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에 묻히다 -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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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였던 백범 김구 선생은 말년에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구 선생이 한민족의 평화통일운동을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암살당하기 2주일여 전인 1949615일 한국독립당(김구가 이끌던 정당)이 발표한 선언문에서는 이러한 3세계 민족주의의 이념이 담겨있다. 좀 길지만 관련 부분을 인용해본다.

 

(전략) 동아시아, 인도네시아, 발칸 등지에서는 민족자결을 위한 강렬한 반제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중략) 이상과 같은 국제적 환경은 우리 조국에도 그대로 축소 반영되고 있다. 국토의 양단은 경제의 파탄과 동족상잔을 초래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케 하고 있으며,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발호와 봉건세력의 잔존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자유 발전을 방해하고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억압과 침략을 위한 어떠한 기도도 결사반대할 것이며, 전세계 평화를 애호하는 인민과 더불어 영구한 세계 평화의 확보를 위하여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 제 약소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자결권을 유린하려는 낡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정책을 배격하고, 당면한 역사적 과업의 최고 목표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최대의 열의를 경주하며 투쟁할 것이다. (후략) (도진순, <백범어록>, 돌베개, 387~388)

 

이 책에는 김구를 비롯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말로 외쳤던 전세계 약소 민족들과의 반제국주의 연대 투쟁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했던 머나먼 적도 땅의 조선인들이 등장한다. 억지로 일본군 군무원이 되어 인도네시아까지 왔던 조선인 청년들이 있었고,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에 시달리며 일본군을 따라온 조선인 위안부들도 있었다. 이 책은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하다가 다양한 운명을 맞이한 적도 땅 조선인들의 기록이다. 일본군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미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숨진 이들도 있고, 끝내 독립을 맞이했지만 새로운 제국주의 군대인 네덜란드군에 붙잡혀 일본군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전범으로 판정받아 처형된 이들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투신하여 인도네시아 민중과 함께 반제국주의 무장 투쟁에 참가했던 이들도 있다.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들의 시선으로는 남북 평화통일을 이야기하며 제3세계 민족운동에 주목했던 김구나 실제 이국땅에서 이민족의 해방투쟁에 헌신했던 이 책 주인공들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울 듯도 싶다. 지금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방 선진국들만 선망의 대상이었지, 이들 3세계국가들은 한마디로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한류가 이슈가 되기 전까지는 TV카메라가 이들 제3세계 국가들을 비춘 적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60~70년 전의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의 눈에는 미국, 소련, 유럽 선진국들과 협력하는 것보다 반제운동으로 들고 일어나는 제3세계 민중과 연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친미를 넘어 종미로 치달았던 군사독재정권의 기나긴 시절을 거치는 동안 우리가 망각했던 역사 기억이다.

 

우리가 망각했던 기억을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어느 양심적인 일본인의 도움으로 다시 끄집어낸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더욱 부끄러워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고 적도에 묻힌그들의 삶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 책의 큰 미덕은 이처럼 진지하고 엄숙한 역사적 기억을 마치 한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를 접하는 것과 같이 유려한 서사로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지난 여름휴가 동안 이 책을 접했다면 더욱 보람 있는 휴가가 되었을 것인데 조금 아쉽다. 끝나가는 여름을 무언가 보람 있는 기억으로 마무리짓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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