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런웨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6
윤고은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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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제목을 'AS안심결혼보험'으로 정했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부제에 반드시 '지속 가능한 결혼생활을 위한 지침서'라는 말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런웨이』는 유리는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던 안나가 며칠째 연락 두절이라며 안나의 독서모임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오랫동안 소원해진 사이였지만, 최근에 통화했던 기억을 더듬어 안나를 찾기 시작한다. 안나는 여행사에서 일하며 여행지의 도서관을 꼭 둘러볼 만큼 도서관을 좋아했는데 최근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 <AS안심결혼보험 약관집>이 알고 보니 고가에 중고 거래되고 있다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유리는 안나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안나가 빌렸던 보험 약관집을 같은 도서관에서 대출한다.


"결혼은 한 사회의 그릇이나 상자 같은 거라고 했다. 결혼을 통해 담아낼 수 있는 인간사들이 무수하다면서. k는 아빠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과거의 결혼이 택배 상자 5호 정도의 크기였다면 지금은 2호 상자쯤 되는 거라고 말했다. 50년 전의 결혼이나 30년 전의 결혼에 비해 지금의 결혼이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면 단지 상자의 크기가 작아진 것뿐이라고 말이다. 크기가 5호에서 2호로 작아졌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결혼이라는 상자 안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이 적어져 진짜 중요한 것들만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_p.94


이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이 '약관'의 내용을 꼽을 수 있다. '결혼 자체는 두 사람이 하는 것, 거기에 수많은 특약이 올라타지만 그게 핵심은 아닌 것.' 그 말은 곧 부부 외의 가족이나 허례허식은 언제든지 해지 가능한 개념이며, 지속 가능한 결혼생활을 위해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여 결혼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결혼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건강과 교육과 일자리와 주거 외 전통까지 욱여넣은 커다란 상자라면, 지금의 결혼은 담을 수 있는 것이 훨씬 작아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친척 어른들의 행사 참석이나, 양가의 김장, 명절 전날의 양가 방문을 상자에 담지 않았고, 누군가는 2세의 출산도 상자에 담지 않았다. 어떤 부부에게는 이것들이 본질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 모여 이 보험의 보상 여부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예단 예물이나 결혼 기념 사치품들이 비합리적인 요소임을 은연중에 제시한다.


​"보험은 페이백이 되는, 보장 가능한 내용을 알려주고 사람들은 거기에 맞게 자료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가치의 이동이 일어난다. 무엇이 중요해지고 무엇이 덜 중요해질까? 누락되는 것들, 미뤄지는 논의들이 분명히 생겨난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보험의 보장 여부, 즉 환금성 기준으로 결혼생활의 이모저모를 가늠하게 된다." _p.168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하는 것 같다. 음식 배달이나 재택근무와 같이 대면하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들이 더 익숙해지고, 결혼식과 장례식은 아주 가까운 사이에만 참석하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어느 곳을 방문하건 핸드폰을 꺼내 QR코드로 백신 접종 여부를 증명해야 하고, 그로 인해 내 동선은 차곡차곡 기록된다.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가치는 '생존'에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전과 달리 누군가를 대면해서 느낄 수 있는 행복도, 백신을 여러 차례 맞아야 하는 수고도, 내 개인 정보이자 내 동선도 기꺼이 공개한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가끔 그런 생각도 들어. 이 보험 가입자로서 정우가 만약 한 건 한 건 보험금 청구를 하고, 그 기록이 어딘가 남아 있고, 그 안에 우리의 대화라든가 어떤 형태로든 삶이 묻어났다면, 그게 누구에게나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여행지일 수도 있었겠다. 이제 나에게 남겨진 정우의 모든 흔적이 다 미지의 세계야." _p.248



결혼에, 삶에, 내 하루에 덜 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외하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 윤고은 작가는 『도서관 런웨이』를 통해 이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이 아닐까. 작품 전체적으로 앞 부분과 뒷부분의 이야기가 약간 어긋나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재미있는 요소들이 가득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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