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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정약용의 인생강의 - 다산은 아들을 이렇게 가르쳤다
정약용 지음, 오세진 옮김 / 홍익 / 202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다산 정약용은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귀감을 주는 인물이다. 28세에 대과에 급제해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양한 벼슬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수원성 설계 등 기술적인 업적도 많이 남겼다.
하지만 정조 대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탄탄한 벼슬길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결국 천주교 교난 때 천주교를 믿었다는 혐의로 마흔 살 때(1801년, 순조 1년) 유배를 당하면서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의 동서 이승훈(조선 최초로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인물)과 형인 정약종은 처형을 당하고, 그의 형 정양전도 유배를 떠났다.
가문이 폐족이 되면서 자식들의 벼슬길도 막혔다. 생계조차 위협받았고, 이들의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도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자식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또한 자식들을 걱정하면서 이들에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줬다.
이 책은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가훈을 가지고 주제별로 나눠서 해설을 붙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양용의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보게 되었다. 자식을 갖고 있는 부모의 입장이라면 그의 심정을 더 절실히 느낄 것이다.
“오늘날 너희는 폐족의 자식들이다. 만약 폐족이라는 어려움을 딛고 잘 처신하여 이전보다 더 훌륭한 가문을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놀랄 만하고도 훌륭한 일일 것이다.” - p10
그는 무엇보다 두 아들이 아버지의 몰락으로서 겪을 심적인 고통을 걱정했다. 자포자기해서 엇나가고, 공부를 안 할 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에게 교양과 학식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폐족인 상황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한다면 더 무시나 괄시를 받을 것을 염려했다.
“배우는 일에 모든 힘을 다하여 우리 집안의 글 짓는 전통이 너희 세대에 더욱 창대해지도록 노력해라. 대대로 이어지는 벼슬도 이런 맑고 귀한 전통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 p16
다산은 ‘글 짓는 전통’이 벼슬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아이들이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느끼도록 했다. 공부가 단순히 벼슬길에 나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집안의 훌륭한 전통임을 알렸다. 그리고 자신이 유배지에서 쓴 글들을 자식들이 잘 편집해서 후대에 전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강한 목적성을 알려줌으로써 자식들도 삶의 목적과 목표를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식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해서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에서 자라서 어려서부터 견문을 넓히고, 무엇보다 ‘온갖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28세에 벼슬길에 올라서 40세 전까지 성공의 탄탄대로를 달렸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어려운 경험을 하고나서 독서를 할 때의 마음가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도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독서의 깊이가 더 깊어졌을 것이다.
사실 독서라는 것이 그런 것 같다. 경험을 많이 할수록 내용에 대한 이해가 더 남다르다. 아마 다산도 이런 의미로 자식들에게 말한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다산이 자식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조한 분야다. 상소문, 비문, 선비들 간의 편지글이 그것이다.
아무래도 상소문에는 신하가 임금에게 조언이나 정책 등을 올리는 글이기 때문에 ‘명문장’이 많다. 비문도 마찬가지고, 선비들 간의 편지도 그렇다. 당시에는 자신의 주장을 농축해서 전달하는 방법이 간단한 이메일이나 전화 통화가 아닌 편지였다. 당연히 선비들은 편지를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좋은 문장과 구성 능력을 배울 수 있다. 결국 그는 이러한 글들을 참조해서 공부하면서 학문적 깊이를 더하라는 의미로 말했다.
“선현들의 쓴 것들 중에 시 같은 경우는 먼저 들여다볼 필요까지는 없으나 신하가 임금께 올린 상소문, 묘비에 새긴 비문, 선비들의 편지 같은 것은 꼭 읽어서 안목을 넓혀야 한다.” - p28
마치 우리가 문장력을 키우기 위해서 좋은 책을 읽거나 신문의 칼럼을 참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회사에서도 보고서를 쓰면서 내용을 압축하고 요약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문장력을 키우는 것은 중요하다.
정약용이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의 삶에 대한 자세다. 폐족이 되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유배지에서 학문적인 깊이를 더해 가면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아마 그는 어떤 시대적 사명감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경력은 이미 끝났지만 후세를 위해서 무언가 남겨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이러한 사명감이 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너무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의 저서는 철학, 역사, 지리, 과학, 의학, 공학 등 아주 광범위했다. 만약 정조 대왕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아마 실학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나라의 개혁에 참여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 시대의 부정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약용은 이러한 세태를 항상 안타까워했다.
더군다나 두 아이들의 발전을 위해서 그는 꾸준히 편지를 썼고, 이들에게 좋은 말과 교훈을 남겼다. 나도 두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그의 행적이 주는 교훈이 크다. 심지어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장례를 치러야할 지도 알려줬다.
“내가 이곳 유배지에서 죽는다면 이곳에다 묻어주고, 나라에서 나의 죄를 씻어줄 때를 기다렸다가 죄를 씻어주면 반장(타향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으로 옮겨 장사 지내는 일)하는 것이 좋겠다.” - p252
그의 생각과 사상을 이렇게 읽다보니,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꼈다. 나라를 위한 충성심, 자식에 대한 사랑, 백성에 대한 사랑과 걱정 등 다산은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생생한 목소리가 더 많은 분들께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