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라는 이름이 독특하다는 규의 말에 어렴풋이 짐작한 대답이 돌아왔다. 국적도 뭣도 거부한 채 노틸러스호를 타고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해저이만리』의 네모선장. 네모는 그 무엇도 아닌 존재라는 뜻의 라틴어를 제 이름으로 삼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니. 수십년째 내전으로 곪아가는 이 나라의 네모는 무엇을 거부하고 싶어서 스스로 그런 이름을 지었을까? 하지만 규의 의문이 무색할 정도로 눈앞의 네모는 도무지 긴장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눈부시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 웃기만 하는 태평한 젊은이였다.

- 아무도 없는 집 - P45

언제라도 깨질수 있는 불안한 일상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폭격에 사지가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여자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치는 자신이 어쩌면 더 한심한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일상 속에 위험이 드문드문 독버섯 같은 싹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만연한 위험 속에 일상이 풍문처럼 슬며시 다가왔다 사라졌다. 언제고 철수해야 할 캠프 안에서 정성껏 화분을 기르는 사람도 있었다. 고통의 비명이 왁자한 곳에서도 제 몫의 귀한 물을 식물에게 나눠주며 하루에도 몇번씩 푸른 잎과 시선을 맞추는 동료 의사를 볼 때마다 규는 자신에게 없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깨닫곤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 아무도 없는 집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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