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일반인의 상식과 역사학의 현실이 어긋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근현대 '정치사' 연구의 현황이다. 한국사람들이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한국사 연구자들도 당연히 정치에 관심이 많으며 정치사 연구 역시 많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으레 생각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한국 정치사, 특히 근현대 정치사는 그러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할 만큼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국 근현대 정치사 연구는 일단 시작부터가 늦은 편이었다. 동학농민운동/전쟁에 관한 연구가 단속적으로나마 시작된 시기가 1960년대 중반이었다. 1969년 동아일보에서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을 펴내면서 근현대 정치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동학농민운동/전쟁, 애국계몽운동,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근대 정치사(독립운동사)에 속하는 주제들이 조금씩 연구되기 시작했다.

정치사 연구는 전반적인 주제를 다양하게 다루기보다는, 그때 그때의 유행에 따라 특정 분야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온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에는 주로 3.1운동이나 임시정부와 같은 우익 계열 독립운동을 주로 연구했다. 개항기에서는 동학과 애국계몽운동(독립협회 같은)을 주로 다루었다. 당시 한창 바람이 불던 '식민사관 청산, 민족주의 역사학 수립' 열풍에 영향을 받은 연구경향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항기-일제강점기 정치사에서 '반외세(항일) 반봉건 민족주의 운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려 한 것은 당연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정치사 학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변혁이론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급진 성향의 소장 연구자들이 성장하면서 정치사 연구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들은 근대 정치사에서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공산주의운동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조선공산당 운동이나 적색 농민, 노동운동, 국외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운동 등이 주된 테마였다. 한편 일군의 연구자들이 해방 이후 미군정기 정치사 관련 연구를 시작하면서, 현대 정치사 연구가 비로소 문을 열었다. 반미주의 열풍 속에서 연구자들은 '과연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게 되었고, 자연스레 해방 직후 미군정기 정치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을 만든 소장연구자들이 1990년대까지 활발히 활동하면서, 정치사 연구에 관한 주요 저작들이 90년대에 많이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사 연구 열풍은 90년대 들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오히려 기피 경향까지 생겨났다. 정치사는 복잡하고 지루하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인기를 잃어가는 반면, 기존의 역사인식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다루려는 사회사나 문화사 영역의 연구들이 조명받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식민지수탈론-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근현대 경제사 연구도 불붙기 시작했다.

현재 근현대 정치사 연구는 과거에 비해 그 활력이 상당히 줄었고, 조금 심하게 말한다면 찬밥 신세의 '비인기 종목'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정치사 연구 유행이 후퇴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치사 연구를 관통하는 거시적인 문제의식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 등장한 이른바 '식민지 회색지대' 문제제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근현대 정치사 연구를 지배했던 '반외세 반봉건, 친일-항일, 민족-반민족, 좌-우'라는 도식 구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구도를 보완하거나 넘어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있지만, 명확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암중모색, 각개약진 중인 것 같다. 어쩌면 과거처럼 어느 하나의 뚜렷한 구도를 지닌 사관이 학계를 풍미하는 시절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튼 수없이 등장하는 인물들과 조직들의 이름들을 외우고, 그들 간의 계보를 만들고, 그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사건들을 일일이 분석하는 복잡하고 지루한 작업을 견디게 할 만큼의 열정적인 문제의식을 역사학도들에게 던져줄 수 있다면, 한국 근현대 정치사는 다시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최근 역사비평사에서 펴낸 '20세기 한국사' 시리즈 중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근현대 정치사 연구에 관해 생각해보았고, 그 단상을 글로 적어보았다.

개항기, 대한제국기 정치사는 개항(근대화)-쇄국(봉건), 친일(민족)-항일(반민족) 구도가 뒤섞인 가운데 연구되어 왔다. 명확한 대립구도의 설정은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한국사상을 선명하게 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당대의 정국에서 드러났던 복잡한 면들을 세밀하게 바라보기 힘들게 하는 약점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제가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활동했던 주요 정치단체 중에 대한협회와 일진회가 있었다. 이 두 단체는 모두 독립협회를 뿌리로 하여 만들어져 근대적 의회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지향하는 강령을 가졌고, 통감부 체제 하에서 황제권을 제한하고 의회를 축으로 한 '내정자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대립 구도 하에서는 대한협회는 '애국계몽운동'을 벌인 애국적 민족주의 단체이고, 일진회는 나라를 팔아먹은 천하의 나쁜 놈이다. 이렇게 평가가 갈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병합 전야에 일진회가 공개적으로 '합방 청원'을 한 반면, 대한협회는 거기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별 다른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단순히 이것만으로 그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평가를 내려도 좋은 일일까? 이것이 당대 역사상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최선의 방법인가?

기존의 역사인식을 재검토하며 개항기/대한제국기 정치사를 모색하는 시도들이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학계에서 '대한제국의 성격'을 둘러싸고 적잖은 논쟁이 벌어진 바도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대한제국 정치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여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대중교양서이다.

이 책은 크게 보아 두 가지 테마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러일전쟁~병합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침탈 전략과 그 실행 과정이고, 또 하나는 조선 내부 각 정치세력의 대응 양상이다. 여기서 저자가 공력을 기울인 부분은 후자이다. 위에서 조금 썼지만, 병합 전야의 정국에서 조선 정치세력들은 단순히 친일-항일로 양분될 수 없는 복잡한 대응을 보여주었다. 흔히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고 알려진 이들과 친일로 나아갔다는 이들 사이에 구분선이 그렇게 명확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조선 지식인들의 '근대 인식'이 병합 전야의 정국에서 어떻게 굴절되어 나가는지의 문제도 중요한 관심거리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최대한 쉽게 대중적으로 풀어내었다.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충실히 풀어낸 역사서술로서는 손색이 없다. 그 이상의 총체적인 역사해석을 바란다면, 책 말미의 참고문헌에 적힌 2005년 이후의 연구 성과들을 스스로 뒤적여 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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