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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순간들 - 박금산 소설집
박금산 지음 / 비채 / 2020년 3월
평점 :
말그대로 소설의 순간들에 대한 책이다. 작가의 순간은 독자를 선정하고, 글을 쓴 순간이다. 그는 짧은 이야기를 읽기 좋아하는 독자가, 소설을 쓰고자 용기를 얻고, 이 책을 산 걸 다행이라 생각하게 하기를 원했다. 편집자의 순간은 작가의 작품을 소설의 발단, 전개, 절정, 결말 네 단계로 나누는 순간, '발단에 대하여', '전개에 대하여' 등 각 소설 단계의 작법을 소개하는 글을 넣도록 작가를 독려하는 순간이다.
짧은 소설을 쓰려던 저자의 의도대로, 이 책은 아주 짧은 소설과 비교적 긴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순간을 보여주는 이 소설들은 코믹하기도하거나 유쾌하기도 하며 가끔은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인생에서 몇 번 오지 않을 깨달음을 얻은 인물을 보며 여운이 남기도 한다. 간혹 이해가 안 되거나 어렵게 느껴지는 소설들도 있지만 대체로 재미있다. 웹진 느낌도 나고, 잡지처럼 읽기에도 좋다.
전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발단, 결말에 같은 인물의 에피소드가 나오는 경우도 있어서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했다 치자.' 이런 표현은 다른 내용의 소설에서 반복되기도 했다. '퍽큐'라는 말도 다른 소설 다른 에피소드에서 쓰여서 앞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소개글은 짧다. 두 페이지 안에 발단이 무엇인지, 전개가 무엇인지 다뤘다. 소설을 읽기 전에 장황한 설명문이 나와 있을까 걱정했는데, 소설가답게 담백했다. 머리말도,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짤막한 에세이도 모두 그랬다. 재밌게 썼고, 깔끔했다. 가능하다면 회색 종이로 된 에세이 부분만 따로 묶어서 읽어봐도 좋다.
발단 - "멋진 파도가 왔고, 그것을 잡기 위해 팔을 젓기 시작하는 것이 발단이다." 16쪽
전개 - "때렸으면 뛰어야 한다." 41쪽
결말 - "승부가 절정이라면 환호가 결말이다." 134쪽
각 단계에서 내가 인상적이었던 구절이다. 이전에 소설을 쓸 땐 멋진 파도가 오기 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설의 시작이 이야기의 시작이 아닌' 것을 몰랐다. 때렸지만 뛰지 않았고, 환호로 끝내지도 못했었다. 소설을 전공했지만 소설을 제대로 시작조차 못한 기분이라 좀 부끄러웠다. 절정은 써보지도 못했고, 경험해보지도 못했다.
작가는 주로 야구, 서핑, 스키다이빙 등 운동 경기를 예시로 든다. 맺음말의 꼭지도 「테니스코트에서 소설 창작하기」이다. 그는 소설을 운동하듯 써야 한다고 말한다. 흔들리지 않는 기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파도를 타기 전부터 타는 순간, 파도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매순간 집중해야 한다. 슬럼프 때에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아침 레슨에서 라켓을 들고 남들 모르게, 어느 누구도 눈치챌 수 없도록 은밀하게, 소설 창작을 생각한다. 기본은 무엇인가. 웅덩이는 무엇인가.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채운 다음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누가 슬럼프 앞에서 헤매게 될 것인가." 173쪽
운동선수가 운동에 대해 매일 생각하듯, 작가는 소설을 삶의 모든 순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소설가는 언제 어디서나 소설을 생각해야 한다고. 소설의 순간들은 그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