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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그레이프
피터 헤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나에게 <길버트 그레이프>는 조니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해주는 영화로 남아있다. 오래전에 본 탓에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조니뎁의 우수에 젖은 듯한 눈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천진난만한 미소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가 나온지 15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원작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는 나에게 다시한번 지난 감동을 되살려 주기에 충분했다.
엔도라라는 보잘것 없는 작은 시골 마을의 슈퍼마켓 점원인 길버트는 평범한 청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집의 지하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그 충격으로 몇년째 집 밖에 나가지 않는 고도 비만인 어머니, 다정하고 헌신적이지만 어머니와 가족들에 매여있는 누나 에이미, 이런 책임을 저버리고 멀리 떠나 1년에 한번씨만 돌아오는 형 래리, 저능아인 남동생 어니와 철없는 여동생 엘렌은 길버트를 결코 평범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의 짐들이다. 그들은 길버트가 사랑해 마지 않는 가족이면서 동시에 미칠듯이 떠나고프게 만드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길버트의 삶은 무미건조하다. 그는 보기드물게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세상, 가족에 대한 분노와 염증이 숨겨져 있다. 누나인 에이미는 길버트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길버트 너는 아빠랑 똑같아..... 나는 네가 아빠처럼 되는걸 원하지 않아." 길버트는 그런 사람이다. 길버트의 아빠가 그랬듯 평소에는 잔잔한 호수같지만 누군가가 돌을 던지면 금새 거친 파도에 뒤덮여 버리는 그런 사람.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길버트가 가여웠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내 아들처럼 기특하고 대견했다. 마음속으로 길버트가 지긋지긋한 가족과 지루한 마을에서 멀리 떠나 새로운 삶을 찾기를 응원하면서도 지금처럼 영원히 그레이프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두가지 마음이 교차했다.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는 중반부까지 길버트의 단순한 삶, 그리고 그 와중에 발생하는 몇가지 생각지 못한 사건들(온가족이 경찰서에 출동한 사건, 동창 랜스의 고향 방문, 신비스러운 여자아이 베키의 등장 등등)을 서술하면서 조금씩 그레이프 가족(특히 어머니)의 꿈과 희망인 언니의 18번째 생일 파티를 향해 달려간다. 어머니 보니 그레이프의 소원은 저능아인 아들 어니가 18세까지 사는 것.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겠다. 어니의 생일을 앞두고 길버트는 드디어 엔도라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가슴안에 응어리져있던 것들이 터져 나오는 순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어니를 때리고 욕실로 끌고가는 두 페이지는 내가 길버트가 된듯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어니의 생일을 기점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조금씩 확인 하게 된 가족들은 어찌 보면 희망을 향해 한발짝 더 내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죽음. 그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길버트와 가족들. 결국은 어머니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걸 원치 않았던 길버트의 바람으로 그레이프 가족의 낡은 집은 어머니와 함께 불에 활활 타버린다. 그래. 길버트의 말대로 그의 어머니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그레이프 가족은 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조용히 그들을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