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편혜영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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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드디어 C국에 입국했다.

방역 회사에서 약품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그는 C국의 본사로 파견근무 발령을 받고 떠난다. C국에 도착하자 검역관은 차례로 체온을 측정했다. 검역이 까다로워진 것은 전염병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경로가 밝혀지지 않은 감염병은 병독력이 높지만 치사율은 높지 않다고 했다. 배정받은 숙소는 Y시 제4구로 과거 대량의 산업폐기물을 매립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거주민들이 이탈하였고 쓰레기 더미와 부랑민이 가득한 지역이었다. 그는 지친 몸으로 숙소에 도착하지만 이내 트렁크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그 탓에 본사 인사담당자인 '몰'과도 연락이 닿지 않게 된다. 연락을 기다리던 중 본국의 두고 온 개가 생각나 출국 전날 함께 술을 마셨던 전처와 재혼했다가 다시 이혼한 동창생 유진에게 연락을 해서 개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다음날 유진은 그의 집을 찾았다가 난자당한 개와 칼에 찔려죽은 전처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말을 전한다. 이때 초인종이 울리고 어안렌즈를 살피니 방역복을 입은 세 명의 남자가 문을 가로막듯 둥글게 서 있었다. 그는 현관문 대신 베란다 문을 열고 쓰레기 더미 위로 몸을 던졌다. 


전처에 관한 소식은 국내 거의 모든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유진의 말대로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었다. 전처의 시신이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사건 직후 그가 해외로 도피했다는 점이 의혹을 부추겼다. 그의 아파트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칼이 발견되었는데, 그의 집에 남아 있는 다른 칼과 같은 브랜드 제품이고 칼날에 전처의 혈흔이 남아 있다는 점도 증거로 제시되었다. _p.106


“쥐 때문이야.”

아무리 방역회사라지만 경영인 연수를 겸하는 파견을 보내면서 지사장은 '쥐' 때문이라고 말했다. C국에 오게 된 것, 쓰레기 더미로 투신한 것, 공원에서 부랑 생활을 이어간 것, 하수도로 떠밀린 것은 모두 쥐 한마리로부터 비롯되었다. 애초에 그를 선발한 지사장 눈에 든 것도 쥐를 잡은 일 때문이었다. "몰의 일은 인사업무다 보니 비밀리에 진행되는 게 많았어요. 사무실이 워낙 커서 업무상 공통점이 없으면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돌이키기 위해 본사의 인사담당자 몰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하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해도 일은 계속 쌓입니다. 도대체 언제 끝이 날지 몰라요. 쌓인 서류를 보면 한숨만 나오고요. 아무리 전염병이 돌아도 감염되어서 아프거나 죽어나가도 일을 해야 하는 건 변함없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는 게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병에 걸려서 일을 망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합니다. _p.202


『재와 빨강』은 여기저기 검역 안내문과 전염병 예방수칙이 붙은 공항에서 시작된다. 전신 방역복 차림의 검역관이 승객들의 체온을 재고, 고열의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억류 조치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이 상황은 어쩐지 낯설지 않다. 몇 년 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가 겪었던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2010년에 쓰여졌다. 이 소설이 출간되고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팬데믹은 가상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 되었다. 삶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안다. 전염병과 위생 상태, 끊임없이 출몰하는 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시간을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을 망가뜨렸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나중에 사원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그는 낯선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흉기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원숭이를 죽일 작정으로 나뭇가지로 찔러댄 일이며 그러느라 자신이 상하는 것을 기꺼이 감내한 일, 오로지 분을 삭히려고 혼자만의 의심을 기정사실화하여 아내를 비하하고 기력이 남아 있었더라면 아내를 때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를 두고두고 부끄럽게 했다. _p.165


후배는 매번 일을 하다 말고 전화 부스로 달려가는 그에게 후배는 공중전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 별명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순전히 발음의 유사성으로 공중을 허공의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자신은 허공에 뜬 존재나 다름없으므로 썩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_p.235


지난 펜데믹으로 우리가 잃었던 것은 '유대'였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가 아니라 '육체적 거리'가 멀어졌어야 했는데 처음 겪은 재난에 서로 허둥대며 많은 것을 잃고 말았다. 감염자에 대한 비난과 혐오, 무자비하게 공개되던 신원과 동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세한 사업자들은 부도를 맞이했고 많은 사람들은 직장을 잃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소통한다는 것은 위험을 뜻했으니까. 그래서 편혜영 작가가 『재와 빨강』을 통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무엇이 인간성을 망치는 것인지, 무엇이 우리의 삶을 폐허로 만드는지에 대해서. 사실은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폭력, 누군가에 대한 무관심이, 그리고 사람을 고유하게 보지 않고 자본의 도구로만 보는 이 사회가 진짜 재난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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