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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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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의, 인간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책. 이런 에세이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계속 출판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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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성공과 부모 콤플렉스
다니엘 가이에 지음, 이선주 옮김 / 산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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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이 오른손에 한 개의 막대기를 든 모양과 여자가 어린아이를 안고 앉아 있는 모양을 형상화한 상형 한자가 바로 父母다.
총리보다 부모노릇 제대로 하기가 훨씬 더 어렵더라는 고백이 어찌 블레어 총리만의 고민이겠으며, 돈 없으면 부모노릇 하기 힘들다는 읊조림이 어찌 천박한 자본주의에 등 떠밀린 이 땅의 부모들만의 외침이겠는가? 프랑스라고 해서 다르지 않더라.

몸고생, 마음고생이 너무 심해 그만 부모노릇 사표내고 싶어질 때
그 맘 너무 쉬 위로받고자 하지 말지며,
맘 다시 고쳐먹고 부모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겠노라
스스로를 가리켜 교육전문가라 하는 이의 가르침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말지니
왕도도 정답도 그대 안에 있다 하더라.

자식이 어찌 부모의 작품이기만 하겠으며 자식이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 되었다고,
사실 거기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대개 그저 서울대 들어가면, 아니 요사이는 그 이름 들어봤나 하버드, 예일, MIT, 아니 그쪽 동네만 말고 옥스퍼드, 캠브리지 운운해대며 외국의 명문대로부터 입학허가서라도 날아들었다 할라치면 그 공 모두 부모, 그것도 어머니 된 자의 공로 운운해대니 이거 참 도무지...
해서 어찌 한순간에 그 부모 된 이의 인생을, 그것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인생을 성공이니 뭐니 판결! 종료!! 땡땡 종쳐버릴 수 있단 말인가.
부모 역할이 도대체 뭐기에~ 하는 회의가 찾아들 때,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건 부모 되기로 맘먹었을 때,
그보다 더더욱 좋은 건 부모로 사는 매순간? 문득? 아니 그보다 자주?
아니 그보다 늘 부모 된 첫마음으로 돌아가서
올바르고 책임 있는 부모상을 그려보고 찾아보고 나누고,
하여 각 가정에 맞는 나름의 가정교육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힘써 실천할지니
자식으로 하여 배우고 나날이 성장해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며
부모노릇 비로소 당당하고 스스로 대견하게 여길 날이 금일 도래하리라.  

헬렌 켈러는 말했다,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이는 설리번 선생님이었다고.
그녀의 교육이 없었다면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그리고 선생님의 교육은 한마디로 ‘사랑’이었노라고.
근본을 생각지 않을 때 우리는 시류에 휩쓸리고 결국 쓰디쓴 열매를 자신도, 사랑한다는 자식에게도 먹고 또 먹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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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나르시시스트 프랑스
이선주 지음 / 민연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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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라는 말에는 참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 ①경험, 학습, 정보를 통하여 모르던 것을 깨닫다 ②어떤 것을 이해하는 지식을 가지다 ③기술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 ④어떠한 것을 이해하다 ⑤사귐이 있거나 안면이 있다 ⑥바로 판단하여 의식하다 ⑦가치가 있다고 여기거나 소중히 여기다 ⑧인정하다 ⑨어떤 일에 상관하거나 아랑곳하다 ⑩분별하거나 판단하다 ⑪어떻게 여기거나 이해하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뜻이 분명하고 정확하게 구별되어 사용되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때로 혼란과 무지와 착각으로 인한 오해 속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뿐인가요? 저만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혼란과 무지와 착각일 수도 있는 것을 전파하려는 욕심까지를 부리곤 합니다. 자연스레 어떤 대상에 대한 저 자신의 이해를 풀어서 설명하는 해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지요. 뭐 사실 눈 뜨면 만나는 세상에 대해 어찌 입 다물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오늘 또 한 권의 책을 접했습니다.

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관찰한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 것이죠. 해석이 필요한 이유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언어적․문화적․문학적인 장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 <유럽의 나르시시스트 프랑스>는 제대로 된 의문을 품고 출발했다고 보여집니다. 외국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관점이 우열을 비교하거나 아니면 관광객의 시선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는 지은이의 문제의식에 공감합니다. 열네 해 프랑스에 머물면서 그 세상에 있되 그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의 시선으로 본 바를 모국어로 옮겨놓았군요.

 

“무슨 색깔 좋아해?”

“사데팡.”

“무슨 노래 좋아해?”

“사데팡.”

하하하! ‘사데팡’이라는 프랑스 말, 앞으로 자주 애용하게 될 거란 예감이 팍 옵니다. 대상이나 목적, 방법, 장소, 시간, 취향, 소재나 주제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이랍니다. 우문현답이올시다!

“프랑스를 아십니까?”

글쎄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를 연발하며.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불쑥 내 앞에 지은이가 나타나 “이제 프랑스를 좀 알겠어요?”라고 들이댄다면 그의 면전에 내가 해줄 말, “사데팡!”이올시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건, 책을 읽기 전의 사데팡과 읽은 후의 사데팡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 농도가 무척 진해졌거든요. 단맛도 짠맛도 그 달고 짠 정도가 각기 다르듯이 이 가을 한껏 높아진 하늘색이 그저 파랗게만 보이진 않는군요.

오만가지 파란 가을하늘을 보듯 오만가지 다른 시각의 프랑스를 만나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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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들려 주는 작은 철학
롤란드 시몬 셰퍼 지음, 안상원 옮김 / 동문선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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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말을 어렵게 하는 사람은 언어를 그릇되게 사용하는 것이다. 모든 언어의 원래 목적은 의사소통에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결집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함께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의사소통 부재의 현실 앞에서 바벨탑의 언어 혼란을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좌우를 둘러보라, 온갖 분야 전문가가 넘쳐난다. 그럼에도 혼란은 가중될 뿐이다. 아니 그래서 가중된다고 해야 하나.

정확한 언어를 찾아 나선 철학자들이 있었다. 올바른 언어를 사용할 때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들은 깨달았다. '정확한 언어의 철학'이 '평범한 언어의 철학'보다 더 나을 바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들의 활동이 멈춘 것은 아니다. 의문이 계속되는 한 -ing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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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그대의 사명은
폴 투르니에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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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폴 투르니에가 1979년, 그의 나이 여든넷에 갈파했던 여성의 '남성과 같은 일을 할' 능력 입증의 문제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지 오래다. 사실 입증을 필요로 했던 시대는 어리석음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 아니 안타깝게도 아직도 진행중이다. 솔직히 여성에게 모멸감을 줌으로써 어머니, 아내, 딸에게 가하는 어리석음의 대가, 이로 인한 우리 남녀 모두의 고통이 종식될 날이 오기나 할까 하는 약한 마음이 될 때가 참 많다.

'내가 제공하는 봉사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만 '나'라는 인격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 자신이 마치 일의 도구처럼 느껴져요.' 폴 투르니에는 말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예민한 인격 감각을 갖고 있다고. 그 때문에 인격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남성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온유함을 경멸하는 사회 풍조에 세뇌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온유함을 역겨운 감상이나 남을 진정시키는 포옹, 혹은 삶의 냉혹한 현실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부드러움 따위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온유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언뜻 보기에 아무 힘도 주장하지 못하는 듯 보이고 속전속결과는 거리가 먼 까닭에 일사분란한 해결은 요원해 보이는 그러나 그것 없이는 우리 삶이 결코 지탱될 수 없는 가치의 문제는 온유함이 그렇듯 외면당하고 있다. 온유함에 대한 투르니에의 정의는 '온유함이란 인격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격에 예민한 여성이 어찌 이 온유함에서 멀리 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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