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만드는 일 - 윌리엄 모리스 산문선
윌리엄 모리스 지음, 정소영 옮김 / 온다프레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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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에게 예술을 許하라!!

평범함 일상 생활에서 소박한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했던 월리엄 모리스에게 현대는 난해하고 즐거움이 없는 세상으로 비춰진다. 소박함과 정직함은 사라지고 사치와 낭비로 가득찬 세계에서 소비는 미덕이 되고 절제와 검소는 성장을 저해하는 악이 되었다. 거세지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점점 더 비루해지고, 예술은 현실과 유리된 채로 허공을 떠다닌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면서 노동의 신성함은 더이상 의미를 잃어버리고, 노동에서 즐거움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노동에서 즐거움이 사라진 현실을 목도하면서 저자는 예술 또한 같이 사라졌다고 본다. 인간이 노동하며 느끼는 즐거움의 표현이, 바로 예술인데, 작금의 현실에서 노동은 더이상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이 되지 못한다.

저자는 노동에서 즐거움을 복원하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 즉 예술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손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 내는 작업은 흡사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것과 같다. 어떠한 작은 것이라도 하나의 완성품을 구현하는 일은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공업자들, 즉 장인이 만들어내는 생산품은 ˝예술과 노동의 합치˝를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하지만 노동의 분업화는 이런 완성품에 대한 실감을 앗아가고 창조에 대한 즐거움도 빼앗아 간다. 저자가 중세 시대 수공업자들을 떠올리면서 다시 예전의 것들, 즉 ‘고대/자연/수공업‘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손에 대한 실감을 되찾아 일의 즐거움, 그리고 예술을 다시 복원하자는 데 있다.

그에게 예술은 소박하고 정직하고 정의로운 것이다. 예술의 소박함은 단순하되 장식이 없는 실용적인 의미이다. 허영이 아닌 필요에 의한, 소박하고 단순한 것 , 바로 그런 정신을 구현한 것이 고딕예술이라 그는 생각한다. 사치와 낭비가 넘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낭비없는 소박한 생산품은 노동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일이고, 삶에서 정의로움을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가 칭송하는 고딕예술이 발하던 중세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위해 인간을 소외시키던 시대이기도 하다. 당초의 출발과는 달리 고딕 장르는 점점 신에게 다다르고자 하던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한 형태로 변질되었다. 저자가 이상적으로 그리던 중세는 왕과 귀족들에 의해 민중의 목숨이 좌지우지 당했던 시대이기도, 여성과 아이들, 노예들의 삶이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리스가 중세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점점 비천해지고 있는 현대 노동에 대한 안타까움이였다. 최소한의 휴식도 없이, 내일을 저당 잡힌채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작금의 현실에서, 이 문명이 노동자를 얼마나 메마르고 애처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에 모리스는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어쩔 수 없이 견디는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을 어떻게 구체화할지 알지 못하는 현실이 모리스는 안타까울 뿐이다. 비천한 노동에서 예술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그것이 밥이 되느냐 비아냥거리는 이들에게 그는 예술이야말로 그들 앞에 합리적이고 충만한 삶에 진정한 이상을 세워주는 것이라 당당히 주장한다. 그는 예술의 감상과 창조, 곧 진정한 기쁨의 향유가 매일의 양식만큼이나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삶, 그냥 싫어서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어느 집단도 예술을 박탈당하지 않는 그런 삶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줘야 말한다. 그것이 현대 노동이 잃어버린 것들이라고.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모리스가 꿈꾸는 사회는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사회, 즉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살고, 낭비 없이 만사를 꾸려가고, 어느 누구에게 해가 되면 곧 모두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의식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노동은 누구라도 원하는 노동이 되어야 한다. 일하는 동안,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곧 가질 수 있다는 실감, 우리가 그 휴식을 누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 만큼 휴식이 보장되는 삶 말이다. 예술은 그런 노동이 가능한 사회에서 건강하게 탄생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 하나,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게 되는, 그래서 모두가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을 하는 세상, 그것이 모리스가 꿈꾸는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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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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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들을 그 높다란 산으로 이끄는가?

여기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이들은 살았던 시대도, 공간도,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다르다. 공통점이라고는 없찾아볼 수 없는 이 남자들은 모두 사랑하는 누군가의 잃은 상실감에 시달린다. 토마스와 피터는 물론 에우제비우를 찾아왔던 노부인 모두 가족을 잃었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상실감은 그것이 자연사이든 사고사이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토마스는 그 상실감과 슬픔을 잊고자 뒤로 걷기 시작했고, 노부인은 자신을 남편의 시신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고, 피터는 모든 걸 버리고 침팬지와 동거를 시작한다.

​소설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주인공들을 통해 삶과 죽음, 선과 악, 인간과 동물 그리고 문학이 갖는 이야기의 힘을 그리고 있다. 1부에서 토마스는 집을 잃고, 2부에서 노부인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3부에서 피터는 침팬지와 자신이 일체되는 둘만의 새로운 집을 완성하려 한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진행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점점 포르투갈의 어느 높은 산으로 향하게 된다.

이들이 떠나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실체 있는 장소가 아니다. 피터가 도달하고자 했던 그 영험한 산은, 사실 높지 않은 언덕에 불과한 보잘것 없는 산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곳은 실제하게 떄문에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무언가를 믿고자 하는 믿음으로 도달하게 된, 실의에 빠진 그들에게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들은 산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때로 뜻하지 않는 악을 저지르게 되고,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소설은 끊임없이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를 반문한다. ˝우리는 멋대로인 동물이다. 그게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 더 나은 무엇이 아니다˝라면서 인간 역시 부조리하고 모순된, 그야말로 멋대로인 동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진화한 유인원에 불과한 인간은 늘 반복되는 잘못을 끊임없이 저지를 수밖에 없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한 게 아니라 애시당초 구분하기 하기 힘든 범주이기에 우리는 늘 익명에 숨어버리는 악에 쉽게 굴복하며 스스로 인간임을 내팽겨쳐 버린다는 과오를 저지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거짓에 불과했지만 이 세 사람을 그곳으로 이끌게 만든 건, 바로 이야기의, 문학의 힘일 것이다. 에우제비우와 아내가 나누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허구의 힘, 은유와 비유, 온갖 상징으로 가득찬 이야기의 힘을 함의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허구, 상상은 실체없는 어떤 믿음을 가능하게 만들고,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게 만드는 힘이 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그럼에도 인간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하게 만드는 과정이 된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고, 문학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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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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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도덕적- 사회적 행위는 사회집단(인종, 국가, 경제 등) 사회적 행위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첫 문장은 자뭇 의미심장하다. 이는 이 책의 의문점이고 시작점이자 일종의 선언으로 보여진다. 그가 보기에 선한 의지와 이타적인 본성을 지닌 개인과 그로 구성된 집단(사회)간의 상충과 모순은 각 개인과 집단이 가진 고유 속성과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용하여 생긴 결과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즉 개인에게 있어 선한 의지와 이타성이 집단으로 들어가면 다르게 표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 이타심의 총합, 즉 양심의 총합이 전체로 이어진다는 환원주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호혜성이나 동정이 집단이라는 결을 닿으면 그것은 힘의 차이가 여실하게 드러나는 집단 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신학자인 니버는 개인의 지닌 이타적 본성을 인정하면서도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 집단간의 갈등과 분쟁들에게 대해 너무나도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종교학, 시회과학, 교육학,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가령 종교는 인간을 너무 이타적이고 원자적인 개인으로만 국한시켜 사회에 무관심을 초래하였으며, 사회과학의 ‘이성‘에 대한 강조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으로 조정과 타협을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아 갈등을 악으로 치부하였다는 문제점을 보인다 말한다. 또한 사회 집단의 갈등은 인간 무지에서 비롯되었기에 더욱 교육을 통해 합리적인 개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교육학의 관점은 지배층의 특권을 옹호하는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비판한다. 니버가 보기엔 이 세 학문은 사회 집단 간의 갈등과 문제를 이성을 통한 정의 구현이라는 다분히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 학문에서 ‘악‘으로 치부되는 사회 갈등과 불평등은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타파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가속화되고 있는 힘의 불균형(정치, 사회, 경제 등등)은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특권화된 계급으로 고착화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힘의 불평등이 집단 간의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를 구성하는데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인식이다. 그렇다고 니버는 맑스주의자처럼 갈등을 사회 진보의 원동력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갈등이 엄연히 존재하고 불평등 완화하기 위한 세력간의 다툼과 갈등은 당연한 것이기에 이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약한 쪽의 저항과 투쟁,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집단 간 힘의 불균형으로 빚어진 사회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 ‘사회적 정의‘가 중요한데 이를 위헤서는 힘센 집단에 대항할 대항세력과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정치‘가 중요하다고 니버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 사회적 정의는 다분히 이상적인 조정의 산물이 아닌 때론 강제력이 수반되는 형태이다. 니버는 지배권력의 대항세력의 투쟁에서 일정 부분 폭력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의 폭력은 소수(숫자가 아닌 힘) 세력의 생존에 관련된 부분에서만 다소 허용되어야 한다. 니버가 보기에 지배권력은 이미 공권력(사법권, 경찰권 등)을 점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합법적이며 비폭력적인 행태(?)의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배 계급의 잣대로 노동자계급의 선동적인 폭력에 대해서 야만적이며 불법적이라는 비난하는 건 불공정하다. 그렇다고 니버가 폭력을 옹호단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회적 정의 구현에 있어 비폭력적 저항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사회관계에서 다른 집단의 피해는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주장한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의 사례를 들면서 행위의 선함이 결과론전 선함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은 흥미로우면서도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

니버는 책 전반에 걸쳐 사회 갈등과 사회정의의 문제를 이분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개인/사회, 폭력/비폭력, 갈등/정의 등 현대 사회의 문제는 이분적인 시각으로 해결되지도 않으며, 정확하게 양분되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 이성과 윤리는 정의로 향하는 길이긴 하지만 힘의 불균형이 계속 되는 한, 집단 속의 개인은 계속 이기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업화에 심화된 자본주의는 굴뚝에서 컴퓨터로 옮겨갔을 뿐 더 극심한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고 그 간극은 더 커지고 있다. 니버가 긍정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 역시 그 안에서 힘의 불균형에 따른 노조간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새롭게 나타되고 있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달리 말하면 우리네 정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버는 정치에 있어 국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듯 보인다. 오히려 미국인이었던 니버가 소수 세력의 의회진출이 다소 용이했던 영국, 독일의 정치 시스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계급이 고착화되고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재는 니버가 논의했던 자본가/노동자, 제국/식민, 여성/남성 이라는 집단 문제가 이미 사문화된 듯 보인다. 이미 이들 간의 불평등은 이성과 교육, 사회정의를 통해 많이 해소되었고 앞으로 더 긍정적으로 바뀌어 갈 듯하다. 사회경제적 계급 문제, 고령화에 따른 세대 문제, 경제불황에 따른 정규직/비정규, 도시/지방, 자국민/이주민 등등 비도덕적 사회는 여전히 진화를 거듭하면서 진행중이다. 정의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 실현은 묘연할 뿐이다. 하지만 니버가 제기하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고도 강력한, 그러면서도 더 절실하면서도 유효한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층과 극단적 견해를 지닌 집단이 점점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네 정치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일 것이다. 니버에게 있어 정치는 나와 타인 간의 힘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타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이타적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맹목적인 복음주의가 위험한 것은 자신만의 이타성을 타인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타성이 타인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할 수 있게 만드는 건, 개인과 타인간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집단이 그 이기성을 제어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집단과 다른 집단간의 관계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개인도 집단도 사회도. 정의는 모두가 최대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의 관계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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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위한 투쟁 / 법감정의 형성에 대하여 - 너는 투쟁을 통해 너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루돌프 폰 예링 지음, 심재우.윤재왕 옮김 / 새물결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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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진보가 모든 도덕 이념의 핵심이고, 도덕의 진보는 역사의 신이다.
—<법감정의 형성에 관하여>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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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생리학 인간 생리학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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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요한 관찰에서 나오는 풍자와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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