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에 치러졌던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옛날 사람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었다. 박근혜 당선인에게는 '박정희'라는 이름이, 문재인 전 후보에게는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항상 따라 붙었다. 두 후보가 내세우는 정책 기조에서 어떤 큰 차이를 찾아볼 수 없었던 바, 그들에 뒤에서 도사리고 있었던 '전설' 혹은 '망령'이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아직까지는 '박정희'의 힘이 더 컸던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0년대의 시대정신이었던 경제적 산업화를 상징하는 '박정희' 프레임이 지금에 와서 다시 고개를 든 것인가? 지난 5년 동안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실패가 개발독재 경제정책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박근혜 당선인이 단순히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이와 같은 추측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이번 대선의 슬로건이 100% 국민대통합이니만큼) 하지만 지지자들의 속내는 다를지 모른다. 많은 지지자들의 가슴속에서는 1960년대의 그 기억들이 있을테니까. 이 시대에 1960년대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전설과 망령이 교차하는 1960년대를 벗어나야
얼마 전 고 장준하 선생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는 기사가 났다. 유신헌법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974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것에 대한 재심으로, 39년 만에 이뤄졌다고 한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내놓은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조회수 200만을 돌파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고, '유신의 추억'이라는 다큐멘터리도 꽤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자,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부르는, 혹은 불리우는 사람에 따라서 '전설' 혹은 '망령'이라고 할 수 있는 장준하, 박정희, 이승만 등이 이 시대에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박정희'는 우리나라에서 '경제성장'의 환상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어쩌면 영원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우리를 옥죌 것이라 본다.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가 여기에 있고, 이 책의 배경도 여기다. 벗어나고 싶지만, 아니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1960년대의 모든 것. 이 책의 저자들은 존경은 표하되 1960년대의 모든 산물을 완전히 리메이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 시대의 주역들이 주춧돌을 놓았던 민주주의와 '근대성'은 이미 낡은 것이 되어서 단지 참조대상일 뿐,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며 저자들은 1960년이 다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
1960년은 4.19가 있었던 해이다. 해방 후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던 시기, 한국 사회를 바꾼 혁명으로 기억되고 있는 사건이 일어났던 해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시기에서 이어져온 비록 전설과 망령이 살아 숨쉬고 있을 지라도, 다시 돌아가 제대로 파헤쳐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저자들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4.19 (비록 5.16이 되어버린 비운의 4.19이지만)가 진지한 공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체제의 가능성이 소진되고 있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560쪽)
'밥 대 장미'를 넘어선 시대적 모순들의 향연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산업화 대 민주화'로 대변되는 박정희 시대를 더 적절한 것으로 수정하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고 말한다. 1960년대는 모순의 연속인데, 단순히 산업화와 민주화로 나누어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만 나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바라는 건 '배부른 돼지'도 허기에 찌든 자유인도 아닌, '밥과 장미' 즉 민주주의와 경제를 모두 원하듯이 1960년대도 '산업화 대 민주화' 보다 '산업화와 민주화'로 보는 게 정확하다는 것이다. 비록 이 둘 간의 관계가 모순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며 이 1960년대식 변증법을 각 장에서 펼쳐보이고 있다.
"1960년대식 변증법은 4·19와 5·16의 연속과 불연속, '빵'(평등에의 욕구)과 '자유'(개인주의화의 욕망) 사이의 모순(1장), 박정희와 김일성의 적대적 공생(3·4장)에도 관철된다. 또한 이 책을 읽다보면《사상계》의 모순(7장)이나 4·19세대와 1960년대 지성의 자기모순(2·5·6장)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유와 반공을 동시에 살고, 민족(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열렬히 서구를 추종하였다. 또한 박정희의 광기가 춤을 추며 사회·문화가 전반적으로 '군사화' '남성화'되는데도 대중의 문화적 역능과 여성의 역할이 증대한다든지(10장), 황금만능·경제 제일의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속물과 졸부를 곳곳에 등장시켰음에도 저항의식과 인문학적 교양이 함께 커가는 드라마적 변증법이 펼쳐지는 광경도 있다(8·9장)"(10쪽)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본다. 먼저 4·19가 5·16에 의해 폭력적으로 압살됐다는 서사는 사실의 절반에 불과하며, 사실 4·19는 혁명을 주도했던 주체들 자신에 의해 외면되고 배반당한 자취가 역력하다는 것이다. 이는 4·19가 4·19로서 이어지지 못하고, 정반대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는 5·16이 되어버린, 오히려 앞장섰다고도 할 수 있는 비극적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만들어진 1960년대가 모순으로 시작되고 있는 모습이다.
또 하나의 모순은 박정희 자신에게 있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저자들의 말에 의하면 좌익이라는 죄의 구렁텅이에서 일어나 전능자가 된 박정희는 반공국교의 교주였다. 즉, 박정희 시대의 반공 구호는 단순히 반공주의의 상투어가 아니라 재귀적인 말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모순적인 삶에서 모순을 없애버리기 위해 획일적인 다짐을 자신을 넘어서 대한민국 전체에게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어서 말할 수 있는 모순은 남북의 특권계급이 서로 적대적으로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남한에는 북에 대한 유치하고 맹목적인 공포와 혐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먹으려는 기득권세력이 여전하고, 북의 세습 체제 또한 분단정치의 주축으로서 공포와 혐오를 먹이로 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체제와 세습 체제는 남과 북에 각각 존재하는 두 가지 악이 아니다. 파시즘적 법과 비밀경찰에 의해서만 유지되며, 세습이 민주적 선출보다 더 중요한 부와 권력의 재생산 도구가 되는 이런 체제는 남과 북 모두 그 양상이 비슷하고 공통적이다. 그것은 한반도 전체를 관통·관류하며, 민중을 지배하는 억압과 불평등의 공통적인 핵이다."(155쪽)
1960년대는 당대의 직접적 기원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이 책에서 저자들은 1960년대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의 직접적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1960년대를 통한 재구조화의 결과이거나 그 잔여물(553쪽)이라는 것이다. 근대 인문학과 지식 시스템 등 지식·학문이 자의식을 갖고 새로운 의식을 온전케 하였고, 이를 넘어 남북의 분단구조 자체가 완성된 시기가 그때의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힘이 이제는 거의 소진되었고, 새로운 세계가 열려도 몇 번이나 열렸다. 세계질서는 새롭게 재편되었고, 냉전 시대 이후의 생존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직도 냉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말한다. 학문 분과는 재편돼야 하고 제도는 바탕에서 다시 생각돼야 하며, 취업과 복지의 구상도 다시 짜야 한다고.(559쪽)
이제 4·19와 5·16의 1960년대 세대가 만들었던 대한민국은 1987년 체제와 1997년 체제를 지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상속에서 거의 다 허물어지고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아니, 잃어가야 정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힘은 막강하고 이 시대에 살아 있다. 이 끝없는 모순의 뫼비우스 띠를 잘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 세대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 그러려면 먼저 이 시대의 근원인 1960년이 필요하다. 이 책을 보며 그 시대에게 성실히 물어보고 성실한 답변을 들어라. 앞으로의 길을 가르쳐 줄지는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새로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오마이뉴스에도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