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날의 도시락에 그득그득 담고 싶은 것은 먹을 것만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들일 것이며, 정리되지 않은 알록달록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도시락을 꺼내놓으면서 보온병이 필요한 것은 잠시 가까워진 두 사람의 공기를 좀 어찌해보자는 의도일 것이다. 훈김은 한켠에서 늘 그 정도의 역할을 맡는다. 그 훈김 덕분에 용기를 내어 우리는 다가올 휴가에 대해서, 앞으로의 어떤 찬란한 날들에 대해 말을 꺼내게 될지도 모른다. 훈김이 시켜서 하는 말, 말이다.
- 도시락 싸서 어디 갈래요? - P107
내가 소년이었을 때, 어느 먼 곳의 한 기차역에서 나를 기다려 나를 맞이해준 것은 다름 아닌 라디오였다. 어떤 희망도 가져본 적 없으며 아무 보잘것없는 추레한 소년이었을 때.... 라디오만이 나를 구원해줄 거라 믿는 바람에 나는 이렇게나 시간을 잘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고 상상을 자주 하는 사람이 되었고 혼자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일방적이면서도 눈먼 애정이 나의 불안한 시절을 살렸던 역설적인 결과라고 말해도 좋겠다.
라디오를 켜면서 헤엄쳐 다닐 우주를 열었고, 라디오를 끄면서 내가 만나고 스쳐야 할 아름다움을 기다리느라 우주의 코트 주머니를 한번 더 열어놓았던 찬란한 시절이, 내겐 있었다.
- 맨 뒤 창가 자리에서 라디오 -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