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비커밍 - 미셸 오바마 자서전
미셸 오바마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미셸 오바마의 성장 과정과 오바마를 만나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퇴임까지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백악관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미셸 오바마의 가식적이지 않은 가치관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바마 정부에서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동성 커플 결혼의 합법화를 추진하고 미셀 오바마 또한 인권 운동의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점: ★★★★☆



내가 되다
우리는 부모님이 담뱃불을 붙이면 일부러 콜록거렸고, 종종 담배 심부름에 반항했다. 아주 어렸을 때 한 번은 선반에 놓인 새 뉴포트 담뱃갑을 뜯어서 그 속의 담배들을 줄기콩 분지르듯이 싱크대에서 똑똑 분질렀다. 담배 끄트머리에 일일이 핫소스를 묻혀서 도로 넣어두기도 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폐암에 대해 설교하면서, 학교 보건 시간에 시청한 영상 속 끔찍한 장면을 중계했다. 흡연자의 폐는 숯처럼 메마르고 새카맸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의 죽음이요, 몸속에 죽음을 품고 사는 셈이었다. 반면 담배 연기에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폐는 발그레한 분홍색이었다. 이토록 명백한 대비가 또 어딨나 싶어서, 우리는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연은 좋고, 흡연은 나쁘다. 금연은 건강이고, 흡연은 질병이다.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바가 바로 그런 것이었는데도, 부모님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담배를 끊었다.


우리가 되다
사우스사이드에서 흑인으로 자란 탓에, 정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정치는 전통적으로 흑인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정치는 내내 흑인을 고립시키고 배제했고, 흑인이 교육과 고용과 고소득을 누리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막았다. 나의 두 할아버지는 끔찍한 짐 크로 법과 굴욕적인 주거 차별의 시대를 살았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모든 권위를 불신했다(앞에서 말했듯이 외할아버지는 치과 의사조차 자신을 박해하려 든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인생의 대부분을 공무원으로 살면서 사실상 반강제로 동원되어 민주당 선거구 관리자로 일했는데, 승진을 꿈이라도 꾸려면 그래야 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좋아했지만 시청의 족벌주의는 늘 못마땅해했다.
시카고로 돌아온 버락은 나를 달래는 해독제가 되어주었다. 그는 내 걱정을 들어주었고, 돈 문제를 들어주었고, 자신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도 우리가 둘 다 안락하고 예측 가능한 변호사 생활에 안주할 의향이 없으니 정확히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는 알 수 없다고 인정했지만, 이것저것 다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전혀 가난하지 않으며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어쩌면 쉽게 계획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 밝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한번 해보라고 말해주는 사람, 걱정을 지우고 행복할 것 같은 방향으로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버락뿐이었다. 그는 내게 미지의 세계로 도약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왜냐하면—그리고 이 주장은 나의 두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친척에게는 충격적인 소리로 들릴 말이었다—사람이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다고 해서 꼭 죽는다는 법은 없으니까.
걱정마, 우리는 할 수 있어, 어떻게든 해날 거야, 이것이 버락의 생각이었다.

몸소 체험하기 전에는 남들로부터 아무 이야기도 들을 수 없는 일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첫 항목은 유산으로 하겠다. 유산은 외롭고, 괴롭고, 거의 세포 수준에서 상심하게 되는 일이다. 유산을 겪은 여성은 그것을 개인적 실패로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혹은 비극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 순간에는 물론 비참하겠지만 그 또한 오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사실 유산은 늘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여자들이 유산을 겪는다. 다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주제일 뿐이다. 나 역시 친구 두어 명에게 유산 사실을 털어놓고서야 알았다. 친구들은 애정과 지지를 보내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유산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렇다고 내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같은 괴로움을 겪었다는 친구들 이야기 덕에 조금은 더 잘 견딜 수 있었다. 이때 비로소 유산은 생물학적 딸꾹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타당한 이유에서 수정란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편이 좋겠기에 벌어지는 정상적인 일이었다.

처음에 버락은 부부 상담을 내키지 않아 했다. 그는 복잡한 문제를 맞닥뜨리면 직접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낯선 사람 앞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좀 드라마 같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불편한 일이었다.
상담사는—우드처치 박사라고 부르자—부드러운 말투의 백인 남성으로, 좋은 대학을 나왔고 늘 면바지를 입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버락과 내 이야기를 다 들어본 뒤 즉각 내 불만이 모두 타당하다고 인정해줄 거라 예상했다. 내 입장에서야 내 불만은 전부 절대적으로 타당했으니까. 모르면 몰라도 버락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겪어보니, 상담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드처치 박사는 누구의 불만도 승인해주지 않았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대목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표를 던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감하며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고, 우리가 각자 감정의 미로에서 헤어나도록 도왔으며, 개인의 상처 때문에 자동으로 상대에게 무기를 휘두르지 않도록 타일렀다. 우리가 너무 변호사처럼 따지고 들면 주의를 주었고, 세심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이유를 생각해보도록 이끌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이야기하다 보니 서서히 매듭이 풀렸다. 상담실을 나설 때마다 버락과 나는 서로에게 좀 더 연결된 기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같은 반 남자아이 하나가 나를 때렸다. 그 아이의 주먹은 혜성처럼, 난데없이, 온 힘으로 내 얼굴에 날아들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려고 줄을 서서, 예닐곱 살짜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가 가장 빨리 달리는지, 크레용 색깔의 이름들은 왜 그렇게 이상한지. 그런데 그때, 퍽 하고 주먹이 날아왔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 아이의 이름도 잊었다. 하지만 아픈 데다가 어안이 벙벙해서, 벌써 붓기 시작한 아랫입술과 뜨거운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멍하니 그 아이를 보았던 것은 기억난다. 나는 너무 놀라서 화도 못 내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 아이는 담임선생님에게 야단맞았다. 우리 어머니도 학교로 가서 직접 그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가 내게 가한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가늠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그날 우리 집에 와 있었던 외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답게 발끈하여 자신도 학교에 따라가겠다고 우겼다. 나는 내막을 전해 듣지 못했지만, 어른들끼리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고 모종의 처벌이 내려졌다. 그 아이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내게 사과했고, 어른들은 또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 아이는 너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다른 일 때문에 겁먹고 화났던 거야.” 나중에 어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지으면서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내게는 말해줄 수 없지만 속사정이 다 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아이는 자기만의 어려운 문제를 겪고 있단다.”

우리는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그렇게 대처했다. 어릴 때는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웠다.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는 사실 자신이 겁나기 때문에 남을 겁주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의 터프한 여자아이 디디가 그런 경우였다. 아내에게까지 무례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던 우리 친할아버지도 그런 경우였다. 그런 사람이 남을 휘갈기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했다. 아마도 묘비에 “인생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는 것” 같은 말을 새기고 싶어 할 어머니에 따르면, 그런 상황에서 유념할 점은 상대의 모욕이나 공격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면, 그때는 정말 상처가 된다.
내가 이 문제를 진지한 숙제로 맞닥뜨린 것은 훨씬 뒷날이었다. 40대 초반이 되어 남편의 대선 선거운동을 돕는 처지가 되어서야,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급식 줄에서 얼굴을 맞았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난데없는 공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아무 경고 없이 얼굴을 강타당한 것이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났다.
나는 2008년의 대부분을 그런 주먹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보냈다.


그 이상이 되다
백악관에 텃밭을 일구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더 큰 활동의 시작이 되기를 바랐다. 버락의 행정부는 더 많은 미국인이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에 집중했는데, 텃밭은 그것과 연관된 건강한 생활 방식에 관해서도 메시지를 줄 수 있었다. 또한 텃밭은 내가 퍼스트레이디로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볼 시운전 격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텃밭은 일종의 야외 교실, 아이들이 먹거리를 기르는 일에 관해서 배울 수 있는 장소였다. 게다가 자연에 관한 일일뿐 정치와는 무관해 보였고, 내가 부삽을 쥔 여성의 모습으로 수행하는 무해하고 순수한 활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우리의 행동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까 염려하여 노상 대중의 ‘시선’을 들먹이는 웨스트윙 고문들도 달가워할 것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텃밭을 통해서 사람들과, 특히 각급 학교 및 부모들과 영양에 관한 대화를 나눠볼 계획이었다. 그 대화가 더 나아가서 오늘날 식품의 생산방식, 성분표 기입 방식, 마케팅 방식을 살펴보고 그 현실이 사람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진행되면 좋을 듯했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그런 주제를 언급하는 것은 거대 식품 및 음료 회사들이 수십 년간 추구해온 사업 방식에 암묵적으로 도전하는 셈일 터였다.

2011년 겨울, TV 리얼리티쇼 진행자이자 뉴욕의 부동산 개발업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버락이 재선에 나설 201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예비선거에 도전하겠다는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전반적인 인상으로, 그냥 소음만 빚어내다가 말 것 같았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서 버락의 대외 정책에 대하여 전문적이지도 않은 비판을 늘어놓았고, 버락의 시민권에 공공연히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이른바 ‘벌서birth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버락의 하와이 출생증명서가 위조된 것이고 그는 사실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을 퍼뜨렸는데, 트럼프가 그 주장을 되살리려고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그는 방송에 나와서 갈수록 허황된 주장을 펼쳤다. 1961년 호놀룰루 신문에 버락의 출생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는 이야기는 사기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버락이 다녔다는 유치원의 급우들이 아무도 버락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는 거짓 주장도 펼쳤다. 조회수와 시청률에 목매는 뉴스 매체들은—특히 보수적인 매체들은—그런 근거 없는 주장을 희희낙락 부채질하기에 바빴다.

물론 그것은 야비하고 정신 나간 소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속에 담긴 편견과 외국인 혐오는 누가 봐도 뚜렷했다. 하지만 그래도 위험했다. 그것은 극우파나 정신 나간 사람들을 자극하려는 고의적 발언이었다. 사람들 반응이 두려웠다. 가끔 심각한 위협이 인지될 때면 비밀경호국이 내게도 알려주었는데, 세상에는 정말로 그런 소리에 선동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놀랐다. 걱정하지 않으려 해도 걱정될 때가 있었다. 웬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이 총을 갖고 워싱턴으로 들이닥치면 어쩌나? 그 사람이 우리 딸들을 찾아가면 어쩌나? 도널드 트럼프는 무모한 암시가 담긴 시끄러운 발언으로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협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영원히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걱정을 접어두고, 여러 보호조치를 믿으면서 그냥 살아가야 했다. 우리를 ‘타자’로 규정하려는 이들은 몇 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버락과 나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방식을 본다면 진실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런 이들의 거짓말과 왜곡을 초월하려고 애써왔다. 일찍이 버락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 때부터, 많은 사람이 진심과 선의로 우리의 안전을 걱정하는 말을 건네왔다. 사람들은 유세장에서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도록 늘 기도한답니다.” 모든 인종, 모든 배경,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당신과 가족을 위해서 매일 기도한답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가슴에 품고 지냈다. 우리의 안전을 기도해주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느꼈다. 버락과 나는 각자의 신앙심에도 기댔다. 이제 우리가 교회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예배하러 걸어 들어가는 우리에게 기자들이 고래고래 질문을 던지는 등 야단법석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대선 기간 중 제러마이아 라이트 목사에 대한 사상 검증으로 한바탕 소란을 겪고 정적들이 신앙을 무기 삼아—그들은 버락이 ‘은밀한 무슬림’이라고 주장했다—공격하는 것을 본 후 종교 활동은 집에서 사적으로만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매일 저녁 식사 전에 기도를 올렸고, 딸들을 위해 백악관에서 몇 차례 교리 강습을 열기도 했다. 워싱턴의 특정 교회에 적을 두지는 않았다. 우리가 시카고에서 다녔던 트리니티 교회의 신자들이 우리 때문에 겪었던 부당한 공격을 다른 교회의 신자들에게 또 겪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결정에는 희생이 따랐다. 나는 영적 공동체의 온기가 그리웠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리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기도하는 버락이 보였다.

찰스턴에서 장례식이 열린 2015년 6월 26일, 연방대법원이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렸다. 미국 50개 주 모두에서 동성 커플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판결이었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여러 주와 여러 법정에서 차례차례 체계적으로 법적 싸움을 벌여온 결과였으며, 모든 인권운동이 그렇듯이 많은 사람의 끈기와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그날 나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간간이 미국인들이 그 소식에 기뻐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환희에 찬 군중이 연방대법원 앞 계단에서 “사랑이 이겼다!”라고 외쳤다. 동성 커플들이 전국의 시청과 지방법원에 밀려들어서 이제 헌법이 인정하는 권리를 행사했다. 게이 바들은 일찍부터 문을 열었다. 전국의 길거리에서 무지개색 프라이드 깃발들이 펄럭였다.

이 일은 같은 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슬픔을 겪었던 버락과 나를 조금은 기운 내게 해주었다. 백악관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장례식 복장을 벗고 아이들과 얼른 저녁을 먹었다. 그 후 버락은 ESPN을 켜놓고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트리티룸으로 사라졌다. 나는 드레스룸으로 가다가, 관저의 북면 창문들 중 하나가 보라색으로 빛나는 걸 보았다. 그제야 우리 직원들이 백악관 전면에 프라이드 깃발의 무지갯빛 조명을 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일이 기억났다.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단호히 맞서야 하지만 그러느라고 나까지 그 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인즉, 우리는 이제 그런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약자를 비하하고 전쟁 포로를 조롱하는 사람, 내뱉는 거의 모든 말이 국가의 품위를 해치는 사람. 나는 미국인들이 말의 중요성을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TV에서 들리는 혐오의 언어가 미국의 진정한 정신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그에 반대하여 투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주기를 바랐다. 내가 사람들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품위였다. 품위는 내 가족이 여러 세대 동안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이었고, 우리가 나라 전체로도 그 중요한 가치에 의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품위는 늘 우리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것은 선택이고, 늘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지만, 내가 살면서 만난 존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매일매일 몇 번이고 그런 선택을 내렸다. 그 문제에 관해서 버락과 내가 지키려고 애쓰는 모토가 있었는데, 그 말을 나는 그날 밤 무대에서 들려주었다. 상대가 수준 낮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이고 선거일로부터 불과 몇 주 전, 도널드 트럼프가 2005년에 어느 TV 프로그램 진행자와 무대 뒤에서 대화하던 중 자신이 여성들을 성추행해온 일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그가 쓴 단어들은 너무 외설적이고 저질이어서, 매체들은 어떻게 하면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언론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다 결국에는 그냥 기준을 낮춰버렸다. 대통령 후보자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실어주기 위해서.

그 발언을 들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영상에 담긴 위협과 남자들끼리의 농담에는 내게도 고통스러우리만치 익숙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너를 해치고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어. 그런 혐오 표현은 점잖은 공론의 장에서는 대체로 사라진 상태였지만, 문명화되었다고들 하는 우리 사회에도 골수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자가 그런 표현을 태연하게 내뱉고도 무사할 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고 널리 받아들여졌다. 내가 아는 모든 여성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타자’로 치부되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우리가 아이들만은 결코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아이들도 아마 겪을 것이었다.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아가 그러겠다는 암시조차도, 상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다. 그것은 가장 추악한 형태의 힘이다.

온몸이 분노로 떨렸다. 다가오는 주에 예정된 힐러리 클린턴을 위한 유세 연설에서는 평이하게 그녀의 능력을 알리는 데 그칠 게 아니라 트럼프의 말에 직접적으로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소리로 그의 목소리에 반격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받느라 입원한 월터 리드 육군병원의 병실에 앉아서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궁리해보았다.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조롱과 위협을 받아보았다. 흑인이고 여성이고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비하되기도 했다. 그래서 트럼프의 조롱은 내 몸을, 말 그대로 내가 세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직접 겨냥한 것처럼 느껴졌다. 토론회 도중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뒤쫒는 사람처럼 곁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녀가 말할 때 주변을 맴돌았고, 너무 가까이 다가섰고, 자신의 존재로 그녀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했다. 나는 너를 해치고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어. 여성들은 평생 그런 모욕을 겪는다. 길거리에서 듣는 성희롱, 더듬는 손길, 성폭력, 억압 행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우리의 힘을 앗아간다. 어떤 상처는 간신히 눈에 보일 만큼 사소하다. 반면 어떤 상처

어느 쪽이든 상처는 누적된다. 여성들은 학교나 직장을 오갈 때도,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도, 종교 활동을 하러 갈 때도, 한 발 전진하려고 애쓰는 모든 순간에 그런 상처를 품고 다닌다.

내게 트럼프의 발언은 또 한 번의 일격이었다. 그의 메시지가 이기도록 가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2008년부터 함께 일해온 유능한 연설문 작성자 세라 허위츠와 함께 내 분노를 말로 바꿔냈고, 곧이어—어머니가 수술에서 회복한 뒤—10월 어느 날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그 말을 청중에게 들려주었다. 한껏 고조된 청중 앞에서 내 감정을 똑똑히 밝혔다.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정치가 아닙니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참아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을 전했고, 미국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두 선택지의 본질을 잘 알고 있음을 이번 선거가 보여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연설에 내 모든 진심을 담았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렸기를 기도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은 총득표에서 상대보다 300만 표 가까이 더 얻었지만, 총 8만도 안 되는 표 차로 펜실베이니아와 위스콘신과 미시간 주에서 지는 바람에 선거인단 득표에서 트럼프가 앞섰다. 나는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므로, 이 결과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겠다. 누구의 책임이고 어떤 점이 부당했는가에 대한 의견을 내지도 않겠다. 그저 그날 더 많은 사람이 투표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특히 여성들이 유례없이 자격이 출중한 여성 후보자를 놔두고 여성 혐오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을까 하는 의아함을 평생 간직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결과는 나왔고,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고 살아가야 했다.


에필로그
이양이란 곧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성경에 손이 올라가고, 선서가 복창된다. 한 대통령의 가구가 실려 나오고, 다른 대통령의 가구가 들어간다. 옷장이 비워지고, 새로 채워진다. 그렇게 간단히, 이제 새 베개에 새 머리가 눕는다. 새 성품과 새 꿈이 눕는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백악관을 떠난 사람은 여러 가지로 스스로를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나는 이제 인생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시점에 섰다. 정말로 오랜만에, 정치인 배우자로서의 의무에서 자유롭고 사람들의 기대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황에 있다. 거의 다 자란 두 딸에게는 내 손길이 예전만큼 필요하지 않다. 남편은 더 이상 국가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다. 내가 느꼈던 책임감이—사샤와 말리아와 버락에게, 내 경력과 나라에 느꼈던 책임감이—살짝 달라지니,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도 살짝 달라졌다. 이제 생각할 시간이 더 많고, 자연스러운 나 자신으로 있을 시간이 더 많다. 쉰네 살인 나는 아직도 발전하는 중이다. 바라건대 앞으로도 늘 그러면 좋겠다.

내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 여정에는 끝이 없다. 나는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아이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고 줄 것도 많다. 나는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인생을 함께하는 일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이며 때로 그 어려움 앞에서 겸허해진다. 나는 어떻게 보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도 때때로 불안하고 내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다. 인내와 수고가 둘 다 필요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

버락이 물러난 뒤로, 나는 속이 뒤집히는 뉴스를 너무 많이 접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리면 분통이 터져서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곤 한다. 현 대통령의 행동과 정치적 의제 때문에 많은 미국인이 자신을 의심하고 나아가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너무 괴로웠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담아 세심하게 설계된 정책들이 역행하는 모습, 미국이 가까운 우방들과 멀어지는 모습,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모습, 그런 것들을 지켜보기도 괴로웠다. 가끔은 대체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에게 결코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냉소다. 너무 걱정되는 순간이면, 심호흡을 하면서 내가 평생 만나온 많은 사람이 보여준 품위와 우리가 이미 극복해낸 많은 장애물들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나처럼 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에게는 민주주의 세상에서 각자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우리는 모든 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어쩌다 그만 평범하지 않은 여정을 밟게 된 평범한 여성이다. 그런 내가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바라는 바는 이로써 다른 이야기와 다른 목소리가 들릴 공간이 더 넓어졌으면,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