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스페셜 에디션 한정판)
하야마 아마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이 도서는 제1회 일본감동대상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도서로서 저자 '하야마 아마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내용인데 도서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멋진 말들은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물아홉 생일날 조촐한 혼자만의 파티를 연 하야마 아마리는 삶의 의욕도 없고 취미도 없었으며 친구 또한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삶이 싫어서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 자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대신 죽기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멋진 갬블을 즐기며 호화롭게 7일간을 즐기다 마지막 순간에 죽기로 결심하고 목표를 세운 후 스물아홉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목표를 라스베이거스로 계획한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파견사원, 긴자의 호스티스, 누드모델 일을 하면서 라스베이거스에 가기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바쁜 삶을 살아가는 그녀는 스물아홉 마지막날 죽기로 한 데드라인을 설정해 놓자 죽을 텐데 무슨 일이든 못하랴하는 식으로 삶을 대범하게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목표'란 커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삶의 목표가 있고 없고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주변에는 삶의 목표가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어정쩡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는 도서라고 생각합니다.

죽을 각오로 일을 하는 주인공 '하야마 아마리'는 라스베이거스라는 목표를 세운 후부터 삶의 의욕을 되찾게 되고 친구를 얻게 되었고 73Kg이나 되던 몸무게가 빠져 날씬한 몸매가 됩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적극적인 여성으로 탈바꿈합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늦더라도 목표가 없는 사람보다도 빠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번 결정한 목표는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목표가 흔들리면 그에 따른 자세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확고히 정해져 있다면 꾸준히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 '하야마 아마리'는 스물아홉살을 바쁘게 생활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삶의 의욕이 없다는 둥 자살하고 싶다는 둥의 엉뚱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게 됩니다. 사람은 바쁠수록 좋다고 합니다. 할일이 없는 것 만큼 공허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라스베이거스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사람이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에필로그에서는 결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게임을 즐기는 그녀가 나옵니다. 삶의 의욕이 없다면, 삶의 목표가 없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닥치는 대로 부딪혀 봐. 무서워서, 안 해본 일이라서 망설이게 되는 그런 일일수록 내가 찾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라고요. 지금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려 하는데 망설이신다면 한번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뚝배기를 닦아 뿌링클을 사다 - 조져진 세대의 두 번째 페르소나
이용규 지음 / 좁쌀한알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녕하세요. 이번에 소개해 드릴 도서는 뚝배기를 닦아 뿌링클을 사다입니다. 지은이는 이용규님이고 펴낸 곳은 좁쌀한알입니다. 지은이 이용규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서울 개포주공2단지에서 4.6kg의 몸무게로 태어났습니다. 1996년 강남구청이 집계한 신생아 체중 1위였다고 전해집니다. 대학에서 연극과 정치학을 배웠습니다. 코난 오브라이언의 말처럼 이대로 고대 그리스에서 구직해야 한단 말인가요? 그러나 미련하게도 배우와 코미디 작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걸 가지고 최고가 되기보다는 내가 믿고 좋아하는 것으로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다고 합니다. 정치문화웹진 이음에 칼럼을 연재했으며, <월간 프리킥><에스콰이어 코리아>에 외부필자로 기고한 바 있습니다. 지금껏 두 편의 연극과 한 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했습니다.

 

-------------------------------------------------------------

처음 이 도서를 접했을 때 도서의 제목인 뚝배기를 닦아 뿌링클을 사다를 보고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으며, 뚝배기를 닦고서 왜 뿌링클 (청량음료 스파클의 일종일거라 생각했습니다)을 사먹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도서의 몇페이지를 읽고 나서 제목이 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뚝배기를 닦았다는 것은 저자가 알바로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뚝배기를 닦았는데 거기에 붙은 계란찜 찌꺼기가 잘 닦이지 않았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뿌링클을 샀다는 것은 저자가 좋아하는 치킨 업체의 치킨 메뉴 이름입니다. , 치킨을 주문해 먹었다는 뜻입니다. 그 때 먹던 치킨은 우리 세대의 상실감 완화제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실제로 저자는 현재 27세입니다.

 

우연한 경로로 이 도서를 접했는 데 처음 도서를 받았을 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부분 몇페이지를 읽고서 저자의 대단한 필력에 놀랐습니다. 필력과 함께 어휘력이 풍부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적재적소에 어휘가 배치가 되어 상당히 고급스러운 문장으로 표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저자의 글을 평가할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점 너그럽게 보아 주시길 바랍니다). 1부의 4장에 나오는 맛집의 설거지에서부터 상당한 재미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대로 도서에 몰입되어 계속 읽어나가게 되었습니다. 4분의 1쯤 도서를 읽었을 때는 이 도서를 많은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딸에게 추천하고픈 도서이기도 합니다. 대통령에게 청와대 대변인이 있듯이 20대에게는 이용규님이라는 대변인이 있는 듯합니다. 그만큼 이 도서는 20대의 애환과 슬픔, 고통, 환희 등이 담겨져 20대를 대변하는 글로 가득합니다. 도서를 통해 20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때론 공감하고 때론 수긍하며 이 도서를 읽어나갔습니다. 이 도서는 에세이 또는 르포르타쥬 형식이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자서전적인 요소도 가미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은이는 27년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경험들에 대해 피력하고 있는데요. 알바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20대에게도 중요한 것이 이며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20대에 알바를 해보았지만 사실 그 시절에는 돈이 잘 모이지 않습니다. 알바를 해서 받은 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바도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경험과 지식들이 쌓이고 쌓이면 그것도 나의 무형자산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저는 20대가 알바를 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입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20대들을 보면 참 좋아 보이고 우리나라의 미래가 보인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20대 때 여러 가지 알바를 해 보았고, 재수학원도 다녀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알바와 재수생활에 대해 피력했을 때 제 가슴속에서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이 도서는 저에게 재미와 함께 긴 여운을 주는 그런 도서였습니다. 그럼 부분 발췌한 본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서울, 대학생, 중산층, 인싸: Z 세대의 첫 번째 페르소나]

 

Z세대란 누구인가? 대체로 1996, 또는 1997년부터 2010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시기에 태어난 이들은 대체로 특정한 경험을 함께 겪었고, 그에 따라 특정한 시각을 공유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젊기 때문에 특별한 게 아니라, 하필이면 이 시대에 같이 젊었기에 특별한 생각과 행동을 한다. 이것이 세대론의 전제다. 그들이 누구인지야 사전적 인구학적 정의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달리 해야 한다. Z세대란 무엇인가? 김난도 교수나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정의하는 바는 있다. 개인주의, 마이싸이더, 멀티 페르소나, 정치적 올바름과 ESG에 민감함 따위로, 마케팅업계에 있는 이들이야 이 세대를 소비주체로 바라볼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분석들도 모두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들로는 충분하지 않다. 감각과 인상을 바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Z세대란 말로 누군가의 뇌리에 스치는 무언가를 잡아내려면 그 단어가 품은 구체적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조합되어 그려지는 페르소나가 필요하다. 그것은 X세대의 서태지나 586하면 떠오르는 여러 얼굴들처럼 특정한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페르소나의 이미지를 전부 가진 인물이 주변에 정말 존재하는지는 상관없다. 어차피 수백만의 인구가 한 단어로 추상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럼 Z세대의 페르소나는 무엇인가? 드라마 한 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드라마에서 특정한 집단을 그려내는 방식에 주목하는 건 의미가 있다. 드라마는 대중 일반을 겨눈 창작물이고, 그럴수록 집단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표면을 반영하니까. 알고있지만,(2021)은 그런 면에서 유효한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20대 대학생들의 고민을 진솔하게 담았다고 평가받는다. 사랑보다 진정 중요한 고민은 없단 말인가? 인정한다. 드라마는 훌륭했고, 연신 떠오르는 내 옛일에 착잡하고 괴로웠으니까. 다만 내가 주목하는 건 바로 이것이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대생들이 하나같이 다 멋진 인싸들이라는 거.

 

이들의 모습은 상징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서울에 거주하기나 서울 시내의 4년제 대학에 다니는 중산층 이상 18~24세의 모습이다. 이것이 미디어가 투영하는 밝고 유쾌한, Z세대의 페르소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서울의 대학생들이란 원래부터 대표적인 표본이 아닌가. 미디어가 이른바 20대나 청년을 묘사할 때 가장 먼저 찾는 표본 집단. 그런데 여기 통계 하나가 있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재학생 가운데 22.37%만이 국가장학금을 받는다 (전국 평균은 53.56%)는 것. 국가장학금은 가계 재산과 소득을 따져 소득분위를 산정하고, 거기에 따라 등록금이나 장학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0분위, 1분위, 2분위가 가장 많은 액수를 받는다. 9분위와 10분위는 지급받지 못하지만 8분위까지는 소액이나마 지급받을 수 있다. 2021년 기준으로 소득분위 8분위의 소득인정액은 월 9,752,580원이다.

 

웬만큼 살더라도 어느 정도는 수혜받을 수 있다. 그런데 서울의 대학생들 가운데 77.63%가 소득 피라미드의 최상위에 있거나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하면, 오늘날 서울의 대학생들은 정말로 여유롭다. 이를 두고 우리 세대의 어두운 면이 매체에서 사라진 이유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과거 논스톱4>(2003)에는 청년 실업 30만을 운운하는 고학생 앤디가 있었고, 미생(2014)에도 천대받는 고졸 인턴 장그래가 있었다. 세대의 어두운 자화상을 어떤 식으로든 반영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주류 미디어에는 2세대의 대른 면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거의 없다. 미디어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밝음의 이면을 반영할 세대의 또 다른 페르소나가 부재한 것이다.

 

[Z세대의 두 번째 페르소나, DeGeneration-Z]

 

생각해보면 취업, 결혼, 출산이 어렵다는 말을 듣는 것은 '청년이지 'Z세대'가 아니다. Z세대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나타난 신인류고 청년은 연민을 자아내는 대상인 것일까. 실상 '청년'이라고 일관되게 불리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2030, 때로는 90년대생, 때로는 20, 아니면 이대남 같은 식이다. 이들은 이름만큼이나 막연한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시혜적 정책을 받아먹으며 가끔 '청년과의 대화에나 불려 나오는 객체쯤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시선이 (동정이나마) 따뜻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청년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장 먼저는 이른바 '공정' 이슈 때문이었다. 일자리나 기회에 관한 정부 정책에 반발할 때, 경쟁심리를 내면화했다',

 

'역사적 경험치가 부족하고 지금의 시점에만 주목한다', '반공교육 때문에 보수적이다'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젠더와 관련된 갈등에서도 그랬다. 이를테면 남성들은 '권력을 가졌음에도 상실감을 운운하며 징징대고 있는 존재들이다. 여성들로 가면 집단이기주의 감성의 진보집단'이라는 묘사도 있다. 이쯤 나열하니 좀 섭섭할 지경이지만 이런 지적들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그걸 따지자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알고 있는 Z세대의 페르소나는 이 갈등의 전선에서 비켜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계층의 특성상 이런 이슈에 서울의 중산층 1824'가 특별히 둔감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민감한 이들은 중산층 이상보다는 미만에서 더 많을 것이다. 문제에 실제로 영향을 받는 이들은 그보다도 좀 더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오히려 중산층과 대학생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만의 공정론'이라는 것이다. 근거가 있지만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계층의 공고화와 소득 양극화가 이 세대의 성장배경이라는 데는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 거기서 소외된 이들로 흙수저''헬조선'을 설명했는데 공정 이슈만 예외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20대가 보수화되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청년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정치성향 때문이 아니라 그게 피부에 와닿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2018년 여자 아이스하키 팀 남북 단일팀 구성에는 계층과 소득에 무관하게 10~30대 전반이 반대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집회를 주도한 것도 청년 전반이었다. 이들도 보수적인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Z세대라는 단어는 분명 계층을 은유하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나 다른 세대, 아니면 요즘 애들이 궁금한 어른들은 이 세대를 문화(PSG, 개인주의, 감수성, 메타버스)로만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디시 강조하건대 그런 문화는 서울의 중산층 이상 계층이 주도하는 문화다. 물론 문화의 소득별, 계층별 경계는 젊은 세대일수록 흐리다. 그러나 누구도 틱톡의 챌린지에 능한 친구와 뒷주방에서

 

일하는 친구를 동일한 인물로 설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세대 개개인으로부터 나오는 저마다의 고통과 구체적인 반발은 실존에 관련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를 듣는 데 관심이 없거나 달갑지 않아 하는 것이 문제다. 마침 이들의 목소리는 종종 여러 억하심정과 피해의식, 자기연민이 뒤섞인 것이다. 합리적이기보다는 거칠다. 이때 '징징거림'이란 더없이 편리한 표현이리라. 그렇게 응석받이 같은 세대라는 이미지가 씌워지는 이들은 세대 안에서도 정해져 있는 것이다. 나는 약간의 과장과 반발심을 섞어 이렇게 말한다. Z세대 안에는 달갑지 않은 집단이 있다고, 다른 세대가 정의하는 Z세대의 특징들, 그 가운데 밝은 단면이 인싸들에게 비춰지는 사이 발언권을 상실한 채 비난에 직면한 이들이 있다고, 세대의 보편적 특징은 이들에게 부정적으로 씌워진다고. 더불어 성별로든 계층으로든 만연한 세대 내 갈등의 최전선에 선 집단이 바로 이들이라고. 동시대의 동년배로 살면서 Z세대란 이름이 어색한 이들이 있다고. 이들을 무엇이라 이름해야 하나. 나는 이들을 조져진 Z세대, DeGeneration-Z(DZ)라고 부르겠다. 그들이 이 세대의 두 번째 페르소나다.

 

-------------------------------------------------------------

[언더독 콤플렉스]

 

"그럼 앞으로는 뭐 할 거니?""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궁해졌을 무렵, 나는 입대 날짜를 알아보게 되었다. 스물넷의 삶이 알바몬과 인스타그램 사이에서 미적일 때 써먹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렇게 근황을 알리다 보면 열 받는 질문이 몰려오기도 했다. “정말? 아직도 안 갔어?”, “너 군대 다녀온 거 아니었냐?” 사고 싶지 않은 동정을 유발한 건 덤이고, “아이구”, “진짜? .” 그렇지만 대단한 장점도 있다. 앞날과 진로에 대한 물음을 감시 틀어막을 수 있고, 때로는 식사라도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 불쌍해 보이는 건 싫지만 공짜 밥은 좋다. 어떻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종종 미래에 관한 얘기로 흘러간다.

 

어떻게 살았고요, 그래서 이렇게 살 겁니다. 그걸 위해서 이런 노력을 하고 있죠.” 논리적인 인과관계로 선명한 장래를 설명해야 할 것 같지만 내 구구한 과거에서 도출되는 건 절절한 꿈과 막연한 계획일 볼로 설득력은 없다. 그런 소리를 어쩔 수 없이 지껄여야만 하는 날이 있다. 그럴때 가니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같은 부모님의 타박은 오히려 익숙하다. 진짜 난감한 건 처음 본 사람을 마주했을 때다. ,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앞으로는 뭘.? 이렇게 악의 없는 눈동자와 만나게 될 때면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 게 없다고 하기에는 바쁘게 살았는데, 뭔가 했다고 하기엔 남아 있는 게 없거든요. 늘 돈을 번다고 뛰어다녔다. 하지만 수중에 쥐는 돈은 언제나 며칠 술값 정도였다. 연극을 전공했으니 글을 쓰겠다고 했다. 밤새 머리를 쥐어뜯어도 내 희곡과 단막극들은 아직 HWP 파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광고를 공부하겠다고 도망갔다. 거기서도 날밤을 까며 회의와 토론을 하고 로직을 뒤집었다. 그러나 내 기획서를 공모전에 입상시켜주는 AE를 만나는 일은 만무했다. 야심 찬 스타트업에서 마케팅 인턴을 한 적도 있다. 그곳에서는 에어건 없는 방구석에 고양이 네 마리와 숙식하거나 인턴보다 늦게 출근하는 대표를 만나는 별일을 연달아 격었다.

 

재직증명서도 월급도 없이 우당탕나왔다. 재수생 시절부터 붙들던 학원 조교, 과외, 강사 일자리는 은근한 스트레스만 가득했다. 월급을 반드시 하루 이틀 늦게 주던 원장 선생이나 수수료를 60%씩 떼어가려던 중개업체 아줌마들. 다시 만나면 꼭 한번 멱살을 잡고 싶다. 그럼에도 누군가 미래를 물으면 나는 항상 뭔가 있는 척 둘러댔다. “열심히 사셨네요!”이런 반응을 이끌어내자는 본능이었다. 껍데기에 비해 구리기 짝이 없는 알맹이를 애써 외면하면서. 그러고 있노라면 어딘가 찔려왔다. 내 범박한 미래가 멀리서 팔짱을 끼고 혀를 차는 듯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가고 싶은 길도 있다. 앞으로 대체 뭘 할 생각이냐면, 바로 로빈 윌리엄스다. 그는 나의 우상이다. 최후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닮고 싶은 사람이며 내가 연극을 전공하게 된 하나뿐인 이유다. 그의 장기이던 스탠드업 코미디는 내 오랜 꿈이다. 나는 독백 대사를 기가 막히게 처리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인섬니아의 싸이코도, 죽은 시인의 사회의 빠삐용 참스승 키팅 선생님까지도 해내고 싶다.

 

알라딘의 지니 목소리를 절륜하게 울려내고 연극을 연출하며 단편영화를 감독하고 기깔 나는 시나리오도 쓰고 싶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실제로 이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로빈 윌리엄스 아시죠? 죽은 시인의 사회보셨어요? 키팅선생님이요. 저는 그 양반처럼 연기도 하고 연출도 하고 시나리오도쓸 겁니다.” 20대 중반 남자애가 이런 막연한 소리나 주워섬기고 있다는 것은 일곱 살짜리 아이가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 , 정말 대단하구나. 열심히 공부하렴. 그러고 보니 열심히 공부'는 잊고 대단하구나에만 도취해 자란 건 아닐까.

 

, 아무래도 좆됐다. 스물넷의 여름, <마션>의 주인공이 느꼈을 자기성찰이 귀납적으로 입증되고 있었다. 나는 결국 군대에 갔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해 도피성 유학은 못 갔지만, 일단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도피성 입대는 해냈다! 아무 생각 없이 각개전투로 몸뚱이를 굴릴 수 있기를. 그러나 모두가 이등병으로 평등한 논산훈련소에서조차 달갑지 않은 형 대접을 받아야 했다. 두세살 어린 친구들에게서 전역하면 뭐 하실 거냐'는 질문들이 똑같이 날아들었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실패는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선명하던 꿈은 흐려져만 갔다. 힘겨운 날이면 어딘가를 올려다보며 자신을 다잡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발끝으로 발끝만 만지는 겁보가 되어 있었다.

 

그 대신 굳어진 건 어느 날 배겨 있던 언더독이라는 자의식이었다. 그것은 콤플렉스였다. 내가 사는 세상은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어느 세계의 건너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열패감, 서민 신분은 넘어서는 아이들만의 세련된 여유와 배부른 푸념에 대한 질투, 적어도 나는 허영이 아닌 진짜를 찾아왔다는 비틀린 자부심, 그리고 그 자부심조차 장담할 수 없어 해져버린 자존감. 스무 살 이후 무럭무럭 자라온 이런 류의 지각들 때문에 생겨난, 어디서나 고개를 굽히되 눈만은 치켜뜬 오기로 포장된 자기연민을 악무는 콤플렉스. 강박증처럼 들러붙은 이 콤플렉스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거름 냄새가 밤에도 진동하는 논산에서, 모포를 뒤집어 쓰고 침착해지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삶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어디서부터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기 시작한 것인지 짚어보기로 했다. 이것은 틀림없이 너저분한 실패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써내는 것은, 이 세대의 실패 서사는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서점에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 이야기에는 자기연민, 피해의식, 억하심정, 비아냥 따위가 그득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즐겁게만 살았다면 무엇도 새롭게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살면서 웃는 일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런 만큼 웃는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좀 건방지게 얘기하자면, 올려다보는 삶의 묘미를 당신도 알면 좋겠다. 하나 더, 나와 같은 인간형이 분명 도처에 있을 거라는 짐작 때문이다. 고맙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입에 붙은 사람, “힘들다"를 무감하게 내뱉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 간선도로를 달리는 불꺼진 버스에서 문득 콧등이 시큰해지는 사람, 취미가 뭐냐는 말에 한참을 고민해야 하는 사람, 함께 있어도 혼자 생각하는 사람, 걷고 나서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 그러나 다시 입을 다문 채 짐짓 담담한 척 걸어갈 줄도 아는 사람. 나는 그들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

[재수학원 블루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청춘의 배경은 캠퍼스다. 대학 새내기의 스무 살도 설익기야 하겠지만, 나는 입시에 실패해 아물지 않은 유년으로 스무 살을 맞은 소년이었다. 청춘이란 자리의 말석에도 못 낀 듯한 기분으로 일 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페퍼톤스 또한 사랑했던 밴드였다. 그들 초기작에 꼭 껴 있던 여성 객원 보컬의 달콤한 목소리만 좋아한 건 아니었다. 세계정복(2005)이나 남반구(2005)처럼 꿈같은 가사가 소년의 몽상으로 튀어드는 발랄한 멜로디가 좋았다. 그럴 때가 있었지만, 어느새 그들의 노래는 훨씬 현실 세계에 가까워졌고 객원 보컬에 의존하던 가창력은 유희열 씨의 훈련으로 깔끔해졌다.

 

내가 갈피를 못 잡고 스물로 흘러갈 때, 페퍼톤스는 어느덧 캠퍼스 라이프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카이스트를 나온 어른들 아니었던가. 어떤 면에서는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재수학원 통학버스에서 짙푸른 캠퍼스의 봄을 상상하는 건 너무 처량했다.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꼭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곡을 찾았다. 작년에는 신보를 반가워하며 잘만 들었던 노래란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대신 위안이 되었던 건 당시 데뷔했던 여자친구의 유리구슬이었다. 예전의 우상들과 달리 어쩐지 아득한 아이돌은 열패감의 대증요법으로 괜찮았다.

 

아련하고 풋풋한 아이돌, 남자아이에게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할까. 사랑스럽고 편안하다. 둘 중에 하나도 어려운데. 그들에게 마음을 맡기고 창문에 기대 잠드는 것이 스무 살의 매일 아침이었다. 서울 남쪽 위성도시에서 아이들이 모여들면 오전 7시 반이었다. 버스 창가는 스물들의 이십 년 어치 한숨으로 뿌옇기만 했다. 쏟아지는 아이들 사이로 잠에서 깨어 가방을 추스르면 꼭 이어폰이 한 짝 빠져 있었다. 학원으로 들어서며 나는 부스스한 눈알을 굴렸다. 트와이스도 마마무도 아닌 이 애매한 인지도의 그룹(그때는 그랬다)을 좋아하는 취향이 이어폰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은 아닐까? 노란 통학 버스에서 내려 매일 출석하게 된 학원은 평촌 학원가에서 유일하게 건물을 홀로 쓰는 곳이었다. 적어도 1층 응접실은 자동차 대리점처럼 통유리로 노출되어 세련되고 넉넉했다. 교실도 첫눈에는 그랬다.

 

책상은 합판을 겹쳐 만든 공립학교식이 아니라 매끈한 플라스틱이었고, 의자도 칠 벗겨진 데 없이 말짱한 베이지색 프레임이 더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첫인상은 채 몇 시간을 가지 못했다. 버스가 모여들고 경기도 남부 곳곳에서 온 아이들을 토해낼수록 강의실에는 오륙십 명씩 욱여넣어졌다. 매끈하던 책상에는 금세 지우개 가루가 덩어리져 날렸다. 지우개 분진이 기침을 얼마나 유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뒤쪽 창가 여학생부터 교탁 앞 반장까지 감기가 옮는 데 채 보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졸음을 견디려 교실 맨 뒤 입식 책상에서 하루 종일 서 있었다.

 

거기서 비좁은 501호를 조망하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5층에서는 유일하게 창문이 있던 우리 반의 이름은 A1. 문과에서 가장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모아 놓은 반이었다. 20152월의 이야기다. 그해 학원가 문과 1반의 주류는 운 나쁜 외고생들이었다. 재수학원의 반 배정은 보통 전년도 수능의 표준점수를 기준으로 한다. 전년도 시험은 유독 국어가 어려웠다. 영어와 수학에서 만점을 맞고도 국어에서 당황해 미끄러진 특목고생들이 많았다. 이들은 내가 추가 모집을 붙잡던 연말부터 일찌감치 평촌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안양, 군포, 수원, 멀리는 과천과 안산에서 온 모범생들이었다.

 

우리 반의 첫인상으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건 그 집단 절반쯤의 희한한 복색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트레이닝복이나 후드티가 절반을 차지했다면, 나머지 절반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교복은 아니고 대학교 과잠바 같은 건데, 뜻을 금방 짐작할 수 없는 이니셜을 등판에 새겼다. 'GCFL이 대체 뭐란 말인가? 과천외국어 고등학교란다. 확실히 해두자. 절대 외고나 국제고에서 단체복을 맞추는 풍속을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도 대학에 들어가 '과잠'돕바'를 맞춰 입었으니까 (솔직히 내가 지닌 겨울 옷다운 겨울옷은 코트와 숏 패딩 한 벌, 그리고 돕바가 전부다).

 

다만 그다음 문과 1반의 느낌으로 다가온 게 그런 옷을 입는 애들 몇의 꼬락서니였을 뿐이다. 이 친구들은 이랬다. 어느 날은 점심 때 '건국우유를 줬다고 정말로 성을 낸다. 그날 우유를 먹지 않은 날(다이어트 때문이었다) 유심히 관찰했는지 친근감을 표한다. 그러다가도 수업 필기 노트를 한번만 보여 달라니 정중하고 재수 없는 웃음으로 거절한다. 월간 모의고사 이틀 후 복도에 50등까지 실명과 등수를 붙여내는 빌보드에 일희일비한다. 국어 점수만은 높은 편이었던 내게 시험 후 관심을 표한다. 그리고 항상 50~60점쯤 하던 내 수학 점수를 확인한 뒤 안도하고 돌아간다. 수업시간에 졸다가 필기를 못한 것도 사실이고, 단 한 번도 차트 인을 하지 못한 내가 우스울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내 점수를 듣자마자 대놓고 실실 쪼개며 돌아설 수 있나. 너무 노골적이라 순수할 지경이었던 이런 행동양식은 그 잠바를 입는 친구들에게서만 볼 수 있었다. 그나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던 친구(J라고 하자)가 있었다. 완벽한 모범생이었다. 짙은 테와 훨씬 짙은 도수의 안경, 파묻히다시피 문제집에 몰두하는 모습, 교탁 바로 앞자리를 삼월부터 오월까지 고수하던 의지, 무엇보다 가끔 영어 지문을 질문하는 나에게 비추던 한심하단 눈빛까지도. 그래도 몇 번인가 얘기해보니 그는 나처럼 락을 사랑하고 이념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그걸 숨기는 듯 언뜻언뜻 알아주기를 바라는 눈치가 엿보였고, 어떤지 동류를 발견한 것처럼 선부른 흥미가 생겼다.

 

필통에 전자기타 피크가 있고, 쉬는 시간에 자유론을 읽는다면 - 호기심이 돋는 것이다. 범생이와 언더독 둘 중에 무엇이 녀석의 정체에 더 가까울 것인가 하는 답은 곧장 나왔다. "나는 드림 시어터를 자주 들어." "그게 메탈이라기엔 너무 대중적이지 않나?"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원래 나쁜 건 아니잖아 (이런 주제를 재수학원에서 꺼낸 나도 할 말은 없다.) "그건 구시대의 유물이잖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대화 속에서 가 선사한 깨달음이 있기는 했다. 녀석 앞에서 내 기이한 취향'이랄 것은 그저 얕은 게 아닐까 하는 것. 그러니까 데스메탈을 좋아하고 이념서를 훨씬 열심히 탐독한 녀석에게 나는 마니아 자격조차도 없었다.

 

바로 이런 식의 홍대병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꿈틀거리는 짜증에 자기성찰도 호기심도 미뤄두었다. 이게 다 한국식 범생이들의 한계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긴 그들도 내가 달갑지 않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맞은 준거집단, 그곳의 주류와 동떨어지게 되었다. 지금 보면 당연하지만 그때는 당황했다. 나도 등판에 뭐라도 써 붙여야 하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면 수학 점수를 끌어올려야 하나? 이건 어려웠다. 그렇지만 둘 다 싫었다. 비아냥대자면, 걔네들과는 출신성분부터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나는 공립 고등학교 출신이었고, 수학과 영어에서 깎인 점수를 국어로 메운 덕에 턱걸이로 문과 1반 커트라인에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학원이었다면 2반에 가야 했을 것이다).

 

특히 들어가자마자 치른 사설 모의고사에서 수학 47, 그다음 달에는 OMR카드 마킹을 잘못해 '8점을 찍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3월에도 4월에도 반에서 꼴찌였다. 교무실에서 듣기로는 학원 역사에 남을 화려한 데뷔였단다. 나도 내가 꼴등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았다. 수능과 모의고사 점수란 정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4등급이 1등급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전 과목 만점을 우연히 맞은 친구는 있을 수 없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연기를 못해도 끝내주게 잘생겨서 주연을 따내는 배우, 맞춤법도 안 맞는 감성 글귀로 인스타 팔로워들에게 책을 팔아먹는 작가, 아버지를 잘 만나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논문과 표창장을 첨부할 수 있는 고3 따위는 적어도 수능이란 판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싼 사교육으로 성적을 올리는 부자 아이들이 있겠지만, 돈이라도 쓰는 노력이 가상하지 않은가? 나는 그때까지도 재수학원에 들어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 나는 학교에서 학원으로 옮겨 온 것이었다. 이야기에는 목적이 필요하며, 목적은 대학이었고,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필요하지 않다. 반에서 꼴찌인 나는 대화해봤자 얻을 게 없는 친구였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과목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단과 목적이 지배하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것은 꼴찌에게 슬픈 일이었다. 학교는 아무런 공통점 없이도 모두와 친해질 수 있었던 전인격적 공간이지만, 학원은 달랐다. 친해지자면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갈 꼬투리를 찾아야 했고, 다가가려면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이러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진리를 깨닫기까지는, 이때부터도 한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어쩔 줄 몰랐다. 이 또한 적응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침착하게 어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유년을 졸업하지 못했다. 자꾸만 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두 내 이름을 알고, 어둠의 남학생회장이었던 내 진가를 알아주는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약아빠진 스무 살 모범생들 말고, 아직 열일곱에서 열아홉에 머무르고 있을 유쾌한 녀석들이 그리워진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월이었다. 봄기운에 홀려 있다 눈을 떠보니 다시 혼자가 되어 있었다.

 

슬슬 반팔이 몸에 익었다. 점심때 자다 깨어보면 모두가 그 시간을 쪼개 문제집을 풀었고, 뭘 하다 이제 일어났냐는 듯 한둘씩 나를 쳐다보고는 했다. 낮잠은 나른하지만 야릇한 우울과 환멸도 주었다. 문과 1반 꼴찌의 열등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걸 억지로 감내하던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수학 문제집을 붙들고 있었는데, 막혀버린 문제를 데면데면하지 않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옥상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학원가의 간판과 인서울 진학비율이 내걸린 현수막에 햇빛이 부서졌다. 큰 숨을 한 번 쉬었다. 이윽고 빈 교실을 찾아 내려왔다. A4 용지 상자를 주워 곧장 책들을 옮겨 담고, 교무실로 가서 퇴원 신청을 했다. 아버지와 상의한 일이라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그 볕이 외곽순환도로 고가에 가려질까 무서웠다. 뛰듯 내려오는 동안 백팩도 종이상자도 무거웠지만, 다행히 햇빛은 여전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훤히 트인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졸면서 익숙한 정류장에 도착했다. 유년이 아로 새겨진 동네로 돌아오는 낮 기운에 잠깐, 눈물 나게 행복했던 기억이다. 나는 정말 내 인생의 영토를 조금도 넓히지 못하고 스무 살 다음을 맞으려던 걸까? 재수학원 삼 개월 만에 나는 승려와 사제에게도 어렵다는 독학재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 궤도란 성공적 대입을 조력하는 누군가로 둘러싸여 있다.

 

대형 학원의 정치한 커리큘럼과 강사진, 졸음을 깨우는 사감 선생, 당장 눈앞에 보여 몸이 달게 만드는 경쟁자들. 이런 것들 없이도 수능을 잘 본다는 건, 즉 그 모든 좋은 조건 속에서 공부한 경쟁자들을 밟고 올라선다는 건 불가능하다. 천재이거나 정말 비상한 각오를 악물었거나 학원 밖 다른 유희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을성이 있지 않다면. 물론 내가 수재를 자임하던 시절은 열두세 살 언저리에 끝났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결말은 예정된 일이었다. 학원을 나왔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인내심의 빈곤, 조금이라도 고된 것은 피하고 당장 안온한 길로만 찾아드는 습성.

 

아무리 변명을 쥐어짜봐도 학원 생활을 못 배기고 도피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적응하지 않고 회피하기. 이것은 놀랍도록 비슷한 패턴으로 내 20대를 지배하게 된다. 기이한 취향들을 제외하고도, 내 딱한 콤플렉스는 다양한 측면에서 뿌리박힌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유독 셈에 약했다. 이를 일찍이 간파한 아버지는 수학 교육에 매우 공을 들였다. 그는 공대를 나왔는데 아들은 주먹구구도 틀려먹으니 여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꽤 오랫동안 당신이 직접 공부를 시키려고도 하셨다. 하지만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때려봐도 벽창호였다. 학원이나 과외선생님 같은 전문가의 손에 맡겨진 중학교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놀랍지만 당연하게, 수학 문제집을 단 한 번도 끝까지 풀어본 일이 없다. 내 세계관에서는 신기하게도 끈기와 고집이 반비례해왔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떠나면 역시 돌아섰다. 수학을 잘하는 유전자를 물려줬어야지, 그건 엄마랑 아버지 몫 아닙니까? 이렇게 변명하기에는 회피한 게 너무 많았다. 그 봄날, 나는 집에서 오랜만의 고요를 누리고 있었다. 퇴근한 아버지는 나를 보고 놀랐다. 학원은? 내가 채 몇 마디를 하기도 전에 그는 사태를 모두 파악했다. 그는 질리고 말았다. 어릴 때 투정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저놈의 고집이 기어이 사단을 내는구나. 이것이 내가 애쓰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당시 아버지의 심경이었다. 학원에 돌아가라, 그럴 수는 없다. 고성을 내며 저녁나절을 싸웠지만, 아버지는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는 나와 대화를 그만두었다. 다음 날 아침 시골로 내려가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로빈 윌리엄스 때문에 전공을 고르다니]

 

나는 수능을 조져놓고도 칩거하지 못했다. 나는 다음 해 1, 그러니까 시험이 끝나고 두 달도 안 되어 유럽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포르투갈에서 돌아오는 여정. 이렇게 떠날 돈을 모아야 했다. 동네의 절친들과 여름부터 짜놓은 계획이었다.

함께 떠날 친구들은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얘가 올해도 망했나 보다, 하는 생각쯤을 하면서. 내가 이번에 무슨 등급을 맞았네, 무슨 과목이 어려웠네 하는 얘기를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술자리에서 여행에 대한 기대로 열을 올리곤 했다. 요컨대 비행기 예약을 서두르자거나 프리미어리그 경기 티켓을 미리 예매하자거나 기왕이면 파리에서 런던은 페리를 타고 가자고 하는 식으로, 그 사이 너 갈 수 있는 거지?" 라는 식의 물음이 가끔 던져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뻥뻥 쳐대는 큰소리로 일관했다. 입은 그랬으나 눈동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말수가 줄어든 대신 자주 허공을 보는 내 눈알을 바라보며 길동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술에 취해갈 때면 꼭 안주를 하나 더 시키자며 모스크바에서 한 끼 덜 먹지 뭐라고 지껄이는 내 모습이 어때 보였을까. , 상상하고 싶지 않다. 여름부터 과외로 벌어들였던 돈이 꽤 됐었다. 그런데 막상 수능이 끝나고 남은 돈은 필요한 자금에 턱없이 모자랐다. 여행은 한 달 하고 보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하여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낮 동안은 논술 선생님이 소개해준 분당의 학원에서 조교 일을 했다.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동네 편의점에서 밤 열 시부터 오전 일곱 시까지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짜증스럽고 피곤한 일과였다. 새벽 취객들이 지시하는 담배 이름을 외우는 일, 시재 점검에서 20원이 모자라는 이유를 찾는 일, 이제는 꼴도 보기 싫은 수능 기출문제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분당 일대의 고등학교 내신 문제를 편집하는 일이 말이다. 입은 다물어도 티를 벅벅 냈기 때문에 점장은 손님들이 야간 알바 표정이 왜 이리 안 좋더라"라며 타박했고, 원장은 ", 키보드 부서지겠다. 화났니?"라고 걱정했다.

 

화났죠, 당연히. 제 자신에게요. 지금 와서 핑계를 대자면 마일드세븐''메비우스'로 이름이 바뀐 걸 내가 어떻게 알고, '레종'을 달래서 건네줬더니 “1mm 말고 5mm"란 대답이 돌아오는 걸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겠나? 마찬가지로 학생이 풀어온 기말고사 문제지를 하루에 서른넉 장씩 받아나가 연필 자국을 박박 지운 뒤 스캔을 떠서 그림만 캡처한 뒤 나머지 오지선다를 윤명조 340' 글꼴로 예쁘게 치는 일을 재수에 실패한 상태에서 해야 한다면 절대로 유쾌할 수 없을 것이다. 예민한 잿빛 갱지는 어찌나 잘 찢어지던지. 더없이 피로하게 겨울을 맞고 있었다. 그때 나는 침대가 아니라 소파에서 잠드는 것이 습관이었다.

 

금요일 저녁 분당에서 돌아오면 세 시간 뒤 편의점으로 출근해야 했다. 침대에서 눈을 붙이는 건 너무 곤했다. 야간을 뛰고 온 월요일 아침에는 네 시간 뒤부터 다섯시간 뒤까지 5분 간격으로 알람을 맞춰놓고 선잠을 위한 TV를 켜둔 채 잠들었다. 모두 제때 공부하지 않은 후과였다. 그러나 그런 일상은 찬물이 등줄기에 흐르듯 다가오는 서늘함의 진짜 근원은 아니었다. 나를 괴롭힌 건 보다 근본적인 회의감이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받아들이고 성적에 맞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자존심을 꺾지 않고 삼수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둘 다 내키지 않았다. 아쉬움이나 자존심은 둘째 치고 내년 봄이 너무 답답할 것이었다.

 

하지만 입시에 두 번씩이나 실패했다면 (그리고 입시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솟아나는 감정에 따르기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성찰의 필요성을 느끼기 마련이다. 무얼 택하든 근거가 빈약했다. ‘어정쩡한대학에 가든 일 년 더'를 택하든. 봄날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 말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게 있기는 했을까. 내가 왜 대학을 가려고 했을까, 그것도 '명문대', 생활기록부 장래희망에는 기자나 사회학자가 적혀 있기는 했다. 그런 직업을 꿈꾸었던 게 진심이긴 했지만, 언론이나 사회과학의 세계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그리고 엄밀히 따져서 꼭 좋은 학교에 가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는 편이 수월하긴 하겠지만, 나는 아버지와 고모들이 제공한 차기 서울대생'이란 생각안정제'에 빠져 있었던 걸까. 그렇다고 탓하기에는 SNS에 올라오던 친구들의 합격 통보 캡처들을 부러워한 건 내면 깊은 곳에서였지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뭐가 하고 싶은 걸까. 속에서 거듭되는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게 뭘까?' 뉴캐슬 유나이티드, 박명수, 달빛요정. 나는 분당에서 돌아오는 퇴근 시간의 광역버스나 편의점에서 걸어 나오는 출근 시간의 길거리에서 그렇게 자답하고는 했다.

 

선명한 것들, 그러나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 대답. 사랑하던 것을 어쩐지 천덕꾸러기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 슬펐다. 적어도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지 안다는 확신이 있었다. 정작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물음조차 우물거리고 있었다. 스무 살이 끝나고 스물한 살을 앞둔 시기에.. 그러나 그때까지도 누군가의 열망을 대신 살아주는 것이나 막연히 지닌 동경과 환상 말고는 남은 목적이 없었다. 나는 정말 아버지의 희망과 책장에 그럴듯하게 꽂혀 있는 사회과학서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여남은 권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던 것일까? 12월 어느 금요일이었다.

 

그날 분당 학원의 원장은 나 때문에 두 시간을 허비했다. 내가 E고등학교와 N고등학교의 시험지를 반대로 입력했기 때문이다. 편의점에서 아침 7시에 퇴근하고 세 시간만에 출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바람에 전년도 기출문제를 풀어주는 기말고사 직전 강의가 의미 없어졌다. 학생들이 수업을 마친 다음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부랴부랴 아이들을 다시 불러들여야 했던 거다. 원장은 너무한 호인이었기 때문에 나를 또렷이 나무라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더욱 예쁘게 문제를 편집하고 조용히 강의실을 청소했다. 아주 박박. 오후 4시에 끝나려던 일이 6시에나 끝났다. 네 시간 뒤에는 다시 편의점에 나가야 했다. 평소에는 모란역까지 걸어간 뒤 빨간 광역버스를 탔지만, 그럴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역까지 마을버스를 타기로 했다. 나는 오 분 남은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눈앞 분당 아파트촌의 왕복 6차선이 1959년의 미국 사립학교 건물 앞으로 바뀌었다. 그 건물로 홀린 듯 들어섰는데, 대극장쯤 되는 무대에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 펼쳐지고 있었다. 화관을 쓴 '', "이건 모두 꾸며진 일이랍니다. 이 이야기는 꿈처럼 덧없는 것이에요.” 내가 골백번은 돌려본 죽은 시인의 사회클라이맥스 장면이었다. 쟤는 퍽을 연기하는 ''이다. 연극을 하고 싶은데, 의대를 가라는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못하는 캐릭터다.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면서 왜 한 번을 못 개길까? 졸고 있다는 걸 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꿈은 계속되었다.

 

장면은 연극이 끝난 뒤로 바뀌었다. “, 넌 재능이 있다.” 그 푸근함을 온전히 그려낼 글재주만 생긴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는, 키팅 선생님이었다. “내 아들에게서 손 떼시오, 선생.” 이 음성은 닐의 아버지다. 하버드 의대를 보낸다고, 부잣집이 아닌데 무리해서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냈다. 기껏 연극을 보러 와놓고는 집에서 닐에게 윽박을 지른다.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채 차에 태우려고 할 때 나는 깨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버스 왔어. 안 탈 거야?" 장바구니 든 아주머니의 짜증과 연민 섞인 눈초리였다. 그 뒤로 몇몇이 고개를 빼고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모란역 5번 출구 앞에서 광역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버스에 타고 여기 내려서 줄을 선 걸까. 서서 졸았구나. 그러고 보니 꿈을 꾸는 중간중간 앞으로 몇 발짝을 가거나 다리가 풀렸던 것도 같다.

 

반쯤 감은 눈으로 버스를 탔다. 자리에 털썩 앉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이윽고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 기분에 숨이 넘어갈 듯 눈을 떴다. 다행히 도착이 아직 조금 남아서 모두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퇴근길 버스는 평소보다 딱 곱절 느렸다. 집에 오니 820분이었다. 가방만 벗어둔 채 거실 소파에 모로 누웠다. 그러자 이번엔 거실이 웰튼 학교의 교실로 변했다.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들려 있는 밝은 무늬 나무 장판이 삐걱이는 진갈색으로 바뀌었다. LCD TV가 진녹색 백묵 칠판이 됐다. 나는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 구석에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죽은 듯 조용했다. “시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두 가지를 기억해라, 첫 번째는 대상의 예술적 표현도, 두 번째는 대상의 중요도, 영화에서 키팅 선생은 이 구절이 적힌 교과서를 찢어버린다. 저 꼰대 교장 선생이 수업하는 걸 보니 꿈에서도 결말은 똑같구나, 여기서도 그는 패배하고 말았구나, 사랑하던 제자를 잃고, 몇몇에게는 배신당하는 기분은 뭘까. 두고 온 집을 가지러 왔다는 키팅. 교탁 뒤편 사무실에서 스카프를 챙기고, 카메론이 얄굿은 시론을 옮자 빙긋이 웃는다. 쓸쓸하되 담담히 걸어 문으로 향하는 선생님. 날카롭게 벼린 긍지 같은 그런 걸음. 이내 잘 알고 있는대로, 가장 소심하던 에단 호크, 아니 토드 앤더슨이 일어섰다. 선생님, 저희는 강요때문에 서명했어요... 토드는 울음을 삼키며 책상에 올라간다.

 

하나둘 책상으로 올라서는 다른 '죽은 시인의 사회 회원들. 둘이 셋이 되고 다섯, 여섯이 된다. 그리고 나도 일어나 책상 위에 올라서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방관자들이 듬성듬성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있는 변절자들, 일어서지 못하면 그들과 다를 바 없으리라 그러나 도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내 영화가 원래 그랬듯 꿈은 3인칭으로 바뀌며 내 의지를 가로막았다. "고맙다. 얘들아 고맙구나.” 몇 번이고 돌려봤던 결말처럼 로빈 윌리엄스 아저씨는 입을 굳게 다문, 그러나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부드러운 미소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소스라치듯 꿈에서 깨어났다. 앞으로의 나날도 이렇게 불확실하고 어쩔 수 없이 비겁한 것일까? 처음 굿 월 헌팅>을 봤던 5년 전처럼 콧물을 짜내며 울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의 폐부가 다시 들먹이는 걸 느낄 수는 있었다. 환상이 너무 생생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책상에 올라서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열다섯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만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내가 무엇을 정말로 사랑했는가를. 누군가 왜 연극을 전공했느냐고 물으면 얼버무린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이니까.

 

-------------------------------------------------------------

[세상과 불화하는 자, 멋지게 젊음을 허비하다]

 

어쩐지 세상과 불화하는 것 같은데,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화해할 수 없을까? 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광고 기획을 공부해본다면 그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은 비관적이다. 실제로 깨달을 수 있는 건 이런 것들이다. 취향, 선호, 이념, 사상. 모든 것이 우리 세대와 좀 동떨어져 있다는 것. 버리기도 바꾸기도 어려운 것들이다. 그런 건 모두 몸속 세포처럼 나를 하나하나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트렌드의 아웃사이더로서 동시대의 소비자들에게 건넬 콘셉트와 아이디어를 만들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 두 해 동안 학회에서 마케팅을 공부하며 깨달은 것은 그뿐이다. 트렌드와 친해지기는 어려웠다. 누가 만드는지 모를 트렌드를 벌써 누리는 세상 사람들을 쫓는 건 더 어려웠다. , 깨달은 게 하나 더 있다. 사실 사람들이 좇는 것은 유행 그 자체가 아니다.

 

유행 그 자체를 이미 누리고 있는 힙스터들의 모습이다. 한참 마케팅을 공부한다고 법석일 때 선배들 여럿의 조인을 구하곤 했는데, 유명 대행사에서 인턴을 하던 공모전 동료에게 들었던 얘기 가운데 이런 게 있었다. "열 명 중에 여덟, 아홉 명이 느끼는 게 트렌드일 것 같나. 그렇지 않다. 그건 그냥 현재다. 열 명 중에 선도하는 한두 명이 하는게 트렌드다.” 나에게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려왔다. 그 한두 명에 들지 못하거나, 적어도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면 광고를 그만둬라. 생각해보면 함께 광고 기획을 지망하던 동료들은 대부분 나와 달리 그 트렌드가 몸속에 잘만 스며들었다. 물론 광고업에 종사하는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또 다른 선배가 들려준 얘기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나처럼 아웃사이더의 향기가 풍겨오는 비범한 인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싫어도 알아야 해. 이 업을 하려면. 이번 반기, 이번 분기, 이번 달, 이번 주에 어떤 게 트렌드인지, 요즘 애들은 무엇을, 누구를 좋아하고 찾는지 다 조사한다고. , 봐봐.

 

입사했을 때부터 쭉 정리해놓은 거야. 내가 2013년에 입사했거든? 그때는 엑소를 모르면 안됐어. 너 시우민 초능력이 뭔지 아냐?” "모르겠는데요, ?” "결빙이야, 임마. 물을 만들어내는 건 수호야. 하지만 물이 없으면 능력을 잃어버리겠지? 그래서 수호가 꼭 필요해.” SM 엔터테인먼트가 만든 세계관에서 엑소는 단순한 아이돌 그룹이 아니다. 기억과 초능력을 잃고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들이다. 시우민과 수호'도 단순히 그룹 멤버가 아니라 외계에서 온 초능력자들이다(그래서 'EXO'). 이들이 힘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이들의 무대와 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기획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여고생들을 빼면 이 디테일을 꿰고 있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학원 조교 시절, 선배와 비슷한 나이였던 선생님은 엑소가 50명인 줄 알고 있었다. 아니 무용단이에요? 라고 비웃으며 나보다 두 살 어린 고3 여학생들과 까르르 웃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건 마치 노인정에서 최신 유행을 전하며 으쓱해 하는 꼴 아니었다. 물론 자기성찰을 목적으로 광고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스물 둘, 생각해보면 진정하고 싶은 게 없었던 것 같다. 그때 선택한 건 꿈에도 꿔본 일 없는 광고 동아리였다. 나름대로 궁리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우선 급했던 건 혜화동을 떠나는 것이었다. 대학로에 대한 거부감은 혐오라기보다는 자격 없음을 느끼는 것에 가까웠다. 가기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쯤부터 나는 학교에 갈 때 혜화역을 통하지 않고 안국역부터 북촌을 거슬러 올라가는 후문 쪽을 택하고 있었다. 휴학을 할까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숨 막히던 1학년 시절을 떠올리면 억울했다. 그러잖아도 일 년 유예되었던 20대 초반을 즐기고 싶었다. 그렇다면 서울 어딘가에 달리 발붙일 곳이 필

요했다. 그리고 수면 밑에 가라앉았던 조급함이 있었다. 뭔가 하긴 해야 한다. 빠르면 전문대를 마치고 취직했거나, 3학년에 벌써 인턴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인생의 행로를 그들처럼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러나 간신히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다니며 생활전선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을 때였다. 월급을 모아 적금을 붓고 차를 사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건 나를 조금 초조해지게 만들었다. 허울로라도 진로를 탐색해야 했다. 학과와 멀어졌다는 건 연극과 영화에 대한 공부를, 또 그것을 공부하는 가장 쉬운 루트를 포기한 것이었다.

 

다만 막연한 의무감은 남아 있었다.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어떤 글을 쓸 것인지 몰랐다. 희곡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다. 난 항상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희곡이나 드라마 극본은 비슷할 거라고 여겼었다. 시나리오 작법 책을 대여섯 권 읽고 난 지금은 크게 부끄럽다. 아무튼 이럴 때는 새로운 것에 끌리게 된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학교 대자보 게시판이나 학교 커뮤니티 홍보 게시판을 뒤져보다가 눈에 뜨인 것이 광고학회였다. 코난 오브라이언은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조롱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매력적인 분야에 근거 없는 자신을 갖는다. 카피라이팅이라면 자신 있지, 글이니까, 신촌 일대의 학교에서 토요일 두 시마다 세미나를 열었던 학회, 그러나 거기서 내가 가장 잘한 건 동이 틀 때까지 이어지던 음주였다. 가장 자신 있던 것도 마찬가지로 밤새 술을 마시고 떠드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듯, 센스와 주책 사이를 줄 타는 농담으로 신입생 대표에 선출되었다. 나이도 학년도 제각각이었던 학회원들은 남학생 열다섯에 여학생 마흔여섯이었다. 재밌는 건 동아리의 오래된 규정이었다. 밤열 시까지는 뒤풀이에 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야 술 마시는 게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그러나 신입생 61명을 데리고 지속가능한 규

칙은 아니었다. 어라. 어딘가 익숙한 규율과 그 뒤를 쫓는 군상들이었다. 주말 알바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아이들, 뒤풀이에 참석하지 않으면 집행부가 전하는 눈치들. 약간의 문제의식이 떠오르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신입생이 된 듯한 기대로 부풀었다. 지하 술집 입구에서 열없는 눈으로 담배를 피우는 OB들을 뒤로한 채, 아직 특권은 내 것이었다. 젊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그 좋은 젊음을 멋지게 허비하는 방법이었다.

 

-------------------------------------------------------------

[학원으로 간 페이크 지식노동자]

 

스물넷이 됐다. 어느덧 목동에서 6개월 넘도록 사탐 대표 강사를 하고 있었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일이었고 별로 행복하게 일했다고는 못하겠다. 어쩐지 권태로울 때 우연히 시작한 일들이라야 오래가나 보다. 과목 특성상 이전에 하던 과외나 파트 강사 일은 길어야 넉 달을 넘지 못했었다. 이것도 기껏해야 석 달이나 하겠거니 싶었는데 아니었다. 열망한 일들은 다 조지더니 이건 좀 오래가는구먼. 그래도 반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돈을 벌어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도 생겼다. 일정한 돈을 벌고 두 학기째 휴학 중이었으니, 시나리오나 희곡을 쓸 수도 있었다. 여전히 통근에 시간을 버리기는 했다.

 

학원 선생의 시간표란 보통 사회인과는 좀 달랐고 그렇지 않아도 본가에서 멀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시도를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두 시간짜리 강의를 맡으면 한 시간은 강의하고 한 시간은 기출문제를 풀게 했다.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노트북을 펴고 이런저런 시놉시스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 쓰이는 문장은 한 줄도 없었다. 스트레스를 못 견뎌 바로 앞 전통시장 분식집에서 오뎅 서너 개를 씹고 들어왔다. 나는 아주 고약한 선생이었다. 목동이라고 해봐야 우리가 익히 아는 목동(현대백화점, 방송국, 아파트 대단지, 초행길에는 도무지 적응하기 어려운 일방통행 차로)은 아니었다. 처음 나를 태워다준 택시 기사 아저씨는 목동에도 이런 데가 있어요?" 라고 했으니. 거기와 좀 동떨어진 올망졸망 주택가 시장통의 작은 학원이었다.

 

출강 오는 선생을 합해도 예닐곱이나 될까 했다. 일주일에 사흘 이상 출근하는 선생은 다섯이었다. 원장, 부원장, 수학쌤, 과탐쌤, 그리고 사탐쌤'나였다. 과탐쌤은 과탐 대표강사로 소개되었으나 수학쌤은 아니었다. 부원장이 수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오는 국어쌤 둘이 있었다. 수학쌤은 스물여덟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서른을 훌쩍 넘어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하빠리학원에 있는 그들을 조금 한심해 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나는 조금 비켜선 입장이라고 여겼다. 스물넷인 나는 가장 어렸고(그러니까 가능성이 있고!) 학원과 과외를 잠깐의 돈벌이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거의 아무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국지리만 가르치기로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맡는 과목이 늘어갔다.

 

한국사, 생활과윤리, 사회문화, 법과정치, 세계지리,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의 모든 사회탐구 과목을 다루고 있었다. 잘 아는 과목도 있었지만 아닌 것도 많았다. 그럴 때는 수업 시간 전에 EBS 강의를 베끼거나 답지를 외워서 들어가거나 주워들은 지식을 끌어다 썼다. 맡은 아이들의 성적은 그럭저럭 오르는 편이었지만, 다시 말하는데 나는 아주 고약한 선생이었다. 그렇게 무리한 이유가 돈 욕심 때문이라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40만 원짜리 단과로 시작했는데, 많을 때는 합해서 240만 원어치 정도 맡고 있었으니까. 그 나름대로 절박하기도 했다. 작은 학원이나 큰 학원이나 국영수도 아닌 과목에 강사 T/O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대체자는 널려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영어도 수학도 신통치 못한 선생이라면, “세계사도 되시죠?”라는 원장의 물음에 따질 것 없이 !”라고 하지 않고 어찌 돈을 벌겠는가?? 원장은 좋게 말하면 거침 없는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예의가 없었다. 주말이나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전화를 걸어왔다. 안 받으면 계속 걸었다. 내용은 대개 이런 것이었다. 내일 오후에 학부모랑 상담을 좀 하셔야겠어요. 사회탐구 한다니까. 출근하지도 않는 날에 별안간 나오라니 아주 짜증스럽고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나 싫지만은 않았다. 원장은 유일한 사람 선생인 내게 두말없이 상담을 붙였다. 상담이란 곧 고객 유치 쇼케이스였고, 성공적이라면 한달에 적게는 27만 원에서 많게는 45만 원을 벌 수 있었다. 그 돈을 줄 학생의 가련한 학부모를 만나보는 데 나 역시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게 잡힌 상담은 학생을 대동한 학부모, 그리고 원장과 함께한다. 나는 원장 옆에서 여러 가지 포장술을 배웠다. 소속 강사들의 학력이나 경력을 먼저 깔고 들어가는데 물론 이것도 대부분 부풀려 얘기한다. 대학 간판이나 경력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그다.음 있을 여러 가지 헛소리와 과장, 거짓말들 (공부법, 합격시킨 대학 등)에 부여되는 권위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서 따위로 증명할 필요도 없다. 이삼십 분 동안만 순진한 학생과 무구한 부모들을 현혹하면 되는 것이다. 원장은 거간꾼 역할이었지만 발화의 대부분은 그녀의 주도였다. 여기 계신 선생님이 어떤 분이고 왜 아이들이 좋아하는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소극적 사기꾼 역할에 주저함이 없었다.

 

"보이는 게 전부예요.” 언젠가 원장이 해준 말이다. 정말 그랬다. 물론 과외 앱에 프로필을 등록할 때는 학생증, 재학증명서, 졸업증명서 따위를 인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조그만 곳에서라면,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상하게도 대형 학원보다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곳이야말로 학부모를 주눅 들게 한다. 이를테면 M스터디나 C학원 같은 곳에서 선생의 이력을 물어보는 건 객쩍은 일이다. 물어보나마나 좋을 테니까. 그러나 소형 학원에서 학력과 이력을 묻는 것은 객쩍다기보다는, 그런 학원의 원장들은 너무 억센 사람들이란 티가 나서 언제라도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거다. "그걸 따지시려면 큰 학원에 가셔야지.” 그 원장도 마찬가지여서, 뭔가를 물을 틈을 주지 않고 학부모들을 몰아댔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세게 얘기하면 그게 다 진짜처럼 들렸다. 자세히 듣다 보면 이상하게 들리는 내용도 있었지만, 의문을 제기하는 꼴을 본 적은 없다. 프랜차이즈 학원에 자녀들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따지고 들 자격이 없는 것처럼 움츠러드는 것일까. 시장통의 다세대주택에 살던 엄마와 아빠들, 상담을 하는 자리에서는 항상 보이는 게 전부였고 말하는 건 모두 참 같았다. 그 학원엔 부원장도 있었다. 그녀의 공식 이력은 Y대 수학과 학사였지만 실제로는 그 학교를 중퇴했을 뿐이었다. 학력의 비밀을 일부러 알게 된 건 아니다. 원장은 시장에서 간식을 곧잘 사 와서 나눠 먹곤 했다.

 

언젠가 떡복이인가를 씹으며 원장과 부원장과 셋이 교무실에 앉아 있었다. “사실 이 사람이 졸업을 못 했어요. 중퇴예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들어보니 부원장의 강의 실력이 좋다는 소리였다. “이 사람이 수업을 얼마나 잘하기로 소문이 났으면 대치동에서 전화 오고 난리가 나요, 오라고. 그런데도 여기서 나랑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고 온 거예요. 학교 졸업을 못했어도 그런 건 강의하는 데 아무 지장 없어.” 원장은 부원장과 십 년 가까이 일했다. 망신을 주겠다거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저의는 조금도 없었다. 그녀의 실력을 칭찬하기 위한 근거라면 민망한 사실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낼뿐이었다. 원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기만이 그 세계의 보편이었다 해도 원장이 타인에게 무감했던 건 분명해 보인다.

 

나는 당황해서 부원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엷게 웃으며 눈을 오른쪽으로 내리깔고 있었다. 그날부터 부원장을 대하는 게 약간은 민망해졌다. 학력이 그렇다고 그녀를 경시한 건 아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새파랗게 어린 내가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얼마 안 되어 부원장과 수업 일정으로 상의할 일이 있었다. 학생이 아파서 그 주 수업이 취소되었는데 다음 주 언제로 옮길 수 있느냐는 거였다. 나는 수업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했고, 우리는 가장 작은 교실에 마주 앉았다. 원장실은 있지만 부원장실은 없다. 그녀 앞에서 탁상 달력과 휴대폰의 일정을 번갈아 보며 날짜를 확인하는데, 그녀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사탐쌤이 올해 몇 살이세요?" “? 이제 스물넷이네요.." "빨리 군대 갔다 오셔야겠네요." 그 어디서 일을 구하는 병역 미필이란 말을 굳이 한 적이 없었다. 채용에 마이너스일 뿐이니까. 하지만 넘겨짚어서도 그래 보이는 모양이었다. 군대 얘기를 지겹게 듣던 시기였다. 거 참, 그 얘기 들을 때마다 100원씩 받았으면 밤마다 원장님 전화 받을 일도 없었겠네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최악은 아니었다. “천천히 가셔도 돼요.”보다는 빨리 다녀오세요가 좀 더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 말에는 무슨 함의가 있을까. 언제 그만둘 거냐는 얘기일까. “제가 당장 군대에 갈 생각이 아니어서요. 최소한 일 년은 여기 있을 겁니다.”

 

거짓말이었다. 가능하다면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이룬 것이 없다는 미련에 입대를 망설일 뿐이었다. 내 노파심을 꿰뚫은 것인지 내 거짓을 꿰뚫은 것인지 그녀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어차피 선생님 말고 이렇게까지 수업 커버하는 분이 없으세요. 고급인력이셔요." 말씀이라도 감사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건 진심이었다. "얼마나 더 하실 생각이세요?" "? 군대 가기 전까지는 해야죠?"" "그게 아니고, 그럼 제대하면 안 하실 거예요?" “?” "올해 입대하셔도 제대하면 스물여섯이네요." 그녀는 부모님도 잘 언급하지 않던 입대 문제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앞에서 나는 '네무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아픈 델 건드리는 의도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같아선 실없는 소리라도 했을 텐데. 근데 제대는 예비군이 끝나야 제대고요, 현역 복무를 마치는 건 전역이랍니다. 몰랐죠? 하지만 나도 그때는 제대와 전역이 같은 말인 줄 알았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함을 티내는 사이, 그녀가 다그치듯 쏘아대기 시작했다. "전공이 연극이시잖아요.” 부원장은 내가 입고 있던 외투를 향해 턱짓했다. 턱짓을 받은 왼쪽 가슴에는 학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등판에 학과 이름이 크게 적힌 학교 돕바였다. 겨울옷을 사는 대신 술값을 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학력에 거리낄 것 없이 여긴다는 것 또한 틀린 건 아니었다. 턱짓의 목표를 알자마자 부끄러움이 일어났고, 반발심은 그보다 더 크게 일어났다. "전공이 그래서 그런가, 목소리가 우렁차셔서 뒤 강의실까지 다 들려요.” "수업할 때 다른 얘기로 많이 빠지나 봐요? 애들이 재밌다고 좋아하더라고요.” 비꼬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 그런가요, 지루해할 때 가끔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수업 시간에 문제 풀게 해놓고 나갔다 들어오시는 것 같은데.” 내 근무 태만이야 내가 더 잘 알았으므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선선히 대답하기보다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침묵이 꼭 인정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아주 정반대로 생각했다(바로 이 무렵 심리테스트 사이트에서 측정한 나의 객관성 지수는 94.3, 사고력 지수는 75.8점이었다).

 

나는 말꼬리를 흐리는 대신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처음부터 학원 강사 하는 게 꿈이셨어요?" "무슨 그런 사람이 어딨습니까?" 방어를 준비하다 보니 본심이 삐져나왔다. 나도 내 말에 놀랐다. 부원장은 동요하지 않았는데 이때부터는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열심히 하시라고 이런 말 하는 건 아닌데요. 여기 선생님들, 다 십년 가까이 여기 출근하시는 분들이에요. 그분들 다 그랬어요.. 월요일마다 오는 국어쌤은 사시 2차가 안 됐고, 수학쌤은 연습생이었대요. 나도 학교 그만두고 아버지가 소개해서 겨우 원장님을 알게 된 거예요.” 나는 눈을 내리깔고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렇다고 끝까지 해본 사람도 없는 것 같기는 해요."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한숨 같기만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의 무게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죽도록 노력해본 사람은 없어요. 그냥 눌러앉은 거예요. 바쁘고 메뚜기 뛰어도 돈은 많이 들어오니까. 젊을 때부터 그렇게 벌 수 있으니까. 적어도 나는 그랬던 것 같고요.” 그렇게 말하는 부원장은 다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적막이 이어졌다. 둘 다 바닥이나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했네요. 수업 도중에 적당히 나갔다 오세요. 애들이 다 알아요." 정적은 부원장이 깼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요, 연극을 해야 하나.” "아뇨. 화요일 수업이요, 언제로 옮기실 거예요?” 나는 부원장이 한 말을 대강 알아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고민거리 같은 것을 넘겨준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곱씹지 못했다. 듣기보다 들은 뒤 내놓을 대답이 더 중요한 게 나의 모든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릿속이 구름처럼 흐려지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부원장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특정한 경험이 더 필요했다.

 

-------------------------------------------------------------

이상으로 이 도서의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 하는 공부의 정석
한재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혼자하는 공부의 정석‘ 도서를 오늘 완독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은 물론이고 성인들이 보아도 좋을 도서입니다. 이 도서의 내용들은 공부할 때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특히 공부하다 좌절감에 빠졌거나 공부가 힘들게만 느껴질 때 이 도서는 단비와도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참고로 저자 한재우님은 서울대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팟캐스트 ‘서울대는 어떻게 공부하는가‘를 운영하고 있으니 많은 청취를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포자 문과장은 어떻게 영어 달인이 됐을까
문성현 지음 / 넥서스BOOKS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속도가 말하는 속도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기 때문입니다.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이해 속도가 빠릅니다.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이해 속도를 높이려면 어순 감각이 필요합니다. 영어 독서는 어순 감각을 기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이 순간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기욤뮈소는 소설을 한권씩 출간할 때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가입니다. 이번에 읽은 소설 '지금 이 순간'은 쟝르가 판타지소설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시간이탈에 대한 내용을 주제로 쓴 소설인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인 아서에게 등대를 유산으로 물려주는데 한가지 지켜야 할 사항으로 등대의 지하실에 있는 비밀의 문을 절대로 열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하지만 아서는 그러한 금기사항을 깨고 비밀의 문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지하로 들어가서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가 깨어난 곳은 매력적인 여인 리자의 집,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습니다. 그때부터 등대의 저주는 시작됩니다. 등대의 저주는 24년간 유효하며 1년을 하루밖에 살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데 리자와의 사랑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합니다.

작가 기욤뮈소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끝부분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은 한번 손을 잡으면 결코 놓을 수 없는 마법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번 소설도 처음에는 지루했지만 중간부분으로 갈수록 소설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과연 결론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그 궁금한 마지막을 위해 소설을 열심히 읽어나갑니다. 어떤 성격 급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나는 성격이 급해서 소설을 읽을때 맨마지막부터 읽어봐요" ㅋㅋㅋ.... 웃기는 얘기지요. 하지만 저는 재미있는 중간부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한글자 한글자 정독을 합니다. 저의 책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요즘은 속독법에 관한 책을 구입하여 하드트레이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읽는 속도가 조금 빨라진 느낌을 받습니다.

속독법에 관해 말씀드린다면 요즘처럼 책이 수만권씩 출간되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필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빠른 시간내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욤뮈소의 소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속독법이 필요치 않을 만큼 흥미진진하게 써내려가기 때문에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만에 끝을 봅니다. 기욤뮈소가 저술한 소설의 다음작품으로 '사랑하기 때문에'란 책을 구입해 놓았습니다. 그 책도 보는대로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작품은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여러권있지만 기회가 되는대로 읽어볼 생각입니다.

한동안 작가 더글라스케네디의 작품에 심취해 있었는데요. 요새는 작가 기욤뮈소에게 푹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회가 되신다면 기욤뮈소의 작품을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