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들여보고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이모> p107
이 소설집 내내 '거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누군가를,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의 간격이 필요하기도 하고...
"탁자 왼편의 햇살은 어느새 반짝이는 얇은 끈의 두께로 줄어 있었다. 문정은 여기까지만 얘기하자고 생각했다."
<카메라> p123
무심히 인지한 풍경 묘사에서도 뭔가 일이 있을 것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참 힘이 드는 일이에요, 문정씨.
...
한뼘이라도 허구의 간격을 만들어주려는 거"
<카메라> p134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실내화 한켤레> p176
시공간의 간격을 다루는 작가님의 절묘한 솜씨란!
"선미를 휘감고 있는 묘한 분위기가 비밀스러운 안개라기보다 치명적인 가스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실내화 한켤레> 209
안개와 가스를 분별하게 만든 건 세월이 주는 선물일까, 아니면 어릴 적 추억에 찬물을 끼얹는 걸까?
#권여선 #한작가당 #창비 #안녕 주정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