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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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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추모의 의미로 내가 읽었던 그의 책을 소개해본다.

오마이뉴스 등 진보적 언론매체에서 가끔씩 그의 근황을 알려주는 기사를 내왔기에 그의 존재를 잊지는 않았지만, 역시 절필을 한 지 오래인지라 그의 '존재감'은 예전에 비해서는 퇴색한 감이 있다. 아마 현대사에 관심이 적은 젊은 세대라면 리영희라는 인물이 왕년에 얼마나 '미친 존재감'을 과시했었는지 실감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무식한 냉전반공주의가 횡행했던 민주화 이전 남한사회의 지성계는 당연히 좌우를 넘나드는 다양성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러한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찾아 읽어볼만한 무언가 '쌈빡한' 책들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과거 기록들을 보면 "'이 책'을 들고다니지 않으면 제대로 된 학생 취급을 받지 못했다"라거나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또래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따위의 회고를 자주 접할 수 있다.

1960년대에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책이 단연 정론지 <사상계>였다면, 1970년대의 주인공은 역시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니 1974년 출판된 이후 줄곧 베스트셀러였는데, 출간 2년 후까지도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었다.(매일경제 1976.8.10) 경향신문의 집계로는 1980년 현재 약 3만 부가 팔렸다고 했다.(경향 1980.2.7) 같은 시기에 펴낸 다른 책들까지 더하면 대단한 판매 부수였다. 금서로 탄압받았던 사정까지 고려하면 경이적인 인기였다고 할 수 있다.

리영희 당신이 쓴 표현으로 비유하자면 유신체제 속에서 분통만 터뜨리던 청년들은 이 책들을 읽고나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충격을 받았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베트남전쟁에서 보여준 어두운 그늘, 격동하는 세계정세와 한국의 위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시각 등을 접하면서 감겨 있던 한쪽 눈을 뜰 수 있게 된 것이다. 리영희의 저술들은 유신체제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문자 그대로 '필독서'였다. 프랑스 언론 <르 몽드>는 그를 일컬어 '사상의 은사'라고 했고, 공안당국은 그를 일컬어 '의식화의 원흉'이라 했다.

공교롭게 최근 연평도 사태의 와중에서 나는 리영희라는 존재를 자주 상기하곤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북괴(北傀)'라는 용어 때문이었다. '북괴'는 대략 '북한 괴뢰(傀儡)'의 준말로, '괴뢰'는 '꼭두각시'라는 의미이다. 즉 '북괴'는 '꼭두각시 북한'이라는 의미인데, 곧 북한은 주권을 지닌 국가가 아니라 소련의 조종을 받는 정치집단, 국가라고 해도 위성국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담긴 용어이다.

지금은 '북한'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지만, 독재정권 시절에는 '북괴'가 더욱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오히려 '북한'이란 표현을 쓰면 '휴전선 이북을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괴뢰집단'을 인정하는 뜻이라고 의심할 정도였다. 이런 시대에 신문지상에서 '북괴'란 표현을 쓰지 말고 '북한'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고 적극적으로(아마도 공개적으로는 처음으로)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리영희였다.

그는 단순히 북한을 인정해야 한반도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만으로 이렇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1968년 발생한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분석하면서 북한이 단순히 소련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진실에 민감한 언론인이었고, 당연히 '북괴'라는 '정치적으로 안전한' 표현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북괴'라는 용어를 폐기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우상'에 도전했다. 그리고 탄압받았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은 그의 도전이 역사적으로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이번 연평도 포격 사태로 이글루스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중 자제심을 잃은 몇몇 블로거들이 '북괴'라는 용어를 애용하고 있었다. 나는 21세기도 10년이 다 지나가는 시대에 이러한 복고풍의 단어를 접하면서 새삼스레 리영희라는 존재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다가 오늘 그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나는 리영희의 저술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다. 그나마 그중에서 정독했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이 최근에 출판된 <대화>이다. 이 책은 리영희와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대담집이다. 리영희가 병으로 쓰러진 후 기억력이 감퇴하고 펜을 잡기 힘들어지자, 그를 잘 아는 임헌영의 도움을 받아 구술 대담의 형식으로 풀어낸 자서전이라 볼 수 있다. 이 책은 리영희의 인생역정을 담담히 풀어내면서 그의 신념과 사상을 압축적으로 드러내었다. 대담의 형식이므로, 조금만 집중한다면 마치 그와 실제 대화를 나누는 느낌으로 읽을 수도 있다.

나는 이책을 읽기 전까지는 리영희에 대해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철하고 깐깐한 지성인의 이미지였다. '이성'으로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식의 엄격한 논리들을 접해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자서전이라는 형태 덕분이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선입견을 고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엄격한 논리와 분명한 사실을 중시하는 언론인이었고, 감성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지성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엄격한 면모 속에는 시대의 부조리에 가슴 아파하는 역동적인 감성도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이성을 중시한다고 '우상'에 저항하는 용기가 절로 생기는 법은 아니다. 모든 엘리트가 '우상'에 저항하지는 않는다. '우상'에 저항하고 독재에 맞서 자유를 지향하는 용기는 분명 격동하는 분노가 서리지 않으면 쉽게 생기지 않는 태도이다. 이 책은 리영희가 외부의 억압과 내면의 불안에 굴하지 않고 시대의 부조리를 가슴 속에 갈무리하며 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태도를 가다듬어 나가는 삶의 궤적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국을 사는 언론인의 사표를 접하는 느낌(이를테면 어떤 정부관료가 리영희를 들먹이며 출입기자들을 비판한 에피소드 등)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에 기자 지망생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책이겠지만,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우리는 '리영희 가라사대' 운운하는 세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남긴 유산에서 자유로운 세대는 결코 아니다.

한국현대사에서 있었던 전쟁들을 이야기할 때, 미국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독재정권들을 이야기할 때, 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한겨레나 조중동 등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만드는 논리는 찬성 쪽이건 반대 쪽이건 그가 시대를 살면서 만들어낸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따위의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곧잘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하는 명제들이 한국사회의 지성계에서 발을 붙여온 과정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북괴'란 용어가 버젓이 통용되는 한국사회에서 그의 작업이 지니는 의미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지식인에 대한 최고의 추모는 그가 남긴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를 잘 모르거나 그에게 비판적이라 할지라도, 배우는 젊은이의 처지라면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정말로 극우적인 축을 제외하면) 진보에게든 보수에게든 리영희는 딛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는 가교와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출처:리영희를 추모하며 - <대화>(2005, 한길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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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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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책입니다. 추천할만한 책이라 생각해서 소개글 올려봅니다. 

 

한국현대사를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섭렵해야하는 책들을 꼽다보면 정통 역사학자들의 저술보다는 정치학이나 사회학 연구자들의 저술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한국현대사를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사료들을 발굴하고 이를 해석하는 작업을 비단 역사학계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계열의 연구자들도 적극적으로 해 왔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에 불어닥친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역사학의 영역만은 아닌 것은 당연했습니다.  


한국현대사의 연구가 부진했던 상황 속에서 워낙 드러나야할 사실들이 많았기에,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연구는 분과를 막론한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사료를 발굴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진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은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현대사연구의 부문별로 해석의 일정한 차이를 보이곤 했습니다. 

 

한국현대사연구의 다양한 부문 중에 정치사 부문은 역사학자들보다는 주로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사였습니다. 본래 한 국가의 정치체제를 분석하는 임무가 정치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를 정치학자들이 분석해야 할 것인데, 워낙에 역사학의 연구성과가 부실했던 탓에 사료발굴과 역사해석까지 시도해가며 연구를 해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강정구, 박명림, 최장집 등의 저술들을 읽다보면 이 글이 역사저술인지 사회과학저술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은 다릅니다. 거칠게 간단히 구분하자면,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은 연역적이지만 역사학의 연구방법론은 귀납적입니다. 사회과학저술의 맨 처음에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현상을 그 이론 틀에 따라 분석하고 체계화시킵니다. 하지만 역사서술은 그렇지 않습니다. 최소한 지금 우리가 따르는 근대역사학은 틀을 세우기에 앞서서 실증이 우선합니다. 사실들의 연속을 따라가면서 그 흐름을 파악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사회과학저술의 결론은 딱딱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쌔끈함을 보이지만 역사저술의 결론은 뜬구름잡는 내용이거나 아예 없는 경우(사실의 나열만으로 끝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역사학에서의 史觀은 어느 한 대가에 의해서 확립될 수 없고 여러 연구자들의 제안과 비판 속에서 체계화됩니다. 한국현대사에 있어서는 아직은 연구성과가 충분치 못하여 어떤 사관이 확립되어 있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관통하는 사관은 고사하고 대한민국사만을 관통하는 사관조차도 확립되어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어찌 보면 한국현대사를 보는 대다수 전문연구자들의 관점은 역설적으로 '한국'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관점이기도 한 현실입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보는 사관으로 그나마 인정되어 왔고 영향력을 지녀온 것이 이른바 '분단극복사학'입니다. 강만길이 1978년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내면서 논쟁이 촉발되었고, 지금은 '역사적 시의성'을 인정받아 많은 지지를 얻고 있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독립운동'이라고 부르던 것을 지금은 '민족해방운동'이라고 많이 부르게 된 것을 보면 분단극복사학이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단극복사학은 한국사/민족사관 전체를 아우르기 힘들다는 결함이 있지만, 근대사의 민족해방운동에서 현대사의 민족민주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리고 21세기 들어 통일작업이 진전되는 현실에서 '역사적 시의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음으로써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분단극복사학은 일제시기의 좌우익진영이 벌인 갖가지 형태의 항일운동을 궁극적으로 '해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끝내 '해방된 민족국가'는 건설되지 못했습니다. 두 분단국가의 성립은 진정한 '해방된 민족국가' 건설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고, 분단국가의 후손들은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떠맡게 된 것입니다. 그 미완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바로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민주운동의 역사인 것입니다.  


저는 분단극복사학의 이러한 관점이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고 긍정합니다. 그러나 결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일인데, 최근 뉴라이트의 역사해석에 관한 문제제기로 인해 이 결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분단극복사학의 결점은 앞서 언급한 민족사를 통사적으로 체계화하기 힘들다는 점 외에도, 한국현대사를 바라봄에 있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폄하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사를 '미완의 역사'로 보는 데서부터 이미 출발하는 문제입니다. 민족해방운동에 최상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흐름을 국가의 권위주의독재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인 민족민주운동으로 연결하는 관점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찍어눌렀던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존재를 폄하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뉴라이트의 문제제기는 그런 점에서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지?" 라고 묻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87년 민주화를 전후해서 태어난 젊은 세대는 분명 사고의 중심에 '대한민국'을 놓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폭넓게 확산된 '대한민국'이란 구호는 국가의 정체성을 북한과 상대되는 휴전선 이남의 '남한'으로 보지 않고 대한민국을 그대로 직시하는 경향을 전면적으로 보여주었던 징표입니다. 


민주화 이후의 대한민국은 분명 자랑스러워 할만한 여지가 있는 국가인데, 도대체 뭘 자랑스러워 해야하는 건지에 대한 문제는 미묘한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민주화를 일궈냈던 386세대가 제도권정치에 진출했다가 욕을 얻어먹으면서 더욱 복잡하고 미묘해졌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뭘 자랑스러워해야하는 거지?라고 말입니다. 


뉴라이트의 주장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이승만은 국제정세를 꿰뚫어보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무엇이어야하는지 정확히 파악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혼란한 시국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신념을 견지하여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활동을 벌여냈고, 그 성과로 건국된 대한민국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지향할 수 있었던 매우 중요한 국가체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워할만 하고, 이제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일궈낸 업적을 이어받아 그놈의 '선진화'로 나아가자고 외치는 것입니다. 


뉴라이트의 희망과 자존감이 넘치는 역사인식에 반해 지금까지의 한국현대사 연구는 대한민국사를 '고통과 고난에 찬 부끄러운 역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좀 매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는 반대와 저항을 외치다가 희망을 발견하는데 너무 인색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현대사에서 뉴라이트의 '저열한 희망'이 아닌, 어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는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사를 '미완의 역사'로 보아 제도정치사를 별로 의미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다면, 결국 현재 한국정치의 발전에 큰 폐해가 되고 있는 정치혐오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과학 분과에서의 현대한국 정치사/사회사 연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인문학적 감수성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는 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야흐로 역사학은 제도정치와 민중의 삶이 상호관계를 맺는 과정을 따라가며 어떻게 대한민국이란 국가체제가 진보의 희망을 키워올 수 있었고 민주주의를 지켜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할 때인 것입니다. 저들이 설파하는 '선진화'는 결코 그들의 주장을 따라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반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론격의 글이 너무 길었습니다. 서중석이 쓴 이 책은 비록 전문연구서로선 아니지만 정통 역사학자가 현대한국의 정치사를 전면으로 개괄한 거의 최초의 저서입니다. 사회과학자들이 이런저런 서구의 이론들을 가져다가 한국정치의 흐름을 분석하고 체계화시켰지만, 한국현대사의 역동성을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도의 변화만을 보지 않고 실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갔는지에 대해 연구해야 하는 역사학의 본령이 힘을 발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 책은 전문연구서가 아니라 서중석이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주최한 <선거로 본 한국현대사>대중강의에서 강의한 결과를 편집한 전형적인 역사대중서입니다. 문체도 강의한 그대로로 적고 있어 읽기가 편하고, 그래서 서중석 특유의 입담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서중석은 대한민국의 선거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고, 어떤 면에서든 민중의 진보를 향한 열망이 표출되었던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하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민주주의의 진전을 파악하는데 있어 완전히 제도정치와 단절된 채 진행되었던 민족민주운동의 성과뿐만 아니라,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의 향배로 인해 제도정치가 출렁였던 측면도 진지하게 고려해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60년 4월혁명, 유신체제의 붕괴, 전두환정권의 붕괴 등의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길목마다 선거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 대해서는 더 길게 설명하지 않고 박노자의 평으로 대신합니다. 아무래도 박노자가 보는 관점이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니까요.^^;; 


"지역주의 선거, 금권선거, 혹은 관권선거라고 해서 선거를 '더럽게'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거라는 정치 메커니즘의 그 모든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관의 개입이 없는 민주적 선거제도를 이룩한 한국 민중의 힘은 경이롭습니다. 물론 아직도 산 넘어 산이지만, 서중석 교수의 이 책은 선거가 한국 사회를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화시켰는지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줍니다." 


서중석은 어느 인터뷰기사에서 진보정당의 분열을 아마추어리즘이라 비판하며 "진보세력은 현대사 공부를 좀 하라"고 질타했습니다. 한국현대사, 현대정치사의 흐름을 알았다면 분열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암튼 그는 앞으로 한국정치가 어떻게 진전되어야 하는지 올바른 전망을 가지려면 한국현대사, 특히 정치사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자는 이 책의 서평에서 정치세력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유권자의 민심을 다루는 부분이 너무 소홀했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서중석의 의중을 짐작한다면 그리 나쁘게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으려면 기존 한국현대사 연구의 내용들을 어느 정도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사, 사회운동사 부문에 대한 지식이 좀 있으면 책 속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지식들이 좀 부족하다 해도 여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 별다른 부담 가지지 말고 읽어봐도 좋을 듯 합니다. 분량도 250쪽 내외라 읽기에 부담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선거이야기가 이렇게나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만 해도, 아무리 더러워도 정치라는 것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할 수만 있어도 자신의 사상적 지평을 넓히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글에서 언급한 참고 기사들

책 서평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2381

서중석 인터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9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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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행 엑서더스 - 그들은 왜 '북송선'을 타야만 했는가?
테사 모리스-스즈키 지음, 한철호 옮김 / 책과함께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특이한 이야기에 대하여 특이한 저자가 쓴 특이한 역사서술이다. 뭐가 특이한가?

특이한 저자

저자 테사 모리스-스즈키(Tessa Morris-Suzuki)의 이력은 특이하다.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부하여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전공은 일본사이고, 일본에서 학문활동을 했다. 일본인과 결혼도 했다.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민가서 생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일본을 다룬 여러 연구서를 출간했는데, 한일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공부 중에 우연히 북송에 관한 기록을 접했고, 그토록 충격적인 이야기가 어두운 문서고 깊숙이 잠들어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녀는 북송의 실상을 알기 위해 한국, 일본, 북한, 미국, 스위스, 프랑스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료를 수집했고, 결국 '한국사에 문외한이고 한국어를 전혀 못함'에도 불구하고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2007년에 일어판과 영어판이 동시에 나왔고, 2008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정도 소개면 저자의 이력과 책을 쓰게 된 경위가 이채롭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짧은 문단에서 나라 이름이 도대체 몇 개가 언급되었는가.

특이한 이야기

재일한국인 북송은 이상한 이야기이다. 종전 당시 200여만 명에 달했던 재일한국인들 중 140여만 명이 귀국하고 60여만 명이 잔류했다. 잔류한 이들 중에는 정말로 일본에서 살고 싶어 자진하여 남은 축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 GHQ와 일본정부에 의해 본국으로의 재산반입이 제한되어 어쩔 수 없이 잔류한 축이었다. 재일한국인들은 거의 대부분(약 97%)이 38선 이남 지역 출신이었고, 그중에서도 상당수는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출신이었다. 1959년 12월 북송이 시작된 후 북송선에 탄 9만여 명의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이남 출신이었다. 이 책의 부제를 인용한다면, "그들은 왜 '북송선'을 타야만 했는가?" 모두 빨갱이라서? 만약 그게 답이라면 애초에 이 책이 안 나왔고 이 소개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상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이상한 이야기가 역사에 등장하기까지의 복잡한 사정을 해부한 연구이다.

이 이상한 이야기를 지금껏 모나지 않게 포장해온 공식적인 기억은, 바로 북송이 재일한국인들의 '거주지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추진한 '인도주의적' 사업이었다는 것이다. 1956년 밀입국 혐의로 수용소에 억류되었던 일단의 재일한국인들이 처음으로 북송을 요구했다. 일본 측은 처음에는 수용하기 힘든 요구라며 난감해 했지만,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북송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고, 결국 적십자를 논의 창구로 삼아 북한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국제적십자와 일본, 북한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까다로운 교섭을 성사하고 북송을 실현시켰다. 이러한 이야기가 북송에 관여했던 측의 공식적인 설명이었다.

저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스위스 제네바 국제적십자위원회 본부의 문서고를 뒤진 끝에, 공식 기억과는 다른 '이야기의 시작점'을 찾아내었다. 이 이야기는 공식 기억이 말하는 것처럼 1956년 재일한국인들의 요구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 이 요구가 있기 전인 1955년경부터 이미 일본은 '북한 귀환 희망자'들을 북송한다는 구상을 세우고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사회의 하층에 머물며 복지예산만 축내는 재일한국인들이라는 존재가 성가셨고, 어떻게든 그들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한일회담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일본은 '또 하나의 조선'인 북한의 존재에 주목했다. 일본은 조건만 맞는다면 재일한국인들을 북한으로 '대량 귀국'시켜버릴 수 있다고 여겼다.

문제는 국제여론의 욕을 먹지 않으면서 그들을 내보내는 방법이었다. 일본이 생각한 카드는 '인도주의'였다. 일본정부는 '인도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방안들을 고민했고, 그 결과 정부가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고 일본적십자가 주도한다는 방침, 인도주의의 명분을 최대한 선전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의 개입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방침 등을 수립했다. 일본적십자는 갖가지 과장과 은폐를 뒤섞어가며 국적 측에 북송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저자의 노력으로 일본의 의도가 결코 인도주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북송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다른 주체들인 북한과 국제적십자의 의도는 어떠했는가? 국제적십자는 일본의 요청에 대응하여 나름대로 조사를 했고, 일본의 의도가 결코 인도주의적이지 않고 복잡한 정치적 고려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국적은 재일한국인들의 처지가 너무 열악하여 어떤 해결책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고, 더 나은 삶을 개척하기 위해 북한 귀환을 열망하는 재일한국인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국적은 결국 국가 간의 복잡한 정치적 암투 속에서도 인도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존재의의를 인식하여 북송에 관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후 북송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끈질긴 요구와 미국, 소련의 압력에 직면하면서 국적은 점점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갔다.

북한은 일본과 국적의 교섭 요구에 응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1958년에 이르러 상황이 변했다. 가장 큰 요인은 중국 지원병의 철수였다. 북한 경제의 재건을 위한 중요한 노동력이었던 이들이 떠나면서, 북한에게는 새로운 노동력 수급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한편으로 이들의 철수는 북한으로 하여금 심각한 안보위협을 느끼게 만들었다. 남한에는 여전히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안보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한-미-일 공조체제에 쐐기를 박고 싶었는데, 북송은 썩 괜찮아보이는 카드였다. 북송은 분명 한일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1958년 말 김일성은 기존의 입장을 수정하여 일본과의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왔고 소련에도 협력을 요청했다. 북한의 입장이 돌변하면서 북송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과 조총련은 일본의 의도에 호응하여 인도주의 명분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속내는 이처럼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저자는 북송에 직접 관여한 일본, 북한, 국적을 살펴보는 데 그치지 않았다. 북송의 이면에는 거대한 '침묵의 파트너'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냉전의 두 지도자인 미국과 소련이었다. 저자는 특히 미국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했다. 미국은 겉으로는 한국과 일본 중 어느 한 편을 들지 않고 중립을 표방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일본의 편을 들며 북송을 승인했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봉쇄전략을 짜는 문제에서 미국이 직면했던 현안은 미일안보조약 개정이었다. 미국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시 정권을 지원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일본 내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던 북송 문제를 굳이 나서서 비토할 이유가 없었다.

미국이 표리부동을 감추기 위해 사용한 방안 역시 '인도주의'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시 포로처리원칙이었던 자유송환의 사례를 들며 '거주지 선택의 자유'를 옹호하고 나섰다. 이러한 입장은 포로문제와 재일한국인 처우 문제를 동일시하는 비논리적인 성격이었지만, 어쨌든 미국은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한국과 국적을 압박했다. 한국에게는 경제적 지원과 같은 당근을 제시하며 북송을 묵인하고 한일회담 재개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한편으로 인도주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국적에게 반드시 북송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저자는 북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이들 주체들의 겉과 속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 실상을 촘촘하게 재구성해냈다. 저자가 발견한 역사상은 온갖 곤란 속에서도 삶을 개척해나가려는 의욕을 불태웠던 재일한국인들을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제멋대로 이용한 나라들과 관련 세력들의 면목 없는 모습이었다. 식민지의 민중으로서 디아스포라를 감수해야 했던 이들 재일한국인들은, 냉전이 부과한 어두운 정치에 휘말리며 또 다른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맞이했던 것이다.

특이한 서술 방식

이 책의 서술 방식은 특이하다. 뜻하지 않게 발견한 이 충격적이고도 슬픈 이야기를 건조한 학술 논문 스타일에 끼워맞추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이 책은 분명 기본적으로는 학술연구서이지만, 저자는 장난 같은 운명에 놓였던 재일한국인들을 만난 경험을 감성적으로 풀어놓는 등, 자신의 체험을 역사서술과 결합시키는 면모를 보여준다. 연구자들이 대개 자신만의 내밀한 경험으로 숨겨두곤 하는 '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사료와 대화하고 역사를 상상하는 과정'을 저자는 책에 담담히 적어놓았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서술방식이 과학적이지 못하고 경박하다고 비판하지만, 나는 썩 괜찮다고 느꼈다. 결코 잊혀서는 안 되었던 소중한 이야기가 놀랍도록 완벽하게 은폐되어온 현실을 고발하고, 아울러 숨겨진 이야기를 드러내고 기억을 재구성하는 역사학의 '소명'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주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러한 특별한 서술방식 때문에라도 이 책을 한 번 읽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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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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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전쟁을 둘러싼 기억투쟁

역사는 공동체의 기억을 둘러싼 투쟁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역사적 현상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여 사회적 합의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교육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된다. 사회 구성원들의 역사적 기억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때, 비로소 '사회통합'을 운위할 수 있게 된다. 같은 것을 기억해야만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여러 역사적 기억 중에서도 전쟁은 가장 고통스런 기억이다. 같은 공동체의 소중한 이웃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모습을 감내해야 했던 시절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웃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어야 했던 '내전'의 기억이라면 더욱 고통스럽다. 고통은 치유해야 하고, 더욱이 전쟁으로 겪은 고통은 반드시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쟁의 고통은 치유하기 어렵다. 가해자는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마음의 상처이다. 그 상처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자기합리화'를 해야만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살아있는 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그 두려움을 감내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피해자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살아가는데, 가해자는 '자기합리화'를 어느새 '진실'로 착각하며 마음껏 떠들고 다닌다. 그런 식으로 고통의 '진실된 기억'은 잊혀 간다. 고통은 치유되지 못한 채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어 간다.

한국전쟁 60주기이다. 전쟁을 일으켰던 이들은 모두 죽었고, 전쟁에 휩쓸렸던 이들도 이제는 서서히 퇴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고통은 고스란히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며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통을 잘 느끼기가 힘들다. 아프긴 아픈데 왜 아픈지도 모르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 고통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민중은 자신이 겪은 전쟁의 아픔을 채 이야기해주지도 못하고 스러졌다. 자신의 형제가, 부모가, 둘도 없는 친구가 죽어나간 그 고통을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미처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가해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현실에서, 저놈이 내 소중한 이를 죽였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순간 자식과 손주 역시 가해자의 감시 대상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는 우리들에게 한국전쟁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 고통을 치유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전쟁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전쟁에서 자유로워져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먼저 상처를 드러내야 한다.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어온 그 상처, 가해자가 드러내지 말라고 협박하는 그 상처를 드러내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만만하지 않았던 일이기에 60년이 지나도록 치유되지 못했다. 그러나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상처는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치유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우리는 전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어느 실천하는 연구자가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해 민중과 대화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왔다. 도대체 한국전쟁은 무엇이었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나.

2.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

학계에서 한국전쟁을 평가하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전통주의 시각과 수정주의 시각이다. 이 두 관점은 전쟁의 기원과 발발 책임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전통주의 시각은 냉전 초기부터 미국과 남한을 비롯한 '자유진영'에서 공유해온 시각으로서, 우리는 평화를 추구했는데 적화 야욕에 불타는 소련이 북한과 중공을 데리고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는 관점이다.

수정주의 시각은 1970년대 미국 학계가 베트남 전쟁을 목도하면서 미국의 대외정책이 가진 성격을 재검토하면서 등장했다. 미국은 냉전에서 결코 평화를 추구하며 방어적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유진영'에서 이탈하려는 동맹국의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소련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을 벌였다. 기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이 대등하게 대결하는 구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수세에 몰려 고전하는 입장은 소련이었다. 이러한 수정주의 시각에서 소련이 한국전쟁을 도발했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힘들었다. 이미 전력차가 확연한 상태임을 양측이 빤히 알고 있는데 열세에 놓인 소련이 전쟁을 도발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주장이 소위 '남침유도설'이다. 미국이 함정을 팠고, 소련이 냉큼 달려들었다는 주장이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한국전쟁에 관한 기밀문서들이 공개되었다. 이 기밀문서들은 전쟁을 일으킨 측이 공산진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전쟁을 선도적으로 주장한 이는 북한이었고, 소련과 중국은 떨떠름해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소련이 주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전통주의자들은 소련이 전쟁 발발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했으되, 아무튼 전쟁 발발의 책임이 공산진영에 있다는 것은 명확해졌다고 주장하여 자유진영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런 관점을 이전의 전통주의와 구별하여 신전통주의라 부른다.

저자는 위와 같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접하면서, 뜬금없게도 질문부터 다시 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기원, 전쟁 발발의 책임을 밝히는 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문제는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는가'보다 '전쟁 중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으며, 전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전쟁의 후유증은 이런 문제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기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논쟁은 미국의 관점에서 미국의 이익을 논하는 성격이 짙다. 저자는 한국전쟁을 '미국인'의 관점이 아닌 '코리언'(남북 민중을 아우르고자 사용한 표현이다)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문제제기한다.

3. 한국전쟁의 역사적 기원과 그 성격

저자는 역사학계의 많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한국전쟁이 '내전'으로 발발하여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고 본다. 일단 중요한 부분은 전쟁이 '내전'으로 시작되었다는 평가이다. 한국전쟁은 우리가 현재의 상황으로 미루어 상상하는 것처럼 북한이라는 '국가'와 남한이라는 '국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라고 보기 힘들다. 비록 1948년에 남북에 각각 분단정부가 수립했지만, 남북 양쪽 모두 자신들의 국가가 온전하지 않은 '반쪽국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분단은 부자연스런 상태였고, 반드시 통일되어야 했다. 하나의 민족이 두 국가로 갈라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분단된 국가의 두 지도자들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민족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여겼는데, 왠일인지 평화적인 방법의 통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국토완정(國土完整)'을 주장했고, 이승만은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외쳤다. 이승만은 선제공격을 바랐지만 국력은 약했고 미국은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승만의 욕망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원조의 수준을 낮추어 국방력을 약한 상태로 놔두었다. 반면 김일성은 민주개혁을 급속하게 추진하며 체제를 상대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었고, 무력으로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스탈린과 마오쩌뚱에게 자신의 확신을 전달하며 지원을 촉구했다. 공산진영의 두 지도자는 소극적인 태도로 남침을 승인했다.

저자는 1948년 분단 이후 평화적인 방법의 통일이 불가능했던 이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결국 전쟁의 기원 문제가 분단의 기원 문제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해방/점령 직후 민중은 혁명의 욕구를 분출시켰다. 그 혁명의 요구는 식민체제를 청산하고 봉건제를 타파한 민주적 근대민족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러나 남북에 외세가 개입하면서 혁명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은 점차 해체되어 갔다. 소련과 미국은 자신의 이익에 맞는 국가를 한반도에 수립하고 싶어 했고, 그 목적에 따라 개혁을 실시해 나갔다. 

남북에서 개혁을 추진해 나간 외세와 주도세력은 반대세력을 포용하지 않았다. 한반도 도처에서 반대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폭력이 난무했다. 1947년 말 분단이 현실화했을 때 이미 서로 간의 증오는 갈 데까지 간 상태였고, 오직 극소수의 양심적인 사람들만이 평화통일을 실천하고자 했다.

1948년 남북에 분단정부가 수립했을 때, '사실상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남북의 권력집단은 자신의 통치 지역 안에서 반대세력을 포용하지 않기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씨를 말려버리기 위한 탄압에 몰입했다. 해방/점령 직후 1950년 6월 25일 '전면전' 발발 직전까지 불과 5년 여의 시간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무려 수십 만 명이 갖가지 형태의 폭력으로 죽었다. 최후의 평화통일 운동이었던 남북협상마저도 수포로 돌아가고 만 상황에서 남북의 권력집단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것은 식민체제를 청산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주의적 열망의 슬픈 귀결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전쟁이 좌우의 충돌이라기보다는 남북이 지향한 서로 다른 '국가주의'의 충돌이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한국전쟁을 국가주의의 충돌로 평가한 선각자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는데, 여기에도 실어본다.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나 그 체제, 이데올로기에는 차이가 있어도 개인을 그 노예로 삼는 국가주의인 데서는 다름이 없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대적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그러므로 국가주의가 있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38선의 비극은 멸망해가는 국가주의의 고민이다. 남북 분열의 책임은 국가주의에 있다.(함석헌, 「내가 맞은 8.15」, 『함석헌 전집 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한길사, 1984, 278쪽. 이 책 95쪽에서 재인용)

4. 이 책의 구성과 내용 - 한국전쟁 중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저자는 전쟁의 진정한 피해자는 원하지 않은 전쟁으로 인해 생존을 위협당한 남북의 '민중'이라고 본다. 가해자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혹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남북의 권력집단이다. 이 책의 본론은 2장 <피란>, 3장 <점령>, 4장 <학살>로 구성되는데, 저자는 본론에서 남북의 권력집단이 서로 다른 의도를 가졌으되 공히 민중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내모는 양상을 지적한다.

2장 <피란>의 분석 초점은 전쟁 중 이승만이 보여준 행태이다. 이승만은 전면전 발발 직후 우왕좌왕하다가 민중을 속이고 탈출로까지 끊어버린 채 황급히 도망친다. 국가의 지도자로서 마땅히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임무를 내팽개친 것이다. 이승만은 기실 민중을 주권자로 보지 않는 오만한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게다가 그는 오직 미국에 의지하여 국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애초에 냉전 대결로 인해 벌어졌다고 주장하며 미국을 탓했다. 그리고 북한에 속절없이 밀린 것도 미국이 안보 공약을 지키기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국민들의 피란을 보장하지 못한 책임도 미국에 돌려버렸다. 이러한 이승만의 인식은 그 배경이야 어찌됐건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오직 미국의 참전을 보장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고 국민을 위무하는 데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이승만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전쟁 중 남한의 국민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피란민과 잔류민이었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을 때, 이승만은 잔류민들에게 피란시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잔류민들을 인민군에 부역한 '빨갱이'들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검속에 나섰다.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그는 민주국가의 지도자답게 민중을 보호하고 사회를 통합하면서 국가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길은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버려둔 잔류민들을 오히려 '빨갱이'라는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배제하면서 정체성을 만들어나갔다.

3장 <점령>의 분석 초점은 전쟁기 북한의 점령정책이다. 북한의 권력집단은 해방/점령 시기 혁명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민주개혁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러나 반대세력을 포용하면서 민주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은 택하지 않았다. 북한은 국가를 건설하면서 불가피하게 소련식 모델인 국가사회주의체제('일상화된 스탈린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체제는 사회정의를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자유와 인권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도외시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점령과정에서 북한은 비록 선의를 가지고 민주개혁을 추진했지만, 혁명과 전쟁이 뒤엉킨 혼란스런 상황에서 그 선의는 거의 드러나지 못했다. 인민군은 나름대로 규율을 지키며 지역을 통치했지만, 통치의 체계인 국가사회주의적 방식(인민재판, 농지개혁 등)은 다급한 전쟁 상황에서 더욱 억압적으로 관철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은 급속한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파괴했지만,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에는 통치력이 닿지 않았다. 민중은 자유가 억압되고 질서가 파괴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에 빌붙은 일부 기회주의자들의 득세는 위축된 민중을 더욱 고통스럽게 괴롭혔다.

4장 <학살>은 남북 권력집단을 동시에 분석 초점으로 삼는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보는 정치사회학적 관점(클라우제비츠의 논의 등)에 의한다면 적대세력을 모조리 섬멸할 필요는 없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전쟁과 혁명이 결합된 내전이 전개되면서 반대파를 살려두지 않는 방향으로 흘렀다. 서로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증오는 이미 전면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커지고 있었다. 북한 권력집단은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자신들을 죽이려고 안달이 났었던 악질 친일파들이 남한 국가의 권력을 잡은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이승만을 비롯하여 친일파가 주축을 이룬 남한 권력집단은 정부 수립 후에도 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민중은 친일경찰의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도처에서 저항했고, 북한은 38선 근처에서 군사적 도발을 걸어왔다.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반공주의를 동원하며 '빨갱이'라는 내부의 적을 만들기에 부심했다. 전선이 톱질하듯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긴박한 전세 속에서 남북의 권력집단은 갖가지 방법으로써 많은 민중을 부역자라고 간주하고 학살했다. 특히 민중 전체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는 '컴플렉스'는 이승만이 더욱 심했다. 전쟁 초기에 이승만은 국민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는데, 이때의 희생자 수만 해도 최소 20만 명에 달했다.

저자는 전쟁 중에 벌어진 이같은 참혹한 일들이 전후에 구조적으로 정착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구조를 '피난의 정치', '희생양의 정치', '무책임의 정치', '부역자 처벌의 정치', '학살의 정치' 등으로 다양하게 개념화한다. 이러한 구조들로 인해 현재 한국사회의 권력집단은 반대파를 툭하면 '빨갱이'로 몰며 존재 자체를 제거해버리려 하고,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치는커녕 공익을 도외시하고 오직 사익만을 추구하는 정치 행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한국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이러한 반동들이 한국전쟁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결론에서 저자는 한국사회가 전쟁으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를 이루어나가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을 국가의 관점이 아닌 민족의 관점, 더 나아가 인권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밝힌다.

따라서 공식 해석에 대한 비판인 이 책에서는 전쟁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이 '적'을 섬멸한다는 명분 하에 남북한 주민들에게 어떠한 일들을 하였는지, 피란 과정에서 '국가' 그 자체였던 이승만은 국민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는지 조명함으로써, 그동안 무시되고 억압받아 온 사실들과 기억들을 되살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공식화되지 않은 기억들, 곧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피학살 민간인과 불의의 죽음을 당한 말단 병사들, 전쟁 와중에서 다치고 상처받고 재산과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그들의 '상처받은 몸'을 통해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새롭게 조명하려 하였다. 그것은 곧 국가의 관점이 아닌 민족의 관점, 더 나아가 인권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조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386~387쪽)

보론 - 용어 문제

이 글에서는 '6.25' 대신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전쟁과 사회>에서도 그러하다. 전자는 전쟁 발발의 시점을 강조한 용어이고, 후자는 전쟁이 벌어진 지역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적 맥락은 복잡하다. '6.25'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전쟁을 바라보는 전통주의적(반공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용어에는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기습남침하면서 발생했다는 평가가 담겨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 살폈듯이 전쟁은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6.25는 그 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한 날짜이다. 전쟁을 총체적으로 고찰하기에는 불충분한 용어이기 때문에 채택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용어 역시 불만이 있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전쟁을 바라본 용어이기 때문이다. 주로 미국 학계에서 쓰는 'the Korean War'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긴 경우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어디 한둘인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고찰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현실에서 다른 적당한 용어를 금방 만들기는 어렵다. 다만 반공주의적 시각은 하루빨리 탈피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학계에서는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이 글에서도 그런 관점에 입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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