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 사용법 - 텃밭부터 우쿨렐레까지 좌충우돌 DIY 도전기
마크 프라우언펠더 지음, 강수정 옮김, 소복이 그림 / 반비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작년 11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진절머리가 나서 오랜만에 우쿨렐레 악보라도 보며 마음을 좀 다스릴까 하고 도서를 검색해 보니, 지난 겨울 동안 내내 진행되었던 도서관 증축 공사가 끝나면서 음악 악보책들은 대부분 학교 저쪽 너머 언덕 위의 음대도서관으로 옮겨져 있었고, 엉뚱한 제목의 이 책이 함께 찾아졌다. '텃밭부터 우쿨렐레까지 좌충우돌 DIY 도전기'라는 부제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나의 DIY는 어둠의 역사다. 약 20여년 전에, '교내 과학경진대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무척 거창한 이름이지만, 수업이 다 끝나고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간 토요일 오후에, 칙칙한 과학실에서 토요일 오후에 퇴근하지 못 해 칙칙한 인상의 '자연' 선생님의 감독 하에, 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지정된 문구점에서 '라디오 키트 세트'를 사다가 빨리 조립하는, 심심한 행사였다. 선생님은 빨리 조립하는 순서대로 이름을 적었고, 1등부터 그 밑의 일정 등수까지는 다음 주 월요일의 조회 시간에 단상으로 불려나가 시상을 하게 될 터였다. 지금처럼 내신이 있고 입학사정관이 있는 세상이라면야 학생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써넣을 수 있다지만 당시에 왜 그런 행사를 했고, 또 왜 굳이 시간을 체크하여 상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과학입국을 부르짖었던 군인 출신 대통령의 말씀이 교무원들의 가슴에 깊숙이 남아있었는지 어쨌는지. 결과로 보자면, 나는 꼴등을 했고, 덕지덕지 납땜이 붙은 나의 첫 라디오는 죽어가는 괴수의 단말마 같은 소리 외에는 아무런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 성과물을 낸 학생은 이름이 적히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과학실에는 꼴등인 나와 한시라도 빨리 퇴근하고 싶어하는 선생님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내 납땜의 여분을 다 쓰고 아이들이 남기고 간 여분까지 모아다가 회로판의 뒷면을 납 범벅으로 만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반쯤은 측은하고 반쯤은 지루해 죽겠는 얼굴로, '노력상'을 만들어 수상할 터이니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여기까지는 일기에도 한 차례 적은 바가 있고 비슷한 화제가 나왔을 때에 사석에서도 입에 올린 적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다음에 적는 것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말이다. 나는 사실, 고개를 들어 집으로 가라고 하는 선생님의 입을 보기 전까지의 그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지인들 사이에서 나는 기계치로 유명하다. 단지 기계를 잘 못 다룰 뿐 아니라, 기계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을 몹시 귀찮아하고 때로 두려워한다. 상담이나 최면을 통해 증명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이것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분명한 트라우마이며, 특히 정확히 그 날에 생겨난 것이라고 내심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유난히 '쪼닥쪼닥'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장난감이고 생활용품이고 가져다 꺾고 부수고 붙이는 걸 좋아하던 나는, 그 과학경진대회 이후로, 완벽한 설명서가 존재하고 어떤 기계치가 조립해도 항상 균일한 완성품이 나오는 레고 정도에 만족하는 '소비자'가 되고 말았다. 있지도 않은 '노력상'을 다시 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쪼닥쪼닥의 습관, 잔재주이긴 하나 끈덕지게 키워냈다면 어떤 쓸모가 있었을지 모르는 기술은 기껏해야 학알을 접거나 이따금 뜨개질을 하는 등의 소소한 취미 정도로 생활에 스며들어 그 흔적을 감추었다.

 

 

다시 손 끝으로 무언가를 만지게 된 것은, 외로워졌기 때문이었다. 동기도 후임도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군 생활에서,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고 끝날지 않은 것 같은 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림 그리기였다. 전화 몇 통이면 밤새 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대학 시절과 달리 열흘 여 전에 잡은 약속도 저쪽의 야근이나 이쪽의 공부에 밀려 취소되기 일쑤였던 이십 대 후반과 삼십 대 초반에, 우쿨렐레나 기타를 구경하며 낙원상가를 기웃거렸던 것은 그 과정을 일기에 세세히 쓸 정도로 신이 나는 일이었다. 어차피 혼자 노는 것이라 잘 못해도 재미있으면 장땡이었고, 낙을 찾고 나니 애당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는 부끄러움은 차츰 사라졌다. 모두, 납땜만큼 즐거웠다.

 

 

근래, 공으로 얻은 문화상품권을 어디에 쓸까 생각하다가, 언젠가 태어날 아이에게 직접 깎은 목각인형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조각도 세트를 샀다. 나무는 무엇이 좋은지, 색은 무엇으로 칠해야 좋을지 등에 대해 일상의 틈을 빌려 조금씩 알아보다가,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찾으려던 우쿨렐레 내용은 별로 없어보였지만 DIY라는 말에 눈이 꽂혀 꺼내보았다.

 

 

저자인 마크 프라우언펠더는 잡지에 글을 써서 먹고사는 프리랜서 기고가였는데, 2000년대 초반 IT 산업의 붕괴로 여러 개의 기고처를 잃고 만다. 고민하던 그는 어차피 돈을 못 벌고 살게 된 판에 도시로부터 떨어져 있고 덜 돈이 드는 주거지를 찾다가 남태평양의 '라로통가'라는 외딴 섬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를 하게 된다. 별다른 준비 없이 감행한 이 시도는 결국 몇 달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이 시기 아내, 두 딸과 하루종일 코코넛을 따러 돌아다니거나 해변에서 해삼을 잡아대던 생활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전부터 알던 미디어 단체의 설립자와 상의하여 2005년 <메이크>라는 DIY 잡지를 창간하고 편집장이 된다. 이 책은 그가 편집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저널리스트로서 스스로 행하고 잡지에 기고한 DIY의 기록이다.

 

 

300쪽 가량의 책은 11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론과 결론, 그리고 서론의 연장선 격에 있는 1장을 제한 여덟 개의 장이 실질적인 DIY 내역이다. 혹 흥미를 가질 분이 있을까 하여 자세한 내역을 순서대로 적는다.

 

잔디 죽이기. 텃밭 가꾸기. 에스프레소 뽑기. 닭 기르기. 기타 만들기. 콤부차 우리기. 벌치기. 딸에게 수학 가르치기. 이는 단순히 챕터의 소제목들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내용이 있다. 이를테면, '기타 만들기' 장에서 시가 상자로 기타를 만들어 본 데에 우쭐해진 저자는 이어 숟가락을 조각하고 닭장을 짓기도 한다.

 

제목만 놓고 보면 심상하지만, 실제 독서에서 얻는 감흥은 예상 이상이다. 저자의 문체는 화려하지 않고 담담하게 있는 일을 기술하는데 집중하는 편인데, 그런 구질로 '잔디 죽이기'에 대해 40쪽을 메꾼다고?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잔디를 죽이는데 얼마나 많은 세부 단계가 있으며, 또 어떤 문제들이 추가적으로 발생하는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적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몹시 사실적이고, 또 재미있다.

 

저자의 기록 중 많은 수는 실패의 역사다. 기르던 여섯 마리의 닭 중 네 마리의 닭은 튼튼한 닭집을 짓는다고 요란법석을 떨었는데도 코요테에게 잡혀가고 말았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봉을 시작했지만 따로 지은 벌집의 벌들은 도망갔고 나머지 벌들은 집의 천장 아래에 둥지를 틀어 '전등 안에 죽은 벌이 가득해 전등 빛이 희미해질 정도'가 되었다. 원래 수학을 잘하던 딸이 갑자기 점수가 떨어진 차에 시작된 '딸에게 수학 가르치기'에서, 딸은 결국 중요한 최종 시험에서 본래의 떨어진 점수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점수를 맞았다. 그래도 그 실패에 '사서 쓰지', 아니면 '사람 부르지'와 같은 조롱의 웃음을 보낼 수 없는 이유는, 과정의 세세한 기술을 통해 저자가 작게는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행복을 맛보았고, 크게는 다음 DIY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는 '경험'을 쌓았음이 이미 잘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결과도, 크게 보면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전달하려 한 메시지와 실제 책 내용이 잘 어우러진, 즐거운 독서였다. DIY의 숨겨진 팬에게나, 삶의 목적,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독후감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 중 마음을 크게 움직였던 여러 부분 가운데 하나를 골라 뒤에 덧붙인다. 저자가 양봉을 시작하며 참고하였던, '거꾸로 양봉법'의 창시자 찰스 마틴 사이먼의 '거꾸로 양봉법 원칙' 중의 일부이다.

 

 

 

- 양봉의 선구자들, 현대적인 양봉의 원칙을 구축한 분들, 랭스트로스, 다단츠, 루트.... 그들이 그토록 큰 성공을 거둔 이유는 뭘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 그냥 부딪히면서 순리대로 따라갔을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창의적인 원칙이며 효과적인 방법이다. 일단 표준이 정해져서 바위에 새겨지고 사진과 도표와 절차가 활자로 찍혀 나오면 추종해야 할 모델이 생기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본질적인 것 다음에 나오는 것은 전부 부차적이거나 열등한 취급을 받는다.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본질이 되어야 한다. 위대한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양봉을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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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님의 속사정 - 대한민국 검찰은 왜 이상한 기소를 일삼는가
이순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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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대한민국 검찰은 왜 이상한 기소를 일삼는가'. '기자생활 10년 동안 군, 검, 경, 감을

 

모두 섭렵'하는 이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소개하는 한겨레 이순혁 기자(이하 이순혁)의 2011

 

년 12월 작.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위와 같은 이력을 가진 기자는 한겨레 내에서

 

이순혁 한 명 뿐이라고 한다. 검찰에 대한 기대와 비판이 거세게 공존하고 있는 이 때 시의

 

적절하게 출간되어 신간으로 구입해 읽어보았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이 책은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 '리얼[real]검사'에서는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어떤 성향을 갖는 사람들이 검사가 되

 

는지에 대해 살핀다. 실명이 등장하는 사례들이 언급되고 있어 흥미는 동하지만 검사라는

 

직종 전체를 포괄할 만큼 유의미한 수가 소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1부 자체가 길지 않

 

은 분량의 인트로 격이고, 저자가 검사들의 사적인 관계에도 밝다는 인상도 받을 수 있으므

 

로 눈길을 끌기 위한 전략적 배치라면 상당히 영리한 한 수라고 생각한다.


특히 눈길이 가는 부분은 세 개의 소챕터 가운데 마지막인 '사회 기득권층 자제들이 찾는 좋

 

은 직업'으로, 이전의 판검사들은 출신 지역이나 고교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았던 한편 요새

 

는 서울 강남의 고등학교나 특목고 출신들이 대부분이라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예전에는 도시와 향촌 간, 소득 1분위와 5분위 간

 

등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 간 융합과 교류가 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한편, 새로이 검찰

 

의 주류 집단으로 올라선 외고나 강남 출신 법조인들이 절대 다수가 서민인 사건 당사자들

 

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배 검사들에 비해 덜 권

 

위적이어서 '스폰서 문화'등에 거부감을 갖고 있고, 반대 의견이 있을 경우 상사에게도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고 있어 검찰 특유의 강박적 조직 문화가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영향으로 꼽힌다. 그러나 선배들에 비해 직업적 소명 의식을 갖고 검사가 되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일을 일종의 안정적인 고급 전문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곧 수사력 약화

 

로 이어질수도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챕터 말미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전에는 정치인, 기업가, 고위

 

관료들이 검사를 사위로 삼았던 일이 많았던 반면, 80년대를 지나면서부터는 검사가 검사를

 

사위로 맞는 법조인 집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수 차례 실명이 언

 

급되고 OO씨 등으로 표기된 경우도 성씨와 직급이 소개되어 있어 관심을 갖고 조사해 보면

 

금세 누구인지 알 수 있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이순혁이 전하는 '우스갯소리' 하나. 검

 

찰에서는 사법연수원으로 교수가 파견되는데, 그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주어진다고 한다.

 

수한 연수원생들이 검찰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과 선배들에게 법조인 사위를 골라주는 것.


2부 '검사의 적, 검찰'은 본격적인 내용인 2, 3, 4부 가운데에서도 핵심으로, 검찰의 문제

 

적 현상과 그 원인에 대해 밝힌다. 세 개의 소챕터로 나뉘어져 있는데, 소챕터 내에서도 주

 

제 별로 다시 제목을 달고 있어 그들을 소개하는 것 만으로도 책의 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부의 첫 번째 소챕터인 '피라미드형 조직'은 검찰의 조직 형태와 인사 기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검찰의 조직문화는 이른바 '검사 동일체'라는 말로 대표되는데, 이는 검찰조직은 하나

 

이며 전국 검사도 하나라는 뜻이다. 이러한 검찰 조직은 철저한 기수 문화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서의 인사는 다시 학연과 지연, 근무연과 혈연으로 이루어진다. 평검사가 승진하려

 

면, 좋은 '평판'과 연줄이 있어야 하고, 그 결과를 통해 서열이 매겨진다.


2부의 두 번째 소챕터 '검찰과 2 대 8 사회'는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검찰사회가 철

 

저하게 헤게모니를 쥔 2와 샐러리맨화 되어가는 8로 양분된다고 주장한다. 2는 근무처도 서

 

울에서 가까운 곳 위주로 돌아다니고, 양이 많고 빛이 나지 않는 형사부보다는 정권과 여

 

론 차원의 관심이 쏟아지는 인지부서의 요직을 독차지한다. 미네르바, PD수첩, BBK 사건 담

 

당 검사들이 모두 영전한 데에서 보듯이 승진의 단 물은 인지부서의 2가 싹쓸이하는 한편, 2

 

가 벌인 정치적 편향이나 무리한 수사 등으로 인해 국민의 지탄을 받는 경우 이 짐은 8이 함

 

나누어 진다. 8에 해당하는 평검사들의 상당수가 검찰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억울해 하는

 

이유이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검찰의 정치적 타살이라는 비난이 있었을 때, 저

 

자인 이순혁과 개인적으로 만난 상당수의 검사들은 '검찰이 청부 수사로 전직 대통령을 죽

 

게 했다. 낯을 들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2부의 세 번째 소챕터 '바보야! 문제는 조직이야'는 이러한 문제적 현상들 가운데 특히 검찰

 

권의 행사가 종종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결국 개인의 품성 차원이 아니라 이미

 

견고하게 조직화된 구조에서 기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검사 동일체' 원칙에 따라 검찰총장

 

의 의지는 곧 검찰 조직 내에 그대로 관통되는데, 이 검찰총장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삼성에버랜드 수사에서 보듯이, 총장의 고집이나 독선적 판단은 실제

 

수사팀의 조사와는 다른 방향의 결과를 종용하기도 한다. 또, 특정 사건을 어디에 배당하느

 

냐에 따라 이미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다.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전문인

 

특수부에 배당되었다면 인과 관계가 철저히 밝혀지겠지만, 평소 처리해야 할 경찰 송치 사

 

건이나 고소, 고발 사건을 수백 부씩 쌓아두고 있는 형사부에 배당된다면 사건이 규명되지

 

않은 채 넘어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배당 자체가 이미 결과에 대한 배당자의 의사를 담

 

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서만이 아니라 미시적으로는 어느 개인에게 가느냐도 영향을 미친

 

다. 



3부 '노무현과 망나니의 칼' 2부에서 배운 검찰 생리의 이론을 적용해 보는 예제와도

 

같다. 실제 사건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조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배당된 관

 

련 검사들의 특성과, 그들의 언행과 결단이 '검찰 문화'의 어떤 면을 보여주었는지, 그리고

 

그 댓가는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해 치밀하게 살핀다. 한 챕터인 만큼 객관적 기록의 세밀함

 

은 한 권 분량으로 따로 나와있는 세계일보 법조팀의 '노무현은 왜, 검찰은 왜'를 따라잡지

 

못하지만 당시와 이후 검찰과 검찰 관련자들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자

 

세히 들을 수 있는 것은 이 책만의 빛나는 수확이다. 당시 대검 중수부장이었던 이인규 씨와

 

중수1과장이었던 우병우 씨, 그리고 그들과 청와대를 잇는 연결고리였던 정동기 전 민정수

 

석이 실명으로 호명된다. 이 내용은 책을 통해 읽어보시는 것이 좋겠다. 그들이 배당된 이

 

유, 그들이 사건 이후 얻은 것, 그리고 그들과 사건의 결과에 대한 8의 평검사들의 목소리.

 

모두 우리의 '의혹'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제목인 '망나니의 칼'은 노 대통령 사후 여론의 지탄을 받던 이인규 씨와 우병우 씨가 자신

 

들의 입장을 변론하고 있던 때, 한 현직 검찰 간부가 사석에서 이순혁에게 한 말 중에 따 온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인규와 우병우가 '내가 뭘 잘못했냐'고 항변하는데, 망나니는 망나니인 줄을 알아야 한

 

다. '너 저기 가서 목 쳐'라고 해서 전직 왕의 목을 쳤는데, 그럼 자기가 죽은 왕과 같은 반열

 

이 되나? 명을 받아 목을 친 망나니는 그냥 망나니일 뿐이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

 

대중은 그만한 허물이 없어서 손 못 댔나? 강한 놈한테는 철저히 아무 말 못 하면서, 봉하마

 

을 내려간 힘없는 노무현만 잡아 족치는 것, 이건 비겁한 짓이지. ...자기들이 아무리 역사적

 

사명감 어쩌고 떠들고 해도 기껏해야 (정치권력이) 안배해놓은 틀 안에서 활용당한 것 밖에

 

안 된다. 망나니는 왕의 목을 쳤어도 망나니일 뿐이다. 그런데 왕의 목을 쳤으니 왕과 동급

 

이라도 되는 듯 사명감이 어쩌고 저쩌고 나대는 게 창피하다."



결론부인 4부 '작은 제언'에서는 제목 그대로 검찰 개혁의 방향성에 대한 제안이 거칠게나

 

마 제시되어 있다.


검찰이 이렇게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이기 때

 

문이다. 먼저, 강력함. 우리나라 검찰은 직접수사권과 수사지휘권, 기소독점권과 기소재량

 

권 등 사법 절차와 관련한 모든 분야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경찰의 수사파트 조직을 확실한

 

수하로 두고 있다. 이렇게 강력한 권한을 가진 검찰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둘째로, 중앙집권적 조직. 우리나라 검사들은 매일 주요 사건의 진행 경과와 처리 계획, 소

 

환과 영장첨구 방침 등에 대해 꼭 부장과 차장, 검사장에까지 보고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전국 검찰청에서 올라온 보고들은 대검에서 취합돼 매일 총장에게 올라간다. 결국 정치적으

 

로 민감하거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안은 대검과 총장의 뜻이 철저히 반영된다.


따라서 해답은 권한을 분산시키고 줄 세우기 인사시스템을 종용하는 중앙집권적 조직을 해

 

체하는 데에 있다.


강력함을 해체하는 데 이순혁이 제시하는 큰 대안은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이다. 현재의

 

검찰조직에서 인지수사를 하는 조직을 떼어내 경찰 수사파트와 통합시켜 통합 수사기관을

 

만들고, 나머지 검사들은 법률가로서 기소권과 영장청구권을 가지고 수사팀을 통제하는 역

 

할을 맡게 하는 것이다. 작게는 현재의 기소편의주의를 기소강제주의로 바꾸는 방안도 생각

 

해 볼 수 있다.


인사시스템을 개혁하는 대안으로는 자치 검찰제, 수뇌부의 자의적인 인사발령이 아닌 합리

 

적 업무평가 시스템의 개발, 전국적 단일 인사제도의 폐지, 분야별 전문가의 채용 등이 제시

 

되었다.



이제 총평. 작년 한 해 여론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직종 가운데 하나일 검사. 그 검사라는

 

직종의 특성과 조직 체계, 문제점의 지적과 대안의 제시, 그리고 그 전부에 대한 내부에서의

 

목소리까지가 길지 않은 분량 내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양서. 전체를 요약하자면 '검찰의

 

문제는 8의 평검사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2의 정치적 검사들과 그들이 다시 구축하는 구조

 

에 있다'는 것으로 그 내용만이라면 익히 들어온 것이지만, 정치적 검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

 

지, 또 어떻게 양성되는 것인지, 그들이 형성한 조직도는 어떻게 생겼는지, 그들이 차지한

 

직급의 위상과 권한은 어떤 것인지 등과 같은 실질적 정보를 접하다 보면 그 주장의 무게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구성과 문단의 배치 등에 있어 다소간의 흠결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도 독후감을 쓰기 위해

 

내용을 재차 정리하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고, 설사 눈에 띄는 흠이라 하더라도 그것으

 

로 생채기를 내기에는 콘텐츠가 지나치게 양질이다. 내가 만날 수 있는 검사래봐야 내 또래

 

의 지방 평검사 정도일테고, 그에게 조직을 비판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검찰의 개혁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이 책이 아니었다면

 

한동안 알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가득 있다. 법조계 인근에 있는 이에게라도 술을 몇 번은 사

 

들을 수 있었을 내용이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하면 할인과 적립을 더해 만 원 조금 넘는

 

정도.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이니 검찰에 관심있는 이라면 반드시 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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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순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1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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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호칭을 명지대 교수로 해야 하나 전 문화재청장으로 해야 하나 고민이 되어 사람들은 어떤 쪽을 더 선호하는지 검색을 해 보니, 많은 서평에서 그저 '유쌤'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쌤'이라는 줄임말이 선생
님이라는 본래의 호칭에서 존경심 등의 정신적 의미를 모두 걷어내고 단지 언어적인 효율성만을 추구한 결과라고 여겨져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그의 소탈한 모습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보여준 젊은이같은 모습을 떠올려 보면 본인도 꺼려하시지 않을 호칭일 듯. 아무튼, 유쌤의 2011년 7월 신작이다. 


제목이 담담해서 좋다. '유홍준'이라는 이름을 굳이 넣은 것은 저자의 뜻이라기보다는 출판사의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도, '유홍준의'를 빼고 그저 '국보순례'였다면 훨씬 딱딱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기는 하다. 표지에 함께 기재된 영어 제목도 'Treasures of Korean art'으로 간결하고 알기 쉬워 보기 좋다.


서문을 읽어보니 본래 조선일보에 매 주 기고하던 글 중 앞서의 백 개를 일단 묶어 책으로 낸 것이라 한다. 기고지가 하필 조선일보냐는 항의가 많았던 듯 '고정칼럼을 제공한다는데 어느 신문인들 마다하겠는가'라는 변명이 함께 실려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좋은 글이 한 지면에라도 더 소개된다면 좋은 거지 뭐,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정치얘기는 후졌는데 문화랑 경제 섹션이 빵빵해서 조선을 못 끊어'라는 흔한 넋두리들에 논거가 되어주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저자 본인도 고민이 되었다는 흔적을 보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책에는 모두 백 개의 문화재가 '그림, 글씨', '공예, 도자', '조각, 건축', '해외 한국 문화재'의 네 개의 카테고리로 나뉘어 소개되어 있다. 책을 집어들었을 때에는 이 기회에 국보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아두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는데, 읽어보니 제목과 달리 실제로 기재된 문화재들이 모두 국보인 것은 아니었다. 저자가 개인적으로 '국보급'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재들을 선별한 것인데, 속았다는 불쾌감은 들지 않고 오히려 여러 문화재들을 접할 수 있는 즐거움이 더했다.


구성은 가독성을 고려한 듯 왼쪽에는 해설, 오른쪽에는 도판으로 통일되었고, 글이 조금 길어지거나 소개해야 할 도판이 많은 몇몇 예외의 경우에도 최종 분량은 두 장으로 맞추어져 있다. 미술 평론서를 읽다 보면 해설을 읽다가 앞쪽에 나왔던 그림을 다시 보기 위해 책장을 몇 번이고 들척거려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잦은데,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없어 읽기가 아주 편했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저자가 서문에서도 자부하고 있듯 도판이 큼직큼직하여 보기가 시원하다는 것이었다. 큰 사진을 통해 문화재의 구석구석을 관찰할 수 있으니 저자의 '감상'에 공명하기가 무척 용이했다. 큰 건축물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작은 조각상이나 공예품 가운데에는 실물의 크기에 육박하는 사진들도 있어 사진만을 보려고도 몇 번이나 다시 책을 펼쳐보곤 했다.


저자의 유려한 글을 읽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편마다 단순히 주관적인 감상만이 아니라 문화재에 이름을 붙이는 법이라든지, 문화재에 얽힌 역사적 사실이라든지 하는 전문적 지식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음에도 쉽고 간결한 말로 소개되어 있어 한 번도 긴장하거나 끊기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말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쉬운 내용을 어렵게 말하는 것도 사기꾼이라면 능히 해 낼 수 있는 일이지만, 어려운 내용을 쉽게 말하는 것은 고수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책의 말미에는 소개된 문화재의 이름과 재료, 창작 시기, 크기, 문화재 지정번호, 소장처 등의 정보를 기재한 표와 그 표를 영어로 번역해 놓은 것도 함께 실려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도 겸하고 있다. 문화재 공부를 더 심층적으로 하고자 하거나 실물을 직접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알기 쉽고 좋은 글에 대해 독후감을 쓰기란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저자가 뜻하고 전달하고자 했던 바가 누락된 점 하나 없이 책에 그대로 잘 설명되어 있으니 이런저런 군말을 붙이는 것이 일독을 강권함만 못하다. 두 권쯤 사서 한 권은 갖고 한 권은 아끼는 이에게 주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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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함정 - 금태섭 변호사의 딜레마에 빠진 법과 정의 이야기
금태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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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인 금태섭 씨의 2011년 6월 작. 표지의 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가 하도 거창하기에 주위의 독서광에게 물어 보았더니 <디케의 눈>과 같은 저작은 베스트셀러에도 올라간 바 있는 유명 저자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날개의 소개에 따르면 12년간 검찰 생활을 하였고 현재는 법무법인 '지평지성'의 파트너 변호사이자 서강대의 로스쿨 겸임교수라고 한다. 법조계에 관해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 언제나 도움을 청하게 되는 조 선생에게 문의 전화를 해 보았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네이버와 위키피디아로만 검색해 보았다.


지평지성에 관해서는 국내 법무법인 가운데 6-7위의 규모라는 것과 M&A 등 경제 이슈와 관련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이후에 이 법무법인의 성격에 대해 더 알게 되면 댓글 형태로 정리하여 덧붙이겠다.

금태섭 씨와 관련된 소개나 인터뷰 등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실은 2006년 한겨레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기사를 연재하다가 검찰에서 쫓겨난 일이다. 이후 변호사가 되어 EBS 프로그램과 라디오 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다고 한다. 한진중공업으로 갔던 희망버스에도 참여한 바 있고, 근래에는 곽노현 교육감 사건과 관련하여 '진보는 곽노현과 절연하고 사건을 지내보자'는 트위터 글을 올렸다가 큰 반대 여론에 부닥친 바가 있었다.


책 이야기. '탐정이 되고 싶었다'는 저자의 소원이 반영된 결과인지, 검은 바탕에 혈흔, 수갑, 나침반, 발자국 등의 그림이 그려진 표지는 B급 탐정소설을 연상시킨다. 종이도 가벼운 재질의 것을 썼는지 270쪽 정도 되는 책이 무척 가볍다. 읽기도 전에 호감이 간다.


책은 주제별로 묶은 4개의 큰 챕터와 그 아래 각각의 이슈로 묶은 26편의 작은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한 작은 챕터 당 하나의 이슈만을 다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흉악범에 대한 사형은 정당한가'나 '자백, 정말 믿을 수 있을까'와 같이 저자의 직업과 관련된 법적 지식에 관해 다루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음란함을 정하는 기준'과 같은 문화적 이슈, '과학은 정답일까'와 같은 과학 이슈, 그리고 '유신의 추억',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자들에게'와 같은 정치적 입장 표명의 글도 있다.


위와 같이 가치판단적인 여러 이슈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저자는 먼저 이슈와 관련된 실제 사건, 혹은 본인의 경험 등을 제시하여 흥미를 돋운 뒤 그에 관련된 소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저자는 두세 장의 짧은 분량 안에 소설을 요약하는데, 단순하게 앞장부터 차례로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을 쟁점을 위주로 유기적인 재편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요약을 읽는 것만 해도 무척 재미있다. 요약이 끝나고 난 뒤에는 저자의 시각으로 해당 이슈의 논쟁점을 다시 한 번 정리해 준다. 저자는 대부분의 이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논쟁점과 논거로 삼을 생각 거리가 이미 충분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에, 저자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머리 속으로 가상의 토론을 벌이며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책의 꼬리에는 책에 소개된 소설의 목록이 다시 정리되어 있다. 살펴 보니 서너 편을 제하고는 모두 국내에 번역된 책들이다. 소설의 요약을 읽으며 흥미를 느꼈던 사람이 쉽게 그 책을 찾아볼 수 있게 한 친절한 시도이다.


문학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의 교재로 '문학 입문' 수업에 써도 좋을 것 같고, 우리 사회의 논란적 쟁점은 어떤 것이 있으며 나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의 교재로 '철학 입문' 수업에 써도 좋을 것 같다. 만약 학부생 후배들이 '저는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라고 물어오면, 한동안은 이 책을 추천하겠다. 값은 12,000원,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면 10,800원. 휼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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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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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 예약까지 걸어 도서를 구매하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자칭 민족정론지인 <딴지일보>의 종신 총수이자 이명박 대통령 헌정 방송 '나는 꼼수다'의 진행자인 김어준 씨(이하 김어준)의 9월 신작, <닥치고 정치>.

내가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이미 알라딘을 비롯한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영화와 함께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공지영 씨의 소설 <도가니>에 이어 베스트셀러 2위에 올라가 있다. '나는 꼼수다' 21회 방송에 따르면, 예약 시점에 이미 2위까지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굳이 다시 적는다. 닥치고 사자.


이 책의 미덕부터 정리하고 시작하자.


하나,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컨텐츠.

'나는 꼼수다'에서 이미 증명되었던, 그러나 방송이라는 특성상 (그리고 정봉주 전 의원의 활약에 힘입어) 정리되지 못하거나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던 방대한 팩트(fact), 그리고 팩트 간의 유기적인 연결이 활자로 차근차근 적혀져 있다. 이어폰을 통해 들을 때에는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다시 한 번 듣고 싶거나 하면 임꺽정 소굴 같은 웃음소리들을 피해 가며 되돌려감기를 해야 했지만, 책은 그냥 다시 한 번 읽으면 된다. 보수와 진보, 각하와 BBK, 삼성과 이건희, 그리고 유력 정치인들에 대한 인물평과 '나는 꼼수다' 홍보까지, 선물상자처럼 꽉꽉 채워 넣었다.


둘. '인터뷰 북'이라는 전달 방식.

몇몇 부분에서 김어준이 다시 문어체로 정리한 흔적들이 보이지만, 이 책은 본래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 씨(이하 지승호)의 인터뷰 북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다. 지승호는 현재 활동 중인 인터뷰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로, 전문 인터뷰어라는 직종을 개척했다고까지 평가받는 인물이다. 지금까지 낸 20여 권의 인터뷰 북에서 그의 역할은 대체로 토론자나 추종자가 아닌 공정한 질문자에 한정되어 있고, 질문의 분량은 인터뷰이의 대답에 비해 형편 없이 적지만, 책을 두 번, 세 번 읽어보면 그 질문들이 적재적소에, 인터뷰이가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특성이, 김어준이라는 '필자'를 만나 시너지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필자로서의 김어준은 극단적으로 감성에 호소하는 글에 능하다. 대체로 구어체이고, 시적이거나 철학적인 표현과 허를 찌르는 비유를 능란하게 구사하며, 논리적인 본론보다는 임팩트 있는 결론을 선호한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짧은 분량의 기사나 선언문 등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감성적인 호소력 못지 않게 논리적인 증명 또한 필요한 한 권 분량의 서적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인터뷰 북'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최종적으로 글로 표현되었으나 본래는 입으로 말한 것이라고 하면 그만이고, 아울러 한 의미 단위의 발언이 끝날 때마다 지승호가 다시 한 번 정리를 하거나 설명이 미진한 부분, 혹은 논쟁적인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는 형태로 완급을 꾀하고 있는데 그 결과가 대단히 성공적이다. 구어의 힘은 살리고 논리적 흐름을 보완했다. 이 콤비,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셋. 타이밍.

만사가 일촉즉발이다. 오세훈 씨의 시장직을 제외하고, 올 한 해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들 가운데 매듭이 지어진 것은 아직 아무 것도 없다. 곽노현 교육감의 유무죄, 저축은행의 최종 향방, 문재인 씨의 출마 여부 등 거대한 흐름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이슈들이 미결인 상태로 나날이 덩치를 키우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한 정보와 합리적인 예측이 간절한 상황이다. 영웅을 기다리는 난세에, '나는 꼼수다'라는 보검까지 옆에 차고 등장한 이 책. 잘 기획된 상품이다. 성공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 서점 구입으로 10% 할인, 예약구매자에 한해 2000원 적립금 증정 행사를 합쳐 약 만 원에 구입했는데, 정가인 13,500원을 주고 샀어도 전혀 후회하지 않았을 책이다. 두 배로 비쌌더라도, '나는 꼼수다' 청취료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지불했을 것이다. 위에는 '닥치고 정치'라는 주제와 주로 관련하여 이 책의 장점을 논했는데, 본문 가운데에는 여러 주제들에 대한 김어준 특유의 세계관, 가치관이 다량 제시되어 있어 그와 내 생각을 비교해 가며 가상의 토론을 벌이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 정리하여 구매 추천.


참, 끝내기 전에 하나만 더. 어준이 형, 책 표지는 사기야, '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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