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간들은 어쩌면 엄마의 가출을 이해해보려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친구 유타는 이치코에게 묻는다.
"중요한 뭔가를 회피하고 그 사실을 자신에게조차 감추기 위해 열심히 하는 걸로 넘기는 거 아닌가 싶어. 그냥 도망치는 거 아냐?"
이치코 자신도 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코모리의 어른들처럼 마음속 깊이 이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토마토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비닐하우스를 지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비닐하우스까지 지으면 여길 떠나지 못할까봐 두려워서라는 것을.
-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 P64
편지 속에서 엄마는 자신의 인생이 언제나 같은 지점에서 실패한 것 같았다고 적었다. 늘 원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건 원이아니라 나선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썼다. 얼마 후, 이치코 역시 엄마처럼 코모리를 떠난다. 이곳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에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 P65
제목부터 살벌한 마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아니다』는 바로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다. 올해로 40여년째 시골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 꼬장꼬장한 작가는 ‘어딜 가든 현실은 따라온다‘는 말로 시골 생활에 대한 낭만적 환상에 일침을 날린다. 이루고자 하는 정확한 목적이나 목표 없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시골에 와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어이쿠, 갑자기 의기소침해진다. 나 역시 도시에서는 성공할 자신도, 나다운 모습으로 살 자신도 없어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이한 마음으로 시골 생활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 P66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쥐어짜 그 즙을 팔고 메마른 껍데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도시 사람들은 시골을 향해 떠나는 것일 테다.정말로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힘으로, 나의 생각대로, 나의 의지대로 해보고 싶어서. 그곳에 가면 진심을 다해, 거짓된 것은 하나도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힘으로. 그런 건 환상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나 그곳에서나 나는 나니까, 마루야마 겐지의 말대로 현실은 늘 나를 따라다닐 테니까.
-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 P67
까밀의 고장 난 시계를 고쳐주어 그녀를 과거로 돌려보낸 시계방 주인은 현재로 돌아온 까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용기를 주렴. 바꿀 수 있는 걸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걸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정을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현명함 말이야."
과거의 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까밀이 물리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처럼,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의 빛은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40억년 전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과거의 상처 역시 이미 지나간 것이다.
- 어른의 슬픔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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