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내 기억들은 쓸모가 있어요!
1년 반이 넘게 상담을 받았다. 초반에는 내가 겪은 많은 것들에 대한 후회만 가득했다. 요즘 들어 내가 가진 것이 많고, 내가 누려왔던 것이 많으며, 내가 겪은 많은 일들이 소중하게 느껴졌었다. 세월의 쓸모.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세월에, 내가 지나온 무수한 시간들에, 내 잘못과 연약함으로 어그러졌던 많은 것들도, 지금 경험하듯 감사한 것임을, 쓸모 있는 것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공감해주는 것 같아 안심이었다. 그래서 이 책, 너무 읽고 싶었다.
주황색의 표지는 톤 다운되어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빨간 옛날 공중전화기 또한 나와 소통하고 싶은 저자의 마음을 표현한 것 같아 설레었다. 띠지에 나온 ‘인생은 더디더라도 한곳으로 간다’는 구절은 많이 더디지만, 제 길을 찾아가고 있는가 싶어지는 내 삶에 대한 격려의 말인 것 같아 고마웠다. “오늘 당신께서 강이 그립다면 세월이 곧 당신이 되어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이 흘러서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강물이 되어버린 겁니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품고 말이지요.”
책 속을 훑어 봤을 때, 책날개의 저자의 사진도, 책 곳곳에 나오는 사진도 오래 전, 우리 엄마 세대에서 경험했을 모습들이었다.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그래서 나에게 그 ‘쓸모’를 보여줄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컬러도 아닌, 갈색의 빛바랜 사진들은 내게 그저 ‘엄마의 과거’를 추억하게 할 것 같은, 내게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산문을 한편씩 읽어나가면서, 나의 판단이 심히 급했음을, 섣부르다는 표현이 적절했음을 깨달았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편지,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보고 싶어요’와 같은 산문들은 그리운 그 사람을 떠올리게 했고, 이제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 그 사람에게까지 이 책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사진 속 기억은, 내가 가진 기억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저자분이 시인이어서일까. 산문이지만 조금 긴 시들을 모아둔 시집을 읽은 느낌이었다. 깊이, 진하게, 나의 감정을 두드렸다.
‘글씨는 곧 마음이다. 마음을 최대한 연장시킨 그 끝이 글씨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다. 마음이 신경세포를 타고 손끝으로 간다. 손끝의 근육과 살, 뼈가 협동하여 펜을 잡고 펜 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에만 글씨는 현현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편지’에 나온 구절이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온몸의 뼈와 살, 근육과 신경을 총동원하여 이 책을 썼을 저자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다.
책의 뒷 표지 소개 글에 김형수 시인의 말이 있다. ‘그의 내면에 사리처럼 박힌 감수성의 알갱이들.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 역사나 정치의 맥락이 아니라 인간의 여백에 놓인 일상임을 이처럼 실감나게 보여준 산문이 또 있었을까?’ 그의 감수성의 알갱이들을, 여백에 놓인 일상에서 만들어져가는 세계들을 발견해가는 기쁨이 너무 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