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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정인보 평전 - 조선의 얼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6년 9월
평점 :
독립운동의 방법은 여러가지다. 영화 밀정에서 본 '의열단' 처럼 무장항일운동으로
폭탄을 터뜨려 일본인을 말살하는 방법도 있고
정인보처럼 교육사업으로 또한 저술
활동으로 활발하게 사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정인보가 '얼'을 강조한것은 일본인들의 조선사연구에 대한 반발때문이었다.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쓰면서 내 얼을 빼앗아 갈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다.
나라는 빼앗겼지만 정신은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의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인보의 자극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식민지는 그렇게까지 길지 않았고 대만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동래정씨인 위당은 양명학의 본류인 강화학파의 학자 난곡 이건방의 제자이다. 처음으로 國學이라는 용어를 쓴 분으로 국문학, 국사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연희전문학교에서 30세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스승으로서 알려져 있다. 백낙준은 정인보를 실학계의 권위자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한 정인보의 실력은 인정받아 권위있는 글을 많이 쓰게 만들었다.
물론, 한문이 많은 글이고 어렵기는 하지만 글 속에 숨어있는
뜻이 심오하다.
국학에서 연구한 사람은 신채호, 송강 정철, 정약용, 단재 신채호에 관한 값진 논저를
남겼다. 정인보는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들 높이 평가했다. 정인보가 꼽는
정찰과 윤선도는 조선의 국문학사의 두 최고봉이다.
이순신장군 살리기 운동을 한 것은 몰랐던 사실이다. 일본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한 장수였다. 정인보가 신문에 사설을 널리 실어서
경매로 넘어갈뻔한
이순신장군묘를 살려냈다. 정인보의 열정과 '유적보존회'의 활동으로 성금 1만원 이상이
모금되면서 충무공의 위토를
동일은행의 저당에서 다시 찾게 되었다.
정인보가 1920~1930년대에 자주 어울렸던 지식인들은 홍명희, 문일평, 안재홍, 백남운, 손진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