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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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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심리 묘사는 내용과 형식의 아교 중 하나


올해 봄부터 계속 붙잡고 있었지만 가을에 접어들어서야 모두 읽었다.

형식과 내용을 일체시켜 써나가기 위해 4년의 집필 동안 엄청난 노고를 쏟아 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작가가 집필하던 시대에는 외설적인 장면이나 묘사가 파격적이었을 지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는 지루하거나 절정 장면은 생략되어 있다. 반대로 배경 묘사나 사물 묘사는 너무 상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 읽는 데 몰입감을 떨어뜨리고 늘어진다.

세밀하게 되어있지만 늘어지는 외적묘사와는 다르게, 세밀한 심리묘사는 지루하지 않고 한 부분(보바리의 심정이 로돌프의와의 관계에서 서너번에 걸쳐 전복되는)을 제외하면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었다. 시대상이 담긴 그의 진한 묘사가 때로는 불편하기도 했지만 또 어느 부분에서는 너무나 적확한 것만 같아서 공감을 샀다. 또한 파멸로 내딛는 3부에서는 전개 속도가 탄력을 받고, 주인공 중심적으로 다뤄져서 이야기나 심리의 서술이 소설의 끝을 향해서 곤두박질 친다.
플로베르는 보바리의 연정 사이사이에 주변 인물들의 모순된 행동과 심리를 배치함로써 이야기의 외연을 확장해주고, 심지어 어느 대목에서는 개인의 심리와 그와는 상관 없이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을 배치함으로써 부조리와 같은 블랙코미디의 뉘앙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기까지 플로베르가 낭만주의와 욕정만을 비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지에서 비롯한 과도한 자연주의, 물질 만능주의 또한 비판하고 있다. 그 예로 뒷부분에서 신부와 약제사의 말다툼, 그리고 그들의 타협과 기만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인간 그 자체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있다.



하지만 연정을 묘사하는 부분이나 주변 환경을 묘사하는 부분은 너무나 따분하고 과잉된 묘사가 즐비했던 것만 같다. 그건 이 소설이 쓰인 시대 탓이겠다. 하지만 현대 독자들에게는 그런 점을 감안하고 읽더라도 신통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의 치밀한 구성과 심리 묘사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면 부르지니엥 씨가 방안에서 성수를 뿌렸고 오메도 질세라 클로르 수를 마룻바닥에 조금 뿌렸다.`

...샤를르(죽은 보바리의 남편)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여전히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로돌프(첫번 째 연인)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 온종일 숲속을 헤매다닌 뒤 자기 집에서 편안히 자고 있었다. 저 멀리 레옹(두 번째 연인)도 역시 자고 있었다.
이 시각에 자지 않고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전나무 숲속의 무덤가에 한 아이(약제사의 조수)가 무릎을 꿇고서 울고 있었다. 흐느낌으로 찢어질 듯한 그의 가슴은 달빛보다도 더 부드럽고 칠흑 같은 밤보다도 더 헤아릴 길 없는 엄청난 회한에 짓눌려 어둠 속에 헐떡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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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시바타 쇼 지음, 이유정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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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그래도 우리 젊은날`로 번역된 판도 있다. 작중 화자는 60년대 일본의 안보투쟁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세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혁명이라는 미명하에 청춘을 빛내기 위해 투쟁을 준비하던 젊은이들은 무력 투쟁의 노선이 타협이라는 안이한 노선으로 변경되면서 부풀었던 꿈이 좌절된다. 그리고 혁명이란 기치 앞에서 하나의 공통된 삶의 방향성을 따르던 젊은이들은 좌절된 꿈 뒤에서 방황하며 삶의 의미를 찾기위해 발버둥친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산포되어 서로의 관계를 갈라 놓게 된다.

또한 그들의 어지럽고 아련한 심리 관계를 h전집으로 관통시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또한 좋았다. 소설 중간중간 마다 나오는 각 인물들의 서간체는 그 시절의 애틋함도 보여준다.

작중 화자는, 자신들은 나이를 빠르게 먹을 수 밖에 없는 `세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청춘을 나이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청춘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과 타협을 겨우 이뤄낼 정도의 무력함 속에서 안이한 노선을 따라 자신 앞에 깔린 철길을 올곧이 달리기만 하는 것이라고도 들린다. 자신 내면의 공허감에 익숙해져서 허우적거릴 수도 없을 만큼 익숙해져서, 그 공허와 밀착되는 삶. 허나 그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한 명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의미를 찾고 내면을 채우기 위해 불확신한 노선을 탄다.

`그런 거다. 내 행복이나 불행은 문제가 아니다. 세츠코의 행복이나 불행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살았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한다. 사람은 자기 세대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일조차 가능하기에......`

어느 세대도 불문하고.

`그래도` 우리 젊은 날인 것이다.

자신이 배반자라고 여겨질 때 마지막 남아 있는 수단은 글을 쓰는 것이다 - 장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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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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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무 의미를 갖지 않을 때까지.

그의 첫 저작, 그는 이 책으로 분노를 터뜨리기 보다는 증언을 하기 위해 썼다고 한다.거친 문체가 급박함을 전해준다. 그러나 그 거친 문체 속에서 담담한 그의 어조와 인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수용소를 파헤친다. 이성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반복되는 본능 욕구에 복종할 수 밖에 없고, 이해하려 들면 오히려 낙오되며, 갖잖은 동정심을 품게 되면 도태된다.
무(無)로 향해 내동댕이 쳐지는 인간, 인간을 인간이라 말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내몰린 헤프틀링(피수용자)들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그들이 일어서는 과정이 그려지는 뒷부분에서는 존엄을 갈구하는 인간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수용소의 있는 헤프틀링은 인간이 아니기에 죽어가는 인간을 방치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게 아니라 인간이 될 수 없도록 길들여졌다. 생각할 수 있는 빈틈이 생기면 양심으로 인해 가책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러나 그들은 인간일 수 있도록 지친 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간다.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나아가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부록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 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수용소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것, 그러니까 등산으로 체력이 단련되어 있었다거나 화학자였다는 것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화학자라는 직업 덕분에 마지막 몇 달 동안 약간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보다는 지칠줄 모르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늘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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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처럼 2016-09-08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랑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꼭 읽어야지,하고 오래 벼르고 있는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다음에 읽으려고 하다보니 계속 시작하질 못하네요. 작지만 너무 뜨거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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