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 - 웅진백제 발굴 이야기 공주가 좋다 1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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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은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반도에는 구석기 문화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 p5


 예전에 후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역사는 배워서 뭐하나요? 그래봐야 과거의 이야기인데요.” 당시 역사에 대한 중요성을 절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역사라는 것이 그냥 좋았기 때문에, ‘왜’ 역사를 배워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마땅한 답이 없었다. 


 물론 ‘민족의 자긍심’을 세우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개인적인 이유가 더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냐가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다.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없다면, 그 역사란 후손들에게 큰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논하기 보다는 만주 벌판을 달리던 고구려 시대를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모든 역사에는 교훈이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선현들의 드높은 기상과 용기를,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압제에 맞서는 불굴의 투지를 배울 수 있다. 


 백제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후손으로서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필요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배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많은 기록과 유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서 언급한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과 ‘무령왕릉 발굴’은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특히 무령왕릉은 도굴이 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의 고분이었다. 이 안에서 수많은 유물이 나오면서 역사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가루베 지온의 오판으로 무령왕릉은 도굴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약 40년 후에 완벽하게 보존된 무령왕릉을 우리 손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 p135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광복 후에도 한반도에는 구석기 역사가 없었다는 의식이 팽배했다. 일제 강점기에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석장리 유적 발굴을 주도했던 손보기 교수팀은 이러한 편견을 깨야했다. 심지어 한국 역사학자들도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정도였다. 


 마침내 1964년 11월, 손보기 교수의 발굴 팀이 본격적으로 나섰다. 전용장비 없이 사람 손으로 직접 땅을 파야했다. 보통 3미터, 깊은 곳은 무려 12미터까지 파내려가야 했다고 한다. 


 “땅을 깊이 파면 팔수록 흙 사이로 끊임없이 물이 스며 나올 뿐만 아니라 비라도 내리면 순식간에 물을 차올라서 조사단은 비를 맞아가며 계속 양수기로 물을 퍼내야 했다.” - p18 


 이러한 고생 끝에 마침내 유적이 발견되었다. 구석기시대 초기, 중기, 후기의 도구들이 골고루 발굴되었다. 특히 석장리 지역은 금강의 지류와 본류와 만나는 곳이어서 퇴적 지층이 잘 발달되어 있다. 


 공주 수촌리 유적도 우연히 발굴되었다. 당초 농공단지를 조성하려고 했고, 사전 문화재 지표 조사를 실시했다. 이 때 화려한 유물이 쏟아지면서, “무령왕릉 발견 이후 최대의 성과”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무려 2개의 ‘금동관’은 세밀한 문양을 자랑하는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사진으로 봐도 휘황찬란한 모습을 자랑한다. 


 중요한 것은 수촌리 유적에 왜 이렇게 화려한 유물이 있느냐이다. 유물의 시점은 백제가 한성을 도읍으로 하고 있을 때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수촌리에 유력한 권력가가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나중에 개로왕이 한성에서 고구려 군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의 아들 태자 문주가 웅진, 즉 지금의 공주를 도읍으로 정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수촌리 고분군에 매장된 재지세력인 수촌리 세력이 한성 도읍지 시기부터 백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들의 지지와 후원 아래 웅진이 도읍 후보지로 유력해진 게 아니었을까?” - p46 


 웅진(지금의 공주)은 475년 10월 문주왕이 천도한 후 64년 남짓 백제의 왕도였다. 이 시기에 재위한 왕은 22대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재위 501년 ~ 523년), 성왕(재위 523년 ~ 554년)이었다. 이 중에서 무령왕만 천수를 누리고, 다른 왕들은 그렇지 못했다. 문주왕과 동성왕은 신하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웅진 천도 후 백제 왕권이 불안정했음을 반증한다. 


 하지만 무령왕은 다시 백제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다시 한강 유역을 공략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갖췄고, 중국과 일본 등 국제 교류도 다시 활발해졌다. 

 538년 성왕 16년에 마침내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기 전까지 웅진은 백제의 수도로서 제 역할을 했고, ‘공산성’도 왕궁을 방어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맞서서 항전한 곳도 공산성이다. 


 “백제의 동, 서, 남, 북, 중을 가리키는 다섯 방위에 세운 오방성 중 북방성으로 편제되어, 위로 고구려를 견제하고 수도 사비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p78


 얼만 전에 공주와 부여를 방문했는데, 송산리 고분군에서는 아직도 유물 발굴이 한창이었다. 더운 날씨에도 연구원 분들이 호미로 조심스럽게 땅을 파고 있었다.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서, 백제인 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을 통해서 공주의 유적지, 그리고 백제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었다. 다음에 공주와 부여를 방문하면, 미처 가보지 못한 유적지도 갈 계획이다.


 책의 구성이 좋고, 역사와 문화, 유적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고 도움이 많이 된다. 공주나 부여를 방문하거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한 줄 요약 : 공주는 백제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 생각과 실행 : 앞으로도 백제의 유적 발굴을 통해서, 한반도에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해를 바로 했으면 한다. 백제는 중국과 일본과의 활발한 교육 활동을 통해서, 화려한 문화를 창출했고, 이를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 앞으로도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 고구려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공주나 부여는 여러 번 방문해야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 이번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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