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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리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평점 :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서부터 호평을 전해 듣고 관심을 두던 작가였다. 출판사 이벤트 덕에 서점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편하게 수록 단편 '엄마 없는 아이'를 맛보기 할 수 있었다.
간략한 책소개로 미리 접한 주인공 올리브의 인상은 무뚝뚝하고 서툰 노년이었다. 그런 주인공이 사이가 어색한 아들과 오랜만에 만난다. 3년만에 보는 아들 내외는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아들은 더이상 젊지 않고, 흰머리가 나기까지 했다! 며느리는 아들과 세번째 결혼을 하는 딸린 자식까지 있는 여자였다. 올리브는 며느리가 성에 차지 않기만 하다. 손자들도 낯을 가리느라 말이 없고, 막내 손자인 리틀 헨리는 그녀의 죽은 남편 헨리를 전혀 닮지 않았다. 그래도 아들과 단둘이 이야기 하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아들의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못마땅하기만 하던 며느리도, 그녀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안쓰럽다. 그녀는 엄마를 잃은 중년의 아이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올리브는 조금 너그러워졌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올리브와 그녀 사이에 짧은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한다. 며느리 앤은 말한다, "이따금 나는 엄마 없는 아이처럼 느껴져요. 저는 늘 그렇게 느꼈어요."
앤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왜 진작 하지 않았냐는 올리브의 말에 아들은 이렇게 답한다. "앤의 어머니는 엉망진창이었어요. 그러니까 뭐."
이 부분의 대화가 이 단편의 백미였다고 본다. 아들은 앤의 어머니를 '있으나 없으나 별 영향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고, 내심 자신의 어머니(올리브)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나도 저애(앤) 인생에 어떤 일어나는지 알고 싶다"는 올리브의 말에 갑자기 왜 그런게 궁금하냐고 어리둥절해 하며 묻는 말에서.
아들에게도 앤에게도, '어머니'라는 존재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에게 터뜨린 진실, 올리브는 남자친구 잭과 결혼하기로 했다.
아들이 혼란스러워 하며 결혼은 왜 하냐고 묻자, 올리브는 습관적으로 선을 긋는 듯 말한다. "하건 안 하건 너한테 무슨 차이가 있니?" 아들은 이런 얘기를 하려고 우릴 초대한 거냐고 묻는다. 올리브는 '초대'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너는 내 아들이고 여긴 네 집인데." 하지만 아들은 말한다 "여긴 제 집이 아니에요."
이야기의 시작에서 올리브가 집을 정리하던 때, 올리브는 자신의 과거를 정리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집은 올리브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들의 추억도 남아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을 혼자 정리한 순간, 올리브는 벌써 아들을 집을 떠난 사람으로 치부한 셈이었다.
올리브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행동의 의미, 그 행동이 아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아직 올리브는 깨닫지 못한 채 아들과 올리브의 남자친구 잭이 만나게 된다. 잭에게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아들을 나무라지만 아들은 거세게 받아치고, 그순간 올리브는 자신이 아들을 오랫동안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런 아들에게 호통치는건 며느리의 역할. 그리고 며느리의 그 모습에서 올리브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들 내외는 다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며칠간 아들과 사이를 되돌려보려 한 노력은 그녀가 리틀 헨리에게 떠준 빨간 목도리가 카우치 밑에 뒹구는 것으로 결론난다. 그리고 며칠간의 시간은 아픈 깨달음으로 올리브의 가슴을 찌르고 지나간다. 그것을 서술하는 마지막 몇 장이 묵직했다.
이 짧은 이야기에도 서툴고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면면들이 담겨 있었다. 엄마도 아들이 낯설어질 때, 며느리도 낯선 사람일 뿐이라 어색하고, 손자와도 어색할 때. 그럼에도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며 마음이 열릴 때. 부모는 사이를 되돌리거나, 가까워지고 싶어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예전에 애써 손을 뻗다가 지쳐, 그 손을 떨군지 오래라는 것을 깨닫는 때. 부모 쪽이든 아이 쪽이든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올리브의 아들 크리스토퍼나, 며느리인 앤이나 엄마 없는 아이였다. 이야기의 제목은 그런 의미였다. 올리브는 아들에게 예의, 배려, 체면, 염치를 가르쳤을지는 몰라도 아이에게 따뜻하고 끈끈한 사랑은 주지 못했다. 아마도 올리브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격해서 그녀의 아들도 싹싹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되길 바란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을 강조하는 바람에 놓친 다른 것. 그에게 따뜻한 엄마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 나이가 들어서야 자녀들에게 좀더 너그럽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는 마음.
제목의 의미를 알게됨과 함께 올리브가 더 궁금해졌다. 내가 아들을 엄마 없는 아이로 키웠구나, 라고 깨달은 그녀가 이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한 번도 욕을 하지 않았다던 올리브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들과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잭과는 어떻게 만나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이 뒤에 올리브에게는 또 무슨 일들이,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조금 씁쓸한 맛으로 끝난 이야기라서 책의 다음장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더 궁금해진다.
작가가 글을 엮어내는 솜씨에도 감탄했다. 이미 멀어진 사이의 어색함을 드러내는 장면들, 주인공의 단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장면들, 하나의 단편으로서 완결성을 가지는 결말, 정말로 어딘가에 이뤄지고 있을 법한 대화를 써내는 내공이 놀라웠다. 이런 소설이라면, 세월이 지나고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상이 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