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 <무예도보통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기념
김준혁 지음 / 더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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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장용영>


1부

사도세자가 온양온천 행차를 갈 때 군사 수 백을 대동했다. 수원읍치를 지날 때 읍 객사를 이용하지 않고 독성산성으로 가서 무예를 열병. 이후 운주당에 가 활을 쏘는데 네 발 쏘아 네 발 모두 맞췄다. 

후에 정조가 즉위 후 독성산성을 방문하고 화성행궁으로 돌아와 득중정에서 네 발 쏘아 네 발 맞췄는데, 이는 아버지의 일을 떠올리기 위함이었다.(p.54)

  정조는 활을 엄청 잘 쏜다. 책 속에 정조의 시수를 기록한 것이 나오는데 10순 중에서 2순은 5중, 8중은 모두 4중을 했다. 총 42발을 맞춘 것인데, 전통적인 활쏘기에서 보통 1획(50발)을 쏘아 30발 이상 맞춘 사람을 시수꾼이라 했는데(현대 국궁경기에서 9순을 쏘아 30발을 맞추면 사범이 된다.) 정조는 명궁의 반열에 들었다고 봐야 하겠다. 

 


2부

정조의 첫번 째 윤음은 즉위 첫날 발표한 ‘본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힌 것.

‘역적지자 불위군왕’이라는 팔자흉언을 퍼뜨리는 세력에게 대놓고 경고한 것.(p.84~87)



진설(進設)-무예도보통지의 편찬자가 책을 완성한 뒤 정조에게 올리는 “경과보고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병법이란 지모일 뿐이다. 진법도 오히려 말단에 불과한 것인데, 하물며 무기야 말해 무엇하느냐? 그러므로 ‘유장(휘장을 친 군막)에서 수립한 전략이 천리 밖에서 벌어질 전쟁의 승리를 결정한다’라고 하는데, 돌고 뛰며 고함지르면서 용맹을 과시하는 것은 한 사람을 대적할 수 있을 뿐이다. 어찌 승패의 변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약 상대가 어린아이일지라도 칼을 쥐고 있으면 맹분과 하육 같은 용사라도 피하고 숨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은 병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남자가 한 번 찌르는 것이 용맹스러운 무사가 백 번 치는 것보다 낫다는 건 그 세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략은 진법만 못하고, 진법은 병기만 못하며, 병기는 세만 못합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병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p.126~7)


무예도보통지 서에 진법과 기예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나온다(그러나 행진이 먼저이고 기예는 뒤라는 것이 병가에서 보편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나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병가에서는 오교에 있어 기예훈련이 두 번째이고 행진 훈련이 세 번째인것은 무슨 까닭인가?...p.122 재인용)


왜 진법서가 아닌 기예서를 편찬했을까 궁금했었다. 위에 인용한 서문에 나온 것만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의문을 진설에서 명쾌하게 풀어줬다. 다양한 사료를 제시하여 역사적 상상력에 의존해야 하는 부분을 메꾸고 있는 저자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3부

명의록을 편찬한 사연은 애달프다.(p135)

“귀혼의 무리가 날로 곁에서 엿보기만 일삼고 있으니, 말 한마디 침묵 한순간의 사이에도 미음을 놓지 못하였다. 이것은 비록 견디어 넘길 수 있으나, 다만 일상생활 속의 허다한 어려운 상황은 이루 다 기록하기도 어렵다.”-명의록 중에서

공홍파 부홍파 등 노론세력의 대리청정 반대부터 왕위 승계 저지까지 얼마나 고통스런 날이었을까?

오죽하면 즉위년에 명의록을 발간하여 자기가 환관과 나인들에게 감시당하며 고통받았던 것을 기록으로 남겼을까? 게다가 인건비부담과 결혼 못하는 궁녀들의 인권을 이유로 즉위 이전에 자신을 감시했던 환관과 궁녀 108명을 궁 밖으로 내보냈을까?


집권 초 홍복영 구복선 역모 사건은 물론 오른팔이었던 홍국영까지 제거하는 등 정조는 동궁시절부터 왕이 되어서도 늘 반대파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정치력을 발휘한다는 건 신기에 가깝다. 정조도 욕을 잘했다고 한다. 심환지와 나눈 비밀편지를 보면 그렇다. 이 정도 스트레스를 받는데도 욕 정도로 끝나면 성군이다. 




4부

이와 같은 위협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친위부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친위부대 양성은 민생안정과 국가예산의 효율화를 꾀라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국가 예산의 절반이 국방비(5군영의 인건비)였으니, 그 부담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니 백성들은 군포 납부를 피해 도망가고 세금징수관들은 이를 만회하려고 황구첨정 백골징포 등을 자행하지 않았는가? 오죽하면 정약용의 시 “애절양”에 나오듯 군역의 부담때문에 아들의 성기를 잘랐겠는가?

장용영은 다른 부대처럼 군포를 징수해 급료를 주는 방식이 아니라 성호 이익의 친위군병론을 따라 둔전제를 취하는 것이었다. 즉, 토지를 주어 거기서 나는 수익으로 군사를 운용하는 방식은 전통적이며 이상적 군대운용방식이었다. 

 게다가 효종대 시작하여 사도세자까지 주장했던 북벌을 장용영을 통해 은연중에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역대 장용대장 또한 노론벽파를 견제하고 노론시파나 소론 무당파 등을 기용하는 등 장용영 설치를 통해 민생안정 자주국방 왕권강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는 정조, 알면 알수록 멋짐 터지는 왕이다. 





5부

장용영 설치과정에서 장용영의 직제가 눈에 띄었다. 

5천 여 명의 인원 중, 선기대(기마병)는 345명. 

그리고 초관(대대장 급)으오 임명되어 15개월을 근무하면 정6품으로 승진할 수 있게 했다.(p.257) 

보통 다른 군영의 초관은 정9품에 해당한다.대과에 장원급제 해도 종6품을 받았으며,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정6품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장용영 초관에게 15개월 근무 후 정6품 승진혜택을 주는 것은 그야말로 파격대우 자체인 것이다. 

백동수가 기린(지금의 인제)에 은거하다가 40대 후반의 나이에 장용영 초관에 임명된다. 초관이란 직책 때문에 백동수가 하급장교였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장용영 초관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장용영 융령 10조 중,

막통(양반과 내왕하지 말 것)은 어떤 의미일까?

파당을 짓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을까?





6부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마침내 장용영 외영을 설치한다. 장용영외영은 그 수가 2만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18세기 조선의 인구를 1,000만~1,200만 정도로 추산할 때 화성을 지키는 장용영외영의 수는 어마어마할 뿐 아니라, 조선을 통틀어 단일부대로 이렇게 큰 부대는 없었을 것이다. 

장용영내영과 외영을 안정시킴으로써 정조는 노론 벽파 등 견제세력을 통제할 힘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1795년 윤2월 화성행차 때(을묘연행) 수원 백성들과 장용영 군사들이 민-군 합동훈련인 야조를 시행한다. 점거(횃불을 켜는 것)와 낙등(불을 끄는 것)이 왕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는 성공적인 훈련이었다고 한다. 

 수원 일대에 저수지와 둔전을 설치해 민생안정과 군사재정을 마련하고, 왕이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하는 수원은 선택받은 도시라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을묘연행 때 행궁 득중정에서 문무관료들과 활쏘기를 하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는 장용대장보다 배 이상 점수가 높았다. 심지어 6순 중, 한 순은 장혁(掌革)을 쏘았고 나머지 5순은 작은 과녁에 쏘아 25발 중 24발을 맞혔다고 한다(p.349). 이 날 정조는 6순 중에서 24중을 했고 점수는 28점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정조는 신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 화약무기인 매화포(지뢰)를 시험하게 했는데, 마침 비가 왔다고 한다. 화성유수 겸 장용영외사 조심태에게 비가 오는데 무기시험이 가능한지 묻는 장면이 나온다. 조심태는 자신감을 보였고 무기시험은 성공한다. 

 청의 건국자 누르하치가 명의 원숭환이 사용한 홍이포(지뢰)에 의해 죽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매화포가 병자호란 때 쓰이지 못한 것을 개탄했다고 한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1살밖에 안된 세자 이공이 순조로 즉위한다. 영조의 어린 신부였던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고 노론벽파는 다시 정권을 장악해 장용영을 혁파한다. 

앞서 말했듯 조선 후기는 3정의 문란이 매우 심각했고 정조는 그 중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 병농일치의 군대를 양성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가 장용영과 화성 설치였다. 따라서 정조 개혁의 핵심은 장용영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것을 친 것이다. 게다가 정순대비는 장용영의 둔전을 내수사(왕실재산을 관리하던 관청)로 편입시켜 사유화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물론 사간들의 반대로 인해 저지되긴 했지만 조선후기 국가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은 이렇듯 권력을 장악한 집단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조 사후 순조~헌종~철종 기 60여 년의 세도정치 시기는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고 이권을 빼돌리기에 급급한 관료들이 장악한 부패한 시기였고, 때마침 일본을 비롯한 서양열강의 압력에 대응할 능력은 전혀 없는 무능함을 보여준 암흑의 시대가 되어벼렸다. 

 정두언 전 의원 말대로 ‘MB는 정권을 잡은 게 아니라 이권을 잡았다’는 표현처럼 국가권력이 부패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정조 이후의 시대를 보면서 다시 경계하게 된다. 

 총알을 막지 못하는 방탄복, 물에 가라앉지 않는 잠수함 등 방산비리를 저질러 놓고도 ‘생계형비리’라고 드립쳐대는 더러운 인간들이 있는 나라가 제대로 외침을 막을 수 있겠는가?

 무고한 어린 학생들이 바다에 수장되어가고 있는데도 그 시간에 뭘 했는지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 가겠는가? 

 정조의 애민사상과 개혁정치를 통해 현재를 비춰본다. 역사를 통해 배우는 바가 크다. 오늘도 무예도보통지 편찬의 의미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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