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이모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1
박민정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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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만 해도 매년 '통일'에 대한 포스터 그리기나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통일이 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믿었고, 가난한 북한의 사람들을 구제해 주고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더불어 살아갈 한반도를 상상했다. 우리에게 통일은 TV에서 보이던 극적 상봉과 같이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애틋하고 그리운 것, 막연히 더 이상 싸우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통일 대박' 정도의 막연한 이상향처럼 느껴졌다. 그 누구도 통일이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통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할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걸까.


"어린 시절에는 내내, 내가 만약 장편소설을 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클라우스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입양된 한국계 독일인이었고 지금은 없어진 동독, DDR에서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내고 통일 후 대학에 임용되었으며 한국인 유학생 출신인 이모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흐른 후 실종되었다." (p.35)


1990년 베를리 장벽이 무너진 즈음, 우정의 이모는 서독의 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직에 임용된다. 이모는 대학에서 동독의 물리학자 '클라우스'와 결혼하여 살아가던 중, 결혼 2년 만에 아무런 이유 없이 남편 클라우스는 자취를 감춘다. 홀로 남겨진 이모는 남편의 여동생과 오랜 시간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흔적을 찾지만 남편의 실종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한다. 우정은 어릴 적 한 번 본 이모부 클라우스를 기억하고 언젠가 이모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겠다고 마음먹지만, 등단 후 여러 작품을 발표하는 동안에도 그에 대한 소설은 완성하지 못한다.

"경희는 그 사람을 사랑했고, 그의 신념을 존경했다. 동독 민중에게는 불확실한 동독의 민주사회주의의 미래보다 확실한 서독의 자본주의 미래가 더 구체적이었다고. 그것이 서독의 보수 세력에 귀순하는 일이라는 걸 모른 채. 독일의 통합 과정은 노동에 대한 신보수 및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관철이라는 조건에서 그리고 동독에 대한 서독의 총체적 우위 속에서 진행되는 자본 주도의 통일이었다는 점은 더더욱 파악하지 못했다고." (p.62)


우정은 왜 클라우스의 이야기로 글을 쓰고 싶었을까. 나도 때때로 누군가의 삶을 글로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어릴 때는 우정처럼 나의 가족 중 누군가에 대해 쓰고 싶었다면, 요즘은 뉴스 기사를 보면서 종종 생각을 한다. 최근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알려진 전남 영광 모 중학교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망 사건을 보며 이 같은 생각을 했다. 그 아이들은 왜 그랬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우정이 클라우스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남북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힘을 발휘하던 때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브레히트를 전공한, 현지에서 결혼했으나 한순간 남편이 사라져버린 자신의 이모가 아니라 한순간 사라져버린 클라우스의 삶과 선택을 이해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 아이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우린 마치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부족(ethno)처럼 벌거벗겨진 채 구경거리가 되어 있는 듯했다. 누구의 침실에나 있는 피임약과 콘돔이, 누구의 욕실에나 있는 면도기와 샤워볼이 왜 전시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동독의 프로파간다와 동독의 부패와 동독의 실책이 포르노 화보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DDR박물관은 동독인들을 영원히 추방하는 소외의 공간이다." (p.81)


정말 '통일'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당연스럽게 자본주의로의 통일을 상상한다. 당연히 남한의 경제 성장과 자본이 훨씬 높으니까 남한으로의 흡수 통일은 당연하다고. 결국 자본주의로 인하여 북한의 많은 사람은 지금보다 더 나은 교육과 경제적 생활을 누릴 것이라고. 지극히 우리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통일인 것이다. 아마 독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념의 잔재로 괴로워하다 스스로의 존재를 실종시킨 동독 지식인 클라우스와 실종된 남편으로 인하여 삶이 버려진 서독 이모는 남북 데탕트를 앞둔 우리의 미래일지 모른다.

"독일 같은 경우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이 왔지만, 계층화 현상이 심화되었고 서독화된 독일에서 동독 출신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심해졌지요. 그런 점에서 통일은 민족 전체의 열망이지만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p.96)


나는 이 작품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이 통일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얼마나 이해했을까. 클라우스를 사랑했기에 그의 이념까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이모처럼, 독일도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써가는 우정처럼, 동독의 지식인을 이해하기 위해 그를 기다리는 이모처럼 우리도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1990년 통일을 이루었지만, 사실상 여전히 통일이 되지 않은 독일의 사회가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초등학생 때 쓴 통일 포스터와 글짓기만큼 밖에 통일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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