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길을 떠나다 - 길 위의 신부 문정현
김중미 지음 / 낮은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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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을 다룬 책들 가운데, 원저와 리뷰 사이의 공명(共鳴)이 제일 크게 느껴졌던 것은 수잔 손택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우울한 열정>에 쓰인 글의 밀도가 가장 높았다고 평가하는데, 해당 책의 원제가 'Under the Sign of Saturn(토성의 영향 아래)'이며, 그것은 또한 책 안에서 저자가 벤야민에 관해 쓴 에세이의 소제목을 그대로 책명으로 삼은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참화 가운데 무너지고 있는 제 삶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만들어낸 이들, 죽음으로 뜨거운 상징이 된 벤야민과 30년간 암과 투병하면서 그것을 탁월한 문명비평서(<은유로서의 질병>)로 전유해 낸 손택은 '지식인의 최전선'으로 온 생을 기동했다는 점에서 꼭 닮았다. 급진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만이 급진적으로 살아온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결정적인 일격은 항상 왼손으로 날린 주먹'이듯이, 그들은 국가가 폭력으로 짓밟아버리고자 했던 '사회적 왼손'의 역할을 개인적으로 담당하면서 그 갈등과 희생의 비릿한 현실을 글쓰기로 증폭해 '인간의 윤리'를 읽는 이들의 양심에 아로새겼다.  

서두가 길었는데, 오늘 이야기하는 책은 '길 위의 신부'라 불리는 문정현의 평전이다. 장편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유명한 김중미가 문정현을 기술했다는 것에, 읽기에 앞서 사실 나로선 의아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의문은 단 한 점도 남지 않았다. 내 의아함과 의문점은 모두 내가 그들(문정현과 김중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데서 비롯했다. 사람을 한 가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제대로 들어맞을 확률보다 그렇지 않을 확률이 훨씬 크며, 그것은 독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은 거슬러 올라, 그가 사제를 선택하게 되는 어린 시절과 가정 형편부터 그려보인다. 가난했지만 래디컬하기 그지없던 성장 환경은 그대로 문정현과 문규현의 삶에 옮아붙고, 그리하여 안온하고 존경받는 길을 가고자 했던 그는 어느새 '고집 센 싸움꾼'이 되고 만다. 그가 '명성', 아니 '악명'을 얻은 사회운동에의 입문 동기는 하도 소박하고 순응적이라 읽는 도중 실소를 터뜨리게까지 되는데, 시작이야 어쨌든 문정현은 그 뒤로 이 세상의 '낮은 곳'들에 제 안위를 살피지 않고 몸을 던지는 '투사'의 삶으로 변모한다.   

그와 동생 문규현 신부가 싸운 곳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자면, 이 땅의 근현대사가 지닌 질곡이 그대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5.18, 임수경 방북, 매향리 사격장 문제, 미선이,효순이가 무근리에서 미군탱크에 압사당한 사건, SOFA 개정, 부안 핵폐기장, 대추리 미군기지, 용산 참사와 강정마을까지...장애아들과 작은 공동체를 꾸려내는 일로 마냥 행복해하던 '아빠' 신부는 제국과 국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시민이 짓밟히는 참혹한 현장에서 머리가 허얘지도록 세월을 보냈다. 미사 때마다 누구나 말하는 '평화'가 진실로 진실로 모든 이들의 삶에 깃들도록 하기 위해, 그 자신은 인신의 자유와 고통으로부터의 안전을 포기하면서 '체제의 상식'을 '보편적 상식'과 또렷이 대비시켰다.   

책을 읽다보면 '한 순간도 유보 없이, 망설임 없이, 곧바로'라는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그 말은 문정현 신부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함께 싸우던 이가 경찰에 잡혀가면,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로 경찰서로 가 단식농성에 돌입한다('준비단식'같은 여유로운 낱말은 그의 사전에는 없다). 대추리에서의 장장 935일의 촛불집회가 끝나자, 그는 다시 생명과 평화의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는 다른 현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경찰과 안기부가 그를 불법연행하는 와중에서도, 그는 의기를 잃기는커녕 잠시 소변을 보게 해달라며 차 밖으로 나서 돌멩이를 집어들고 홀몸으로 그들과 맞선다. 한 순간의 유보 없이, 망설임없이, 곧바로, 그는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의 미사는 늘 전투경찰과 미군이 병력과 화기로 대대적으로 겁박하는 가운데 집전된다. 크레인에서 떨어지고, 단식 중에 쓰러지는 등 그 지난한 과정에서 그도 문규현 신부도 더이상 '평범하지 않은' 몸 상태가 됐다.    

재벌에게 막대한 재개발 이익을 몰아주는 속도전의 와중에서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시민 5명이 죽고, 진압에 나선 경찰도 1명 사망했던 용산 참사의 현장에서, 시민단체들도 방문을 꺼리고 권력의 약속은 늘 뒤집혔으며 사법부조차 '자살테러'로 피해자들을 욕보인 상황에서 문정현은 자신의 몸 상태로 인해 예전처럼 거기서 늘 '노숙'할 수 없음을 아파한다. 용산 참사의 유가족 합의 직후에 그는 또 다시 제주 강정마을로 떠났는데 칠순도 넘은 노구의 몸으로, 심지어 성치도 않은 몸으로 공권력이 급습할 때마다 대열의 맨 앞에서 형형한 목소리로 시시비비를 논파하는 그를 매번 만나볼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중덕 바닷가에서 풀피리를 말아 불며 자신과 주민들을 부드러이 위무하는 그가 '빨갱이', '싸움꾼'이라면 나도 죽을 때까지 '빨갱이', '싸움꾼'이 되기 위해 몸을 바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지금도 문정현 신부는 젊은 활동가들과 공동체를 꾸리면서, 때로는 20대 젊은이의 '방 안에서 담배 태우지 말라' 같은 지적에 삐치거나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 다음날이면 생활방식을 바꾸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다. 타인을 가르치거나 비평하기는 쉽지만, 그 기준을 견고하게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이들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세상에서, 이 고집센 늙은이의 겸허함은 감동적인 데가 있다. 나는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김중미의 글은, 싸움과 투쟁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순정한 인간, 문정현에 대한 담담한 증언이다. 성경구절이 종종 실려, 문정현에 대한 액자 노릇을 하려고 드는 점이 작위적인 약점으로 제기될 수는 있겠으나, 한 인간의 지극한 삶은 레토릭을 넘어서는 장엄함이 있다. 설령 그 레토릭이 성경이더라도 말이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어리석은 물음을 한 가지 떠올렸다. 만약 이 땅에 예수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크리스천이 가장 많다는 순복음교회에? 남북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는 휴전선에? '친환경 녹색성장'을 위해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붇고 주민들과 뭇생명을 몰아낸 4대강에? 

나는 예수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 대강 알것 같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와 함께 있을 한 사람을 꼽을 수는 있을 것 같다. 20세기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적을 동시에 창출해낸 몇 안되는 국가 대한민국에서 자본의 '하얀' 십자가를 대신 지고, 아픈 몸으로 세상의 아픈 곳들을 전전하는 '붉은' 예수 문정현이 있는 곳에 예수도 더불어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이 책을 다른 사람이 아닌 김중미가 썼다는 것이, 아마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수도 있겠다고 귀가 길 내내  생각했다. 이 부분은 책을 읽어봐야지만 알 수 있는 점이고, 문정현 못지 않게 김중미의 삶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두 명의 삶은 우리 시대의 '윤리'가 가리키는 하나의 정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전우익의 말처럼, 모두가 변하는 때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진보다.  

문정현은 자신의 이상형을 평생동안 순교자에 둔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현장에서 '한 순간도 유보 없이, 망설임 없이, 곧바로' 제 삶을 헌신하였다. 그가 왜 그러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을 수도 있고, 딱 한 가지 동기만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해 내가 단정하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수잔 손택의 <우울한 열정(원제:토성의 영향 아래')>에서 손택이 벤야민에 관해  쓴 에세이 "토성의 영향 아래" 맨 마지막 단락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면서 이 어설픈 글을 맺기로 한다.  

 

"(전략)벤야민은 수사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크라우스는 새 시대의 최전방에 섰는가?
"아아, 전혀 그렇지 않도다. 그는 최후의 심판의 문턱에 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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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n_er 2012-11-05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