류를 이어오다가 얼굴도 모른 채 글로 통하는 느낌이 좋아 <새온독> 신년 특강을 부탁드렸고, 그 특강을 계기로 작가님도 모임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끈끈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깨미 작가님은 책과 동일한 제목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몇 년 전부터 집필을 시작했고, 이번 달 마침내 책을 출간했다. 최근에는 개그맨 정형돈 님의 유튜브 채널에도 출연하고, 어휘 관련 온라인 강의까지 진행하며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온라인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작은 노를 저으며 출발했던 분이 이제는 엔진이 달린 배를 운항하는 든든한 선장님이 되셨다.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단어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심코 쓰던 욕이나 비속어도 한자로 풀어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만난다. ‘밥보’에서 유래한 ‘바보’, 장티푸스에서 나온 ‘염병’, 범의 아가리라는 뜻에서 나온 ‘호구’처럼 어원 자체가 흥미로운 단어들이 가득하다.
역사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단어들도 있었다. 오늘날 부정적으로 쓰이는 ‘진상(進上)’은 본래 지방의 특산물이나 진귀한 물품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뜻이었다. 조선 시대 공납의 한 형태였으나 탐관오리들이 이를 악용해 백성을 수탈하면서 지금의 의미로 변하게 된 것이다. 진상 물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찍은 ‘퇴(退)’자 도장에서 유래한 ‘퇴짜 맞다’라는 표현도 흥미로운 사례다. ‘도무지’라는 부사도 원래는 얼굴에 바르던 종이를 뜻하는 ‘도모지(塗貌紙)’에서 비롯된 말로, 천주교 박해 시절 형벌에 사용되었다는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단어의 유래를 하나씩 들여다보면, 그냥 만들어진 말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삶과 생각이 담긴 단어는 시대에 따라 의미가 변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삶을 비추는 도구이다. 이렇게 어원을 알게 된 단어들은 조금 더 신중하게 사용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쓰는 말이 곧 나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앞으론 더욱 아껴서,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해야겠다.
이렇게 이 책은 단어의 기원과 변화를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어휘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 단어를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만들어지고 변화해 온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어휘는 훨씬 깊고 단단하게 자리 잡는다. <한자의 깨알 재미>는 한자 학습의 문턱을 낮추면서도 어휘력을 실질적으로 넓혀주는 길잡이 같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단어의 세계를 탐구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