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 - 서울 토박이와 민통선 사람들, 전쟁미망인과 월북가족, 그들이 말하는 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
한국구술사학회 엮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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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사(oral history)는 우리에게 생소한 역사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익숙한 역사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우리는 대부분 문헌기록을 토대로 한 역사서술을 접할 뿐이고 본격적인 구술사 연구는 찾기 어렵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밥상머리에서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옛날이야기'를 흔히 듣곤 한다.

구술사에 등장하는 구술자들의 이야기와 우리가 밥상머리에서 듣는 어르신들의 옛날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면담자일 뿐이다. 충분한 지식과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질문하는 연구자와 그냥 재미로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입장이 다를 뿐이다. 구술사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야기를 듣느냐이다. 구술사는 구술자와 면담자가 함께 쓰는 역사인 것이다.

구술자와 면담자(역사학자)가 구술사를 '함께 쓴다"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은 함의를 지닌다. 보통 역사학에서 사료는 '객체'이다. '주체'인 역사가가 사료들을 독해하고 분석하여 역사상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구술사에서 구술자는 '객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구술사의 본령이 바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거듭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구성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술사에서 역사가와 구술자는 '주체 대 객체'가 아닌 '주체 대 주체'의 평등한 입장에서 만나야 한다.

역사가와 '사료'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다르기에, 기존의 문헌 중심 역사 연구와 구술사 연구는 연구방법론과 글쓰기방법론이 모두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구술자료를 생산하고 분석할 것이며, 어떻게 글로 옮겨야 하는가? 사료비판 방법과 글쓰기 전략 등 역사 연구의 기초부터가 모두 다른 탓에 구술사 연구는 결코 녹록치 않다. 모두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한다.

구술 기록을 모은 자료집이나, 구술 기록을 부분적으로 활용한 연구서는 많은 편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구술사 연구방법론을 활용한 연구는 그리 흔하지 않다. 구술사 연구를 쉽게 풀어놓은 대중교양서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연구서조차 손에 꼽을 정도이다. 내가 본 책 중에 박사학위논문을 출판한 것으로는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윤택림, 역사비평사, 2004)와 <월남민의 생활 경험과 정체성 - 밑으로부터의 월남민 연구>(김귀옥, 서울대출판부, 2000),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이임하, 책과함께, 2010)가 있고, 연구논문모음집으로는 <전쟁의 기억, 냉전의 구술>(김귀옥 외, 선인, 2008)과 이 책이 있다. (내가 구술사 전공자가 아니라 모든 연구서를 꼽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이 책들이 주요한 연구서들임은 분명하다.)

위에 언급한 책들이 모두 중요한 연구들인데, 굳이 이 책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구술사 연구자들이 모여 한국구술사학회를 창립한 후 처음으로 출판한 논문모음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모로 현재 한국구술사 연구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내가 앞서 구술사에 관해 설명한 바를 잘 이해하고 있는 역사학 전공자에게, 이 책은 기대치를 충족하기엔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연구 소재가 다양하여 참고가 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기존의 거시사 중심, 문헌 중심 역사서술을 뒤집는 파격은 찾아보기 힘들다. 논문에서 등장하는 구술자들의 목소리는 생생하지만, 그 신선함은 기존 역사서술의 틈을 깨기보다는 메워주는 느낌이 강하다. 혹은 기존의 역사서술과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 어긋남의 방향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해주지 못한다.

이 책에서 완벽한 구술사 연구방법론과 글쓰기를 소개하지 못한 책임을 저자들에게 돌릴 수는 없다. 누구보다도 저자들 자신이 아쉬움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구술사 연구는 철저히 비주류에 속한다. 구술사 연구를 위해서는 충분한 비용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여느 문헌 사료들보다 수집과 정리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술사 연구 지원 체계는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악전고투하며 구술사를 알려온 소수 연구자들의 덕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이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동안 구술사 연구의 고민이 어떠했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연구 성과로서는 충분하다 할 수 있다.

구술사에 생소한 학생이나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이 책은 괜찮은 입문서가 될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민중이 겪어야 했던 피란, 학살, 전투, 일상의 경험들을 생생히 전하면서, 한 개인이 어떻게 역사와 만나는지에 관한 일면을 보여준다. 앞서 비판한대로 민중을 기존의 전쟁사 서술과는 완벽히 다른 역사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지만, 기존의 서술에서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던 민중의 경험이 전쟁의 전체 국면과 엮이는 모습을 소상히 알려준다.

구술 기록을 주로 활용하면서도 기본적인 사실(史實) 해설을 빼놓지 않은 점은 이 책의 큰 미덕이다. 한국전쟁사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주변 어르신들의 '옛날이야기'를 더욱 소상히 이해하며 실감나게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안내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구술자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이다.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등 주변 어르신들에게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한 번 청해보자. 비단 한국전쟁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 옛날이야기들은 분명 예전과는 달리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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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 세트 - 전2권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이종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역사비평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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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한 역사를 다룬 질 좋은 교양서적이 오랜만에 출판되었다. 북한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학문이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북한사 대중교양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국현대사의 여러 부문이 대개 그러하지만, 북한사 연구 역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북한의 역사를 학문적 견지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건이 민주화 이후에야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 시기에 북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반공주의 편향이 워낙 심했던 탓에 수준 높은 연구가 드물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소장 연구자들이 북한사 연구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존에 나온 북한사 교양서 중 볼만한 것으로는 <북한 50년사>(임영태, 들녘, 1999),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김성보, 기광서, 이신철 공저, 웅진닷컴, 2004),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정창현, 선인, 2011) 정도라고 보인다. 이중 마지막 것은 북한사의 주요 인물들을 위주로 다룬 책이라 재미는 있지만 형식상 본격적인 북한사 개설이라 보기는 힘들다. 두번째 책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강점이 있고 이미지가 풍부하여 독자의 흥미를 돋울 수 장점도 있으나, 아무래도 책 한 권이다보니 개설 치고는 서술 내용이 소략한 감이 있다. 첫번째 책이 그나마 두 권 분량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북한사를 개설하고 있지만, 북한사 흐름을 보는 시각이 다소 분석적이지 못하고 평면적인 감이 있다. 더욱이 출판된지 10년이 넘었기 때문에 2000년대 나온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이번에 나온 <북한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장점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번째는 북한에 관한 기초적인 사실(史實)들을 빠짐없이 알려주는 요긴한 북한사 개설서라는 점이다. 북한사 연구를 읽다보면 생소한 인명과 지명, 조직명 등이 많이 등장하여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이지만, 이 책은 그런 측면을 고려하여 되도록 읽기 쉽게 깔끔하고 명료한 문장을 구사했다. 대중이 접하기 쉽도록 글쓰기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인다.

두번째 장점은 최근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여 북한사의 흐름을 분석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북한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평면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변화의 배경과 원인, 그 결과를 따져가며 분석적으로 썼기 때문에 수준 높은 개설서가 되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북한 체제가 어떻게 성립하여 어떻게 변화해갔으며 어떻게 지금의 침체 상태로 빠지게 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전 두 권으로 1권은 역사학 전공자인 김성보가, 2권은 정치학 전공자인 이종석이 집필했다. 각 권의 집필자는 다르지만, 책의 북한사 서술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동일하다. 현재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는 왜 헤어나기 힘든 침체에 빠지게 되었는가? 이 책은 북한의 역사를 살펴보며 그 배경과 원인을 추적한다. 저자들의 결론은 '다양성과 역동성의 상실'이다.

북한은 처음부터 김일성 개인숭배로 점철된 유일체제로 출발하지는 않았다. 북한은 분단 이후 1950년대까지는 사회주의 이념을 기본으로 하되 국가 발전 전략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이는 세력들이 통일전선을 형성한 '인민민주주의 체제'였다. 그러나 체제 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을 위시한 항일유격대 계열이 승리했고, 그들은 반대세력들과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고 모두 숙청해버렸다. 그리하여 점차 김일성 유일체제가 형성되어갔다. 김성보가 집필한 1권에서는 1945~1960년 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인민민주주의 체제의 성립과 전개, 종말을 다루었다. 1권은 특히 2000년대 나온 역사학계, 정치학계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여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의 초기 역사를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개념화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들 연구 성과 덕분이다.

2권에는 이종석이 1960~1994년 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유일체제의 성립과 전개 과정을 다루었다. 저자는 북한 역사의 흐름에서 주체사상이 가지는 의미에 주목했다. 주체사상 역시 처음부터 개인숭배사상 일변도는 아니었다. 1960년대 내외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여 북한 고유의 사회주의적 국가 발전 전략으로 제기된 것이었고, 나름의 합리성과 역동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유일체제의 고착화와 함께 주체사상 역시 변용을 겪게 된다.

이렇듯 저자들은 북한 체제가 초기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잃고 경직된 유일체제가 되어가는 과정을 분석적으로 살펴보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북한 역사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북한이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관하여 혜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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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 왕의 공부
김태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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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남녀 주인공은 강론 자리에서 처음 만난다. 둘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가문 간에 혼담이 진행된다. 남주인공은 성균관 직강으로서 종학(당시 종친교육기관)에서 공주를 가르치는 직무를 맡는다. 여주인공은 약혼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친밀한 사이인 공주에게 부탁하여 대신 강론에 들어간다. 평소 짓궂은 장난으로 강관들을 괴롭히곤 했던 공주를 손봐주려고 하는 남주인공이나, 약혼자를 알기 위해 몰래 강론에 임한 여주인공이나 강론은 뒷전이고 치열한 눈치작전만 벌인다. 엄숙하기만 할 것 같은 구중궁궐에서, 그것도 진지해야 할 강론장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자잘한 밀당싸움이 시청자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조선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덕치(德治)’를 추구한 나라였다. 즉 법에 의한 통치보다는 도리와 예절에 의한 통치를 추구한 나라였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덕치가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가장 높은 신분이었던 왕(그리고 왕족들)이 충실한 덕성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왕이 제대로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왕과 신하들 간의 적절한 균형과 견제로 운영되었던 조선의 정치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왕이 통치를 위한 덕성을 잘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하는 제도가 중시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경연이었다. 공주나 대군 같은 왕족들의 교육은 위에서 말한 에피소드처럼 가볍게 진행되어도 큰 탈은 없었겠지만, 왕을 대상으로 한 경연이나 세자를 대상으로 한 서연은 중요한 정치 문제를 논의하곤 했던 진지한 토론장이었다.

 

이 책은 한마디로 경연 백과사전이다. 조선시대의 경연 제도에 관한 사실들을 충실히 설명하고, 경연이 어떤 역할을 하는 자리였는지 풍부한 사례를 들어 차근차근 풀어주었다. 1<경연과 왕의 하루>2<경연에 관한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3<경연의 기록, 그 숭고한 작업>에서는 고봉 기대승의 <논사록>과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를 소개하며, 경연의 실제를 보여준다.

 

이 책이 경연에 관한 백과사전이라고 해서 객관적인 딱딱한 사실들만 죽 나열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저자는 경연을 통해 드러나는 조선의 정치문화와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문화를 적극적으로 비교하여 논평하곤 한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최근 대통령들의 말실수들을 지적하며 민주사회에서도 정치지도자의 품격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 본론에서 경연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조선시대의 왕과 학자관료들이 보여주었던 품격의 좋은 예들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는, 조선시대의 경연은 적어도 정치문화의 측면에서는 민주사회를 사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을 만한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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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이라는 스캔들
나이토 치즈코 지음, 고영란 외 옮김 / 역사비평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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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다 보면 잠시 바쁜 눈길과 손놀림을 멈추고 쉬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무엇을 하나? 보통은 머리를 쓰지 않는 다른 취미를 즐기면서 공부와 관련한 생각을 멈추고 뇌를 쉬게 한다. 혹은 다른 방법도 있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나 자주 접하지 못했던 주제를 가벼운 기분으로 공부하고 경험해보며 자신의 평소 공부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나처럼 공부를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의 '휴식'이 때로 더 나은 경우가 있다. 비록 '귀차니즘' 때문에 자주 시도하지는 못하는 방법이지만 말이다.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여름 장마 기간 동안, 일과 공부로 바쁜 와중에 왠일인지 귀차니즘을 뚫고 낮선 주제의 책을 읽었다. 아마도 선정적인 책 제목에 현혹당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진지한 역사 연구서를 주로 출판하는 곳에서 제목만 보고는 내용을 짐작하기 힘든, 그러나 왠지 재미있을 것만 같은 책을 한 권 냈다. 언뜻 살펴보니 역사서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연구 서술이었고, 다룬 시공간도 근대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었다. 현대 한국의 역사서술을 공부하는 내게는 주제와 시공간의 측면에서 여러 모로 기분 전환이 될 수 있는 책이었다. 게다가 마침 장마와 무더위로 늘어질 수밖에 없는 휴식 기간 아닌가? 나와 이 책의 만남은 때를 잘 맞춘 만남이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메이지 시대 일본(1868~1912)의 '미디어 공동체'가 갖은 '소식'들을 '제국'과 '남성'의 시선으로 '스테레오타입'화 시켜가는 과정을 젠더의 시각으로 분석한 책이다. 젠더의 시각에 입각한 문화연구는 1990년대 이래 학계 일각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대중에게는 낯선 분야이다. 나 역시 문화연구와 젠더 시각에 생소한 편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복잡한 함의를 가진 용어들과 낯선 서술 방식에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역사서술에서 흔히 활용하는 언론 기사들을 가지고 단편적인 정보들을 엮어가며, 당시 미디어들이 만들어내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복원해나가는 저자의 글솜씨는 대단히 매력적이다.(번역의 질이 괜찮다는 뜻도 된다.) 낯선 용어와 묘사 때문에 독서 진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만든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신문이나 잡지 같은 미디어가 대중화해가던 시기였다. 미디어 대중화의 시대에서 등장한 '미디어 공동체'는, '근대 문명=제국=남성=천황제'를 지고의 가치로 설정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스스로 성립할 수는 없었고, 반대되는 '타자'를 계속 배제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었다. 그 타자란 바로 '전근대적 야만=식민지=여성=진보적 이념'이었다. '미디어 공동체'는 살의와 악의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의 희생물을 찾았다. 어떤 희생물이 등장하면, 미디어는 그것을 거침없이 공격하면서 이야기의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물은 스테레오타입에 빨려들어가 고유한 개성을 잃고 사라진다. 그러면 미디어 공동체는 그 희생물을 망각의 늪 속으로 밀어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나선다.

저자의 서술에서 등장하는 희생물, 즉 '타자'의 표상은 매우 다양한 사건과 인물과 소재들로 이루어졌다. 시간적 흐름으로 놓으면 '위생 관념과 아이누의 멸망에 대한 미디어의 시선 -> 여성들(황후, 창기, 여학생으로 구분되는)에 대한 시선과 각종 신문 광고들(주로 부인병 치료약과 화장품 광고) -> '민비'에 대한 미디어의 증오와 시해 사건 보도 ->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에 대한 시선 -> 한일병합에 대한 시선 -> 무정부주의와 '천황 암살 시도'에 대한 시선으로 이어진다. 언뜻 보면 전혀 관련 없는 별개의 사건들이라고 여겨지지만, 저자는 미디어가 이런 다양한 사건들을 가지고 일관된 논리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과정을 추적했다. 사실 위에 언급한 사건들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사례들인데, 그것들을 섬세한 설명과 묘사로 엮어냄으로써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저자는 당대 미디어들이 쏟아낸 악의와 살의에 찬 공격들을 헤치며 '타자'로서 배제된 '이야기'들을 복원해내었다. 위에 적은 사건들은 분명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완성되었지만, 스테레오타입에 흡수되어 망각된 것들을 떠올리면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로 거듭난다. 저자는 당대에 완성되었던 이야기들이 미처 봉합하지 못했던 '균열'들을 세심히 살피면서, '이야기'를 '암살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재구성해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문화연구 작업을 수행하면서 딱딱한 이론에 기대지 않고 분석 대상이 되는 텍스트들에 찰싹 달라붙어 분석했다는 점이다. 나와 같은 독자들은 문화이론은 생소하지만, 신문 기사와 같은 텍스트들은 익숙하다. 한국인 독자들은 이 책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젠더의 시각으로 분석한 미디어 비평이 과연 어떤 것인지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신문과 방송이 달리 보일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일본사회가 조선과 조선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다. 당대 일본 미디어가 명성황후, 김옥균, 안중근 등의 중요한 역사 인물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망각해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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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 ‘서울의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4
정해구 지음 / 역사비평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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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 사회운동사

사회운동사(history of social movement)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이다. 사회운동사가 중요하다는 말은 곧 사회운동이 근현대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까놓고 말해서 1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인들이 격동하는 정세 속에서 그만큼 고생해왔다는 뜻이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친 민중의 역사가 곧 사회운동의 역사이고, 한국 근현대사를 이루는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멀리 보면 19세기 사회 혼란 속에서 터져나온 민란들과 갑오농민전쟁부터 시작하여,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이후에는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해방을 목표로 삼은 갖가지 항일운동들이 펼쳐졌다. 해방 이후에는 독립의 완수를 위하여 다양한 노선의 정부수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분단과 전쟁 이후, 백색독재가 군림하는 남한 사회에서는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펼쳐진 사회운동에 관해서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아울러 '민족민주운동'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모든 사회운동들이 공통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점을 중시하여 '민주화운동'이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근현대 100여년 동안 한국인들이 전개해온 사회운동은 단순히 정부 영역이나 사회 영역의 개량 및 개선을 추구하는 성격의 시민적 운동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제대로 된 국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성격의 운동이었다. 조선시대 말 개항기에는 나라가 무너져가는 가운데 반외세나 반봉건 등 다양한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꿈꾸었고, 일제 시기에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해방 이후에는 제대로 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각자의 노선에 따라 정부수립운동을 벌였고, 분단된 이후에는 정치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독재정권과 정면 대결을 벌였다. 근현대 100년 동안 한국인들은 잇단 전쟁과 지겨운 빈곤에 고통받으면서도 식민지배와 독재라는 무거운 역사의 짐을 벗어던지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 근현대 사회운동사가 그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전형적 사회운동사 서술로서의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이 책은 전형적인 사회운동사 서술로서,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의 민주화운동을 다루었다. 이 책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기획한 <20세기 한국사> 시리즈의 일환으로 출판된 책인데, 전작 중에서 시대별 통사를 다룬 책으로는 <이승만과 제1공화국>(서중석),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조희연)가 있었다. 전자는 역사학자의 본격적인 정치사 서술이고, 후자는 저자가 사회학자이기 때문인지 정치, 사회, 경제, 사회운동 등 다양한 주제를 엮어 박정희 정권 시기의 시대상을 그려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한국의 정치학계에서는 드물게도 역사적 접근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학자이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1980년대 한국 정치의 흐름을 역사 서술의 방식으로 풀어놓았다.

사실 이 시기의 사회운동사를 다룬 서술은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현대사에서 워낙 중요한 시기였던만큼,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나 저술가들이 1980년대의 사회운동을 다루었다. 여기서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을 터인데, 학계에서 정리한 가장 대표적인 저술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돌베개, 전3권, 2008~2010)를 꼽을 수 있다. 이 시리즈 중 3권이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다루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한국민주화운동사> 3권의 축약판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3권에 저자 정해구 역시 집필위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시각도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3권은 대중서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교과서'이다. 분량도 1,000쪽에 달하는 만큼 내용이 아주 자세하다. 그러므로 대중이 편하게 접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책인데, 이 책은 '엑기스'만 뽑아내어 대중서로 엮은 셈이다. 매우 복잡한 사회운동의 흐름을 간명하게 드러내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꽤나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이 책은 학계가 대체로 공유하고 있는 민주화운동사의 시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이 1960년 4월혁명의 경험을 계승하여 독재 타도와 정치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으로서 전개되었고, 1970년대 태동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주된 동력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1980년대에는 역사적 대세가 된 민주화 요구를 짓밟고 독재를 연장시킨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운동이 더욱 조직화되고 확산되는 경과를 거치게 된다.

대학생들과 일군의 재야인사들이 '1980년 5월 광주'의 슬픔을 딛고 선도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이끌어나갔고, 시대의 대세를 알아차린 제도정치권의 야당 세력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윽고 정권의 폭압에 기가 질린 시민들이 민주화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이들은 각기 사상과 노선, 정치적 지향이 모두 달랐지만, 민주화라는 당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같은 '최소 강령'에 합의하고 폭넓은 연대를 이루어 정권을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 결국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로써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행기에 접어들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개헌이 최대 이슈로 부상함에 따라 정국의 주도권은 삽시간에 시민사회에서 정당정치 영역으로 옮아갔고, 본래 온건 노선을 견지했던 보수야당 세력은 재야세력과 결별하고 신군부와 타협했다. 게다가 대선 정국에서 보수야당의 두 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권력투쟁 끝에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여 결국 신군부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처럼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독재의 잔재가 철저히 청산되지 못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키기 위한 많은 과제들이 1990년대 이후로 넘겨졌다. 저자는 이러한 1980년대 민주화의 빛과 그늘에 관한 학계의 기존 평가들을 수용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간명하게 풀어놓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기본적으로 사회운동사 서술이고 대중서라는 취지에 맞게 구성 방식도 대단히 평이한 수준이다. 한국사회의 민주화 과정과 1980년대 한국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이 가벼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책이다. 이 시대를 직접 몸으로 겪은 486세대들은 추억을 회상하며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반독재 민주화의 가치를 긍정하는 학계의 시각을 대중적으로 풀어낸 저술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486세대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볼만한 점들

이 책은 분량의 제한 때문에 민주화운동의 모든 테마들을 자세하게 다루지는 못했다. 대중서로서 가지는 불가피한 한계라 볼 수 있는데,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읽기 위해 생각해볼만한 점들을 몇 자 적어본다.

먼저 각종 운동과 사건의 용어 문제이다. 저자는 '광주민중항쟁', '6월민주항쟁'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어떤 사건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곧 그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독자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 나름대로 해당 사건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음미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80년 5월 광주'의 사건을 보는 시각은 '민중항쟁론'과 '민주화운동론'으로 대별된다. 현재 국가가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시각은 후자인 '민주화운동론'이다. 5월 18일을 '5.18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기념식을 치르고 있다. '민주화운동론'은 사건의 성격에 관하여 국가와 일부 타협한 측면이 있는 시각인 반면, '민중항쟁론'은 보다 급진적으로 해석하려는 시각이다. 이러한 차이점들에 유의하며 책을 읽으면 더욱 풍부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다 자세한 설명은 본인의 다른 글(링크)을 참조할 수 있다.)

한편 이 책에서는 본문의 중간 중간에 미국의 동태를 설명해놓고 있다. 민주화 이전에 미국이 한국 정치에 미치던 영향력은 대단했다. 미국은 남한이 계속 반공 체제를 유지하길 희망했고, 그러한 견지에서 완고한 반공 성향을 보이는 독재정권들을 용인하고 나아가 지원하기까지 했다. 1980년대에도 미국이 전두환 정권과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미국은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용인하기는 했지만,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 심각해지는 국면을 지켜보면서 결국에는 전두환 정권에게 민주화를 수용하도록 압박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즉 한국사회의 민주화 이행에는 미국의 정책 변화 역시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적시되지는 않았다. 물론 기본적으로 운동사 서술이기 때문에 대외적인 문제가 자세히 다뤄지기 힘든 측면이 있으므로, 독자는 이를 감안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의미를 놓치면 한국사회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 특히 반미운동과 통일운동의 대두가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정치지도자가 이끈 보수야당의 문제이다. 민주화와 이들 야당세력의 관계를 따지는 문제는 다분히 현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들 두 지도자와 야당이 당시에 보여준 행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며 독서하면 더욱 흥미로우리라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야당세력의 분열은 명백한 정치적 퇴보였는가? 아니면 불가피한 변화였는가?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지역주의의 등장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러한 중요한 주제들에 관해 고민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으며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작업이 매우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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