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 여기에서 ‘삶‘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바꾸고 싶다. ‘The World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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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
지옥보다 더한 극한 상황에서도 남을 배려하는 따뜻하면서 유머스러운 말 한 마디와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주는 고귀한 인간의 혼을 지켜본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공포와 싸우면서도 어떤 절망에도 희망이, 어떤 존재에도 거룩한 의미가 있다는 걸 설파한다.


환경
수용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는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었다.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한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것은 관전히 틀린 말이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에게도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면서 겪는 고통이 자살을 생각하게 했다.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닌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말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남자들만 있는 다른 집단 예를 들어 군대와는 대조적으로 수용소에서는 성도착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꿈에서도 섹스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꿈에서느 ㄴ평소에 풀지 못했던 욕구나 불분명한 감정이 정확하게 나타나는 법인데도 말이다.


사랑
내가 깨달은 진리란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적 자유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질할 수 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상실
내 침구의 죽음을 초래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기대했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티푸스 균에 대항하던 그의 저항력은 갑자기 떠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되었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꿈 속의 목소리가 했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이유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시할 수 있는 것이 아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으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여러 가지 인간 집단
어떤 사람이 수감자였는가 아니면 감시병이었는가 하는 단순한 정보만 가지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의 자애심은 모든 집단, 심지어는 정말 벌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경계선이 서로 겹쳐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천사, 저 사람들은 악마라고 부르면서 문제를 단순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수용소에서 그렇게 나쁜 영향을 받았음에도 수감자들을 친절하게 대했던 감시병이나 감독은 대단한 인간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같은 동료 수감자를 괴롭힌 사람의 비열함은 정말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해방의 체험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거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한 가지만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말을 되풀이했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날, 그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해방 이후
물 속의 잠함에서 일허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로고테라피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동시에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 형성과 송환 기재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도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그 고통이 실존적 좌절 때문에 생긴 경우에는 그것을 신경질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인간을 그저 충동과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락을 얻거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이드와 자아, 초자아를 절충시키거나 혹은 사회와 환경에 그저 순응하고 적응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주된 관심사가 어떤 의미를 성취하는 데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로고 테라피는 성신분석과 구별된다.


정신적 역동성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라는 니체의 말에는 이런 예지가 담겨져 있다.


실존적 공허
일요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한 주일을 보내고 내면의 공허감이 밀려올 때,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이 겪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자살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코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좌절을 겪는 사람들이 종종 성적 탐닉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있다.
우리 세대는 셀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세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실업으로 인한 신경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젊은 환자 중에서 환자들에게 청소년기관이나 성인 교육기관, 공공 도서관 혹은 이와 비슷한 기관에서 봉사하도록 권유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엄청나게 남아도는 자유 시간을 비록 돈을 받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일에 쓸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그렇게 하자마자 경제 상황에 변화가 없고 전과 같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그들의 우울증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이 복지정책에만 의지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어떤 사람의 범죄 그 자체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은 죄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고, 죄지은 사람을 자유의지와 책임을 지닌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리해야 할 기꼐로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심지어는 범죄자들로조차도 이런 식으로 취급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지기를 원한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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