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사 - 선사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까지
토마스 R. 마틴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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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번역서를 포함해서 한국어로 쓰여진 고대 그리스 역사 입문서는 흔치 않다. 


그 중에서 분량 대비 명료성과 내용의 충실성을 고려한다면 내가 보기에 이 책이 제일 좋다. 


일단 번역문이 유려한 편이다. 


나는 이 책을 한 번 다 읽고서 원서와 비교하면서 다시 정독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종종 부정확한 번역이나 심지어는 오역들이 있기는 하다. (사실 꽤 많다.)

그러나 대체로 번역의 품질이 좋다. 사실 이건 원래 영어 원문이 깔끔한 덕분이기도 하다. 


오역의 예: 


266쪽: 번역자가 쓴 표현 "흠 있는 가축"은 원서에 있는 "unblemished domestic animal"를 오역한 것이다. 당연히 "흠 없는 가축"이 되어야 맞다. 내용 상으로 이게 말이 안되는 번역인 게, 제의에서 바치는 희생물을 흠 있는 것을 골라서 바친다는 것이 종교적 상식으로 말이 안된다. 


270쪽: "비극은 강력한 인간과 신이 등장인물로 나오고"로 번역하면 안되고, "강력한 인간과 신의 힘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로 번역해야 옳다. 원어는 "involving ... characters representing powerful human and divine forces"이다. 그리스 비극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신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비극 일반의 경우에는 신이 극 속에서 직접 등장하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 근데 번역을 저따위로 하면 신이 일반적으로 비극의 등장인물, 즉 연기자가 연기하는 역할 중 하나로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원어와도 안맞고 말이다. 

272쪽: "코러스의 음악적 역할은 비극의 시적 특질을 더욱 정교하게 꾸미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라고 번역한 부분은 "코러스의 음악적 역할은 아테네 비극의 전반적인 시적 본성을 더 정교화하는 것이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에 불과했다"라는 식으로 코러스의 역할을 폄하하는 표현은 원서에 없다. 원어: "the musical aspect of the chorus’s role was an elaboration of the overall poetic nature of Athenian tragedy" 일반적으로 아테네 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한데(에우리피데스에 와서야 코러스의 음악적 성질이 약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점을 번역자가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다가 원어에도 없는 식으로 코러스의 역할을 약화시키면 안된다. "elaboration"의 역할이 왜 폄하되어야 하는지? 그리스 비극 입문서만 봐도 이런 실수는 안한다. 아니 그냥 원어대로 번역해도 이런 문제는 안 생긴다. 


276-7: 번역자의 오역: "하지만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 비극에서 묘사된 여주인공들은 당대의 사회적 도덕률 속에 내재된 긴장을 탐구했다. 특히 가정과 관련된 도덕률의 경우, 남자들이 그것을 위반하면서 갈등이 생겨났다. 여주인공들은 행동을 통해서 여성의 지위와 명예를 과시한다."

 원문: "the heroines portrayed in fifth-century Athenian tragedies also served to explore the tensions inherent in the moral code of contemporary society by strongly reacting to men’s violations of that code, especially as it pertained to the family and their status and honor as women."

  번역은 다음이 훨씬 더 낫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비극에서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당대 사회의 도덕률에 대한 남성들의 위반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함으로써 그러한 도덕률에 내재한 긴장을 탐구하는 역할을 수했는데, 특히나 이러한 위반이 가정과 여성으로서의 지위와 명예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에서 여성들의 강력한 대응이 일어났다." 

 (좀 더 의역해서 풀어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여성의 지위와 명예를 "과시한다"는 번역자의 번역은 오역이 분명하다.)


391쪽: "기병이 적의 정면을 쳐부수어..."는 "기병이 적을 약화시키는 공격부대로 사용되고..."로 번역해야 맞다. 기병이 팔랑크스 진형을 짜고 있는 중장보병의 창 앞으로 돌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기병은 측면이나 후면으로 돌아들어가서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원어도 "...deployed as a strike force to soften up the enemy"이다. 


일일히 여기서 오역을 다 열거하지는 않겠다. 


(사실 파도파도 끝이 없다. 계속 나온다...) 


그런데 고대사 관련서를 여러 권 번역하신 전문번역가라는 분이 역자후기에 "이 수정판을 정독, 번역하게 되었는데..."라고 쓰신 걸 보고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독을 했다면 적어도 위의 예에서 내가 지적한 그런 오역은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대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내용의 오역을 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왜 이런 식의 오역들이 나오는지 추측을 해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꽤 개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대한민국은 무서운 사회이므로 여기서 그만하겠다. 


역자님, 문장 유려하게 번역 잘 하셨어요. 잘 읽었습니다. 쌩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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