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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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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바는, 새삼스러울 수 있지만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즐거움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조선시대를 다루었으므로, 한국사 중에서도 조선시대를 공부하는 즐거움을 유감없이 표현한 책인 셈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납세제도인 대동법이 100여 년간에 걸쳐 기획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크게 활약한 4명의 경세가들의 삶을 다루었다. 각 인물의 생애사를 뒤돌아보며 그것이 대동법, 즉 민생을 살리기 위한 제도적 실천과 어떻게 접목되는지 살펴보았다.

 

대동법은 처음 입안된 후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100년이란 시간을 거쳐야 했다. 100. 이 시간이 갖는 무게가 과연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은 2013년 현재 건국 65주년이다. 불과 세 세대 남짓한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최고 법인 헌법만 보아도 9차례나 개정되었다. 물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회변화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대동법처럼 긴 역사적 성숙을 거쳐 수백 년을 지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는가?

 

이 책은 우리 한국인들이 민생을 위하는 세심하면서도 강인한 제도를 만들었던 자랑스러운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흔히 말하지만 조선은 500여 년을 지속한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장수 왕조국가였다. 조선시대를 시기구분할 때 1592년 임진왜란을 분기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데, 사실 어떻게 보면 조선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너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에 개입했던 중국과 일본은 직접 전쟁이 발발한 곳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부담으로 인해 지배세력이 교체되었다. 하지만 막상 전국이 전장으로 불탔던 조선은 체제를 보수하여 왕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의 재배세력, 즉 양반 사대부 계층이 전쟁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민심을 수습하고 사회를 안정시켜 국가체제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대동법과 같은 긴 역사적 성숙을 통해 확립된 민생을 위하는 합리적인 제도들 덕분이었다. 이 책은 지금을 사는 우리 한국인들도 본받을 만한 훌륭한 삶의 지표를 보여주는 4명의 인물이 자신과 사회의 행복을 위해 좋은 제도를 고민해나가는 과정을 잘 드러내준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대중에게 이 책은 우리 한국인들의 훌륭한 역사적 전통을 알려주는 재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최근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장관 등 관료 인선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작금의 상황을 걱정한다면, 이 책을 통해 우리 역사에 등장했던 훌륭한 학자관료들의 삶을 접하고 현실도피?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이며 최고 주권자가 바로 우리 스스로임을 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제도라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할지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역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은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전공을 불문하고 조선 정치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되었다. 어려운 조선 정치사를 누구라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역사 연구자들은 한 번쯤 이 책을 보고 대중적 역사글쓰기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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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후지이 다케시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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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학계에서 오랜만에 무게감 있는 정치사 연구서가 나왔다.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고 한국사를 더 잘 아는 일본인 학자 후지이 다케시의 박사학위논문이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위엄은 참고문헌만 살펴보아도 확연히 드러난다. 현대정치사연구에서 보통 활용되는 한국어, 영어(미국) 사료는 물론이고 중국어와 일본어 사료까지 섭렵했다. 활용한 연구 성과 역시 그러하다. 풍부한 자료의 활용을 통해 질 좋은 연구가 나왔다. 저자가 이 연구를 완성하는 데 들인 공력이 상당하니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가짐 또한 자못 진지해진다.

저자가 다양한 국가의 사료를 섭렵한 것의 진가는 족청계라는 정치세력의 이념적 기반(정치사상)이 형성되는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는 데에서 한껏 드러난다. 저자는 족청계라는 정치세력의 부침을 통하여 한국민족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구명하고자 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한국민족주의의 성격을 둘러싸고 상반된 시각이 충돌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탈근대주의적 시각에서는 민족주의를 상상의 공동체라 호명하며 민족주의가 배제와 억압의 기제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민족주의가 민주화운동 및 평화통일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왔다는 역사적 배경을 강조하며 여전히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해 필요한 이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민족주의와 관련한 뜬구름 잡는 논쟁들을 보며 피로감을 느낀 적이 있는 독자라면, 또는 과연 한국민족주의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세계사적 고민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어떠한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한국민족주의의 전개 양상뿐 아니라 그 기원중 하나를 명확히 보여주는 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한국민족주의를 둘러싼 커다란 의문 하나를 해소해준 것이다. 한국민족주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좋은 정치사 연구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정치세력의 활동과 그 의미를 따져보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세력의 이념적 기반(정치사상)과 정치활동을 함께 분석함으로써 한국사의 전개에서 해당 정치세력의 존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했다. 한국현대사에 관심 있는 학생이라면, 나아가 현대사 연구에 뜻을 둔 학생이라면 반드시 소장하고 자주 펼쳐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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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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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 이야기라는 소설이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후 조선에 살던 저자의 가족들이 조선을 떠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핍박하는 에피소드가 담겨 있어서 커다란 논란이 일었다. 일본이 오랜 시간 동안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각종 탄압을 일삼았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학교들이 이 책을 교재로 채택하기 시작하자 재미 한인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전개되어 한국사회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초등학교들이 다시 이 책을 교재로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우려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4857294 (관련 기사 링크, 뉴시스 2012-12-02)

 

나는 이 책을 직접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이 과연 얼마나 심각하게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점은 패전 후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혹은 미군이나 소련군에게 각종 핍박을 받았던 사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요코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인 북한 지역에 체류했던 일본인들은 남한 지역의 일본인들에 비해 더욱 큰 수난을 겪었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뜻으로 요코 이야기가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과도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재일조선인의 한국 귀환, 재조선일본인의 일본 귀환 문제를 다뤄온 저자가 이번에 펴낸 조선을 떠나며는 이러한 민감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대중서이다. 이 책에는 패전 후 재조선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던 여러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들, 그리고 조선인들이나 일본인들이 겪었던 각종 경험들을 매우 상세하게 풀어냈다. 이 책은 본격 연구서가 아닌 이른바 역사 논픽션을 표방하는데, 당시 조선인들과 일본인이 겪었던 체험들에 주목하며 당대의 역사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그려진 수많은 인물들의 언행을 따라가다 보면 흡사 역사연구서를 읽기보다는 한 편의 이야기 모음집을 읽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역사 논픽션이라고 이름붙인 것 같다.

 

이 책에는 패전 직후 조선총독부의 동향, 재조선일본인의 귀환 문제로 인해 불거진 조선의 경제위기와 조선인들이 겪은 경제적 곤란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민감한 이야기는 역시 위의 요코 이야기와 같은 부류라 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귀환 과정에서 겪은 각종 고생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현재 한국 대중에게는 매우 생소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재조선일본인들의 고생담을 접하면서 다양한 감상이 생길 수 있다. 어떤 이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일본인들의 고통을 접하며 국가의 무능과 무관심으로 인해 민중이 크나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을 것이다. 특히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일본인 여성들의 피해와 고통을 보면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이 책 곳곳에서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식민지배의 대가와 패전의 부담을 가장 무겁게 짊어졌던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반면 어떤 이는 요코 이야기를 비난하는 심성과 같이 일본인들은 당해도 싸다는 감상을 가지면서 쉽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에 살면서 식민지배에 일조한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패전 후에는 그러한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과 가족의 안위에만 골몰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군상들 역시 가감 없이 자세히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다양한 감상이 들 수 있지만, 일단 저자의 바람은 이 책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존재하는 가해와 피해의 기억의 단절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결코 풀기 어려운 역사적 기억의 문제이기에, 저자는 이 책에서 어떤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한국사회는 차분하게 식민지배가 한국인들과 일본인에게 미친 역사적 영향을 뒤돌아볼 여유가 별로 없다. 가해의 책임을 진 일본정부가 사과하려 하지 않는 마당에 먼저 용서하겠다는 나설 이유도, 여유도 없는 것이다. 최근 신내각을 출범시킨 아베 신조 총리는 오히려 가해 책임을 조금이라도 인정한 기존의 정부 공식 입장을 후퇴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일 간에 복잡하게 뒤얽힌 역사청산 문제를 차분히 고민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읽어보면서 생각을 가다듬어 보는 것도 좋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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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에 묻히다 -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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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였던 백범 김구 선생은 말년에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구 선생이 한민족의 평화통일운동을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암살당하기 2주일여 전인 1949615일 한국독립당(김구가 이끌던 정당)이 발표한 선언문에서는 이러한 3세계 민족주의의 이념이 담겨있다. 좀 길지만 관련 부분을 인용해본다.

 

(전략) 동아시아, 인도네시아, 발칸 등지에서는 민족자결을 위한 강렬한 반제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중략) 이상과 같은 국제적 환경은 우리 조국에도 그대로 축소 반영되고 있다. 국토의 양단은 경제의 파탄과 동족상잔을 초래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케 하고 있으며,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발호와 봉건세력의 잔존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자유 발전을 방해하고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억압과 침략을 위한 어떠한 기도도 결사반대할 것이며, 전세계 평화를 애호하는 인민과 더불어 영구한 세계 평화의 확보를 위하여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 제 약소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자결권을 유린하려는 낡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정책을 배격하고, 당면한 역사적 과업의 최고 목표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최대의 열의를 경주하며 투쟁할 것이다. (후략) (도진순, <백범어록>, 돌베개, 387~388)

 

이 책에는 김구를 비롯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말로 외쳤던 전세계 약소 민족들과의 반제국주의 연대 투쟁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했던 머나먼 적도 땅의 조선인들이 등장한다. 억지로 일본군 군무원이 되어 인도네시아까지 왔던 조선인 청년들이 있었고,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에 시달리며 일본군을 따라온 조선인 위안부들도 있었다. 이 책은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하다가 다양한 운명을 맞이한 적도 땅 조선인들의 기록이다. 일본군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미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숨진 이들도 있고, 끝내 독립을 맞이했지만 새로운 제국주의 군대인 네덜란드군에 붙잡혀 일본군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전범으로 판정받아 처형된 이들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투신하여 인도네시아 민중과 함께 반제국주의 무장 투쟁에 참가했던 이들도 있다.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들의 시선으로는 남북 평화통일을 이야기하며 제3세계 민족운동에 주목했던 김구나 실제 이국땅에서 이민족의 해방투쟁에 헌신했던 이 책 주인공들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울 듯도 싶다. 지금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방 선진국들만 선망의 대상이었지, 이들 3세계국가들은 한마디로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한류가 이슈가 되기 전까지는 TV카메라가 이들 제3세계 국가들을 비춘 적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60~70년 전의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의 눈에는 미국, 소련, 유럽 선진국들과 협력하는 것보다 반제운동으로 들고 일어나는 제3세계 민중과 연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친미를 넘어 종미로 치달았던 군사독재정권의 기나긴 시절을 거치는 동안 우리가 망각했던 역사 기억이다.

 

우리가 망각했던 기억을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어느 양심적인 일본인의 도움으로 다시 끄집어낸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더욱 부끄러워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고 적도에 묻힌그들의 삶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 책의 큰 미덕은 이처럼 진지하고 엄숙한 역사적 기억을 마치 한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를 접하는 것과 같이 유려한 서사로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지난 여름휴가 동안 이 책을 접했다면 더욱 보람 있는 휴가가 되었을 것인데 조금 아쉽다. 끝나가는 여름을 무언가 보람 있는 기억으로 마무리짓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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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 - 서울 토박이와 민통선 사람들, 전쟁미망인과 월북가족, 그들이 말하는 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
한국구술사학회 엮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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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사(oral history)는 우리에게 생소한 역사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익숙한 역사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우리는 대부분 문헌기록을 토대로 한 역사서술을 접할 뿐이고 본격적인 구술사 연구는 찾기 어렵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밥상머리에서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옛날이야기'를 흔히 듣곤 한다.

구술사에 등장하는 구술자들의 이야기와 우리가 밥상머리에서 듣는 어르신들의 옛날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면담자일 뿐이다. 충분한 지식과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질문하는 연구자와 그냥 재미로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입장이 다를 뿐이다. 구술사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야기를 듣느냐이다. 구술사는 구술자와 면담자가 함께 쓰는 역사인 것이다.

구술자와 면담자(역사학자)가 구술사를 '함께 쓴다"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은 함의를 지닌다. 보통 역사학에서 사료는 '객체'이다. '주체'인 역사가가 사료들을 독해하고 분석하여 역사상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구술사에서 구술자는 '객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구술사의 본령이 바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거듭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구성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술사에서 역사가와 구술자는 '주체 대 객체'가 아닌 '주체 대 주체'의 평등한 입장에서 만나야 한다.

역사가와 '사료'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다르기에, 기존의 문헌 중심 역사 연구와 구술사 연구는 연구방법론과 글쓰기방법론이 모두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구술자료를 생산하고 분석할 것이며, 어떻게 글로 옮겨야 하는가? 사료비판 방법과 글쓰기 전략 등 역사 연구의 기초부터가 모두 다른 탓에 구술사 연구는 결코 녹록치 않다. 모두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한다.

구술 기록을 모은 자료집이나, 구술 기록을 부분적으로 활용한 연구서는 많은 편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구술사 연구방법론을 활용한 연구는 그리 흔하지 않다. 구술사 연구를 쉽게 풀어놓은 대중교양서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연구서조차 손에 꼽을 정도이다. 내가 본 책 중에 박사학위논문을 출판한 것으로는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윤택림, 역사비평사, 2004)와 <월남민의 생활 경험과 정체성 - 밑으로부터의 월남민 연구>(김귀옥, 서울대출판부, 2000),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이임하, 책과함께, 2010)가 있고, 연구논문모음집으로는 <전쟁의 기억, 냉전의 구술>(김귀옥 외, 선인, 2008)과 이 책이 있다. (내가 구술사 전공자가 아니라 모든 연구서를 꼽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이 책들이 주요한 연구서들임은 분명하다.)

위에 언급한 책들이 모두 중요한 연구들인데, 굳이 이 책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구술사 연구자들이 모여 한국구술사학회를 창립한 후 처음으로 출판한 논문모음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모로 현재 한국구술사 연구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내가 앞서 구술사에 관해 설명한 바를 잘 이해하고 있는 역사학 전공자에게, 이 책은 기대치를 충족하기엔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연구 소재가 다양하여 참고가 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기존의 거시사 중심, 문헌 중심 역사서술을 뒤집는 파격은 찾아보기 힘들다. 논문에서 등장하는 구술자들의 목소리는 생생하지만, 그 신선함은 기존 역사서술의 틈을 깨기보다는 메워주는 느낌이 강하다. 혹은 기존의 역사서술과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 어긋남의 방향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해주지 못한다.

이 책에서 완벽한 구술사 연구방법론과 글쓰기를 소개하지 못한 책임을 저자들에게 돌릴 수는 없다. 누구보다도 저자들 자신이 아쉬움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구술사 연구는 철저히 비주류에 속한다. 구술사 연구를 위해서는 충분한 비용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여느 문헌 사료들보다 수집과 정리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술사 연구 지원 체계는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악전고투하며 구술사를 알려온 소수 연구자들의 덕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이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동안 구술사 연구의 고민이 어떠했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연구 성과로서는 충분하다 할 수 있다.

구술사에 생소한 학생이나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이 책은 괜찮은 입문서가 될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민중이 겪어야 했던 피란, 학살, 전투, 일상의 경험들을 생생히 전하면서, 한 개인이 어떻게 역사와 만나는지에 관한 일면을 보여준다. 앞서 비판한대로 민중을 기존의 전쟁사 서술과는 완벽히 다른 역사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지만, 기존의 서술에서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던 민중의 경험이 전쟁의 전체 국면과 엮이는 모습을 소상히 알려준다.

구술 기록을 주로 활용하면서도 기본적인 사실(史實) 해설을 빼놓지 않은 점은 이 책의 큰 미덕이다. 한국전쟁사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주변 어르신들의 '옛날이야기'를 더욱 소상히 이해하며 실감나게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안내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구술자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이다.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등 주변 어르신들에게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한 번 청해보자. 비단 한국전쟁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 옛날이야기들은 분명 예전과는 달리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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