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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낯선 용어를 처음 접하던 순간의 인상이 지배적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법칙만 제대로 외우고 있고 적절한 값만 대입하면 단일하고 확실한 정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던 그때까지 내가 알던 과학의 세계에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이란 용어는 어딘가 불길하고 심술궂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등장했다.
지각과 맨틀의 경계를 발견한 외국 과학자의 이름을 딴 그 명칭이 얄궂게도 모호함을 연상시키면서 시작하게 되더니, 게다가 연속면이 아닌 불연속면으로 끝나면서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낯설게도
올해 노벨 문학상은 단편 소설 작가 앨리스 먼로가 받게 되었고
처음으로 접하게 된 그 분의 최신 작품집 역시 단편집이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인물들의 소소한 일상을 다루고 있다고 하나
책장을 넘기는 속도를 그다지 낼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그려 보기 힘든 상황을 작품 속에서 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일상에 내재한 비일상성이라는 불연속면에 맞닥뜨리면서
불시에 공격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람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 늘 걸음을 서둘렀다.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은, 결국 세상 모든 것이 그리 필연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사람들은 무심한 듯, 하지만 다급하게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을 통과한다.
p35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지진파 속도의 급격한 증가라고 배웠다.
내게 익숙하고 또 그 원리를 완전히 파악했다고 여겼던 그 세계의 필연성을 따르지 않는 또 다른 차원에 들어설 때 우리의 걸음도 그렇게 다급해지는 걸까?
그렇게 자각하게 된 불연속면의 존재를
일일이 설명하거나 해석이나 판단을 결부시키지 않는 것이
이 단편집 전체를 관통하는 매력이자
노작가의 독특한 친절하지 않은 친절함으로 다가온다.
“날마다 지겹게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사는 사람들이 설명이란 것을 해야 한다면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pp9-10“ 나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땅 캐나다란 곳에서 살아가는 극중 인물들과 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녀는 그와의 만남을 늘 예상했다는 듯이 아주 잠시만 놀랄 것이다. 살다보면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하더라면서.
p278
호들갑 떨지 않으면서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 두는
넉넉한 포용의 시선이 위안이자 든든한 힘이 되었다.
이 작품집에서 처음 만나게 된 작품 <일본에 가 닿기를>에 실린 편지가
어떤 보통의 의사소통적 기능과는 상관없이
시에 가까운 형식으로 쓰여져서
결말부에서 예상외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듯이
여운이 가득한 글이란
그렇게 기대하지 못했던 만남,
그게 꼭 타인이 아니어도
어떤 시절의 나 자신, 추억 등과의 만남을
이루어지게 한다.
이 책의 마지막에 자리한 <디어 라이프>에서
네터필드라는 처녀 때 성을 지닌 여자의 시도
작품의 화자에게 인생이 건네는 편지처럼 느껴진다.
화자는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 주지 못했으나
dear life가 쓱 들어간 표현 그대로
죽기 살기로 화자를 빼앗기지 않고 지켜냈던 어머니야말로
그 때 내가 정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던 분이었다고 할 때
그 순간을 따뜻이 조명하는 한 줄기 빛, 라이트가 비추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