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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다가 자고 내일 다시 읽게 되진 않겠지? 싶었는데, 역시 그 날 저녁 퇴근하고 다 읽고 잠이 들었다. 다행히도 잠이 안 올만큼 힘든 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82년생 김지영이 자꾸만 신경쓰이고 그립고 걱정되고 도와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다.
<매화나무 아래>
요즘은 버스에서 잠도 잘 오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으려면 나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흘려보낸 이 순간들이 곧 아쉬워지지 않을까 싶다.
큰언니네 설렁탕집이 제일 잘되던 때였을 거다. 그때 언니는 자식들 등록금 대고 결혼시킬 수 있어 안 자도 피곤한 줄 모르고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다고 했다.
낮은 가지 하나를 찬찬히 짚어 가는데 손끝에 툭 튀어나온 뭔가가 닿았다. 벌렌가? 마음은 소스라쳤고 손은 그 자리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가락 끝을 동글동글 움직여 봤다. 자고, 차고, 매끄러운, 벌레라기보다는 버레의 알? 목을 쭉 빼고 실눈으로 살폈다. 겨울눈. 초록 가지와 대비되는 짙은 자줏빛의 겨울눈. 한 걸음 물러서 올려다보니 잔가지에 겨울눈이 한가득이었다. 자줏빛으로 꼭꼭 뭉쳐진 겨울눈도 있고, 벌써 살짝 열려 틈새로 초록빛이 보이는 겨울눈도 있었다.
봄이 오면 눈들은 꽃이 되겠지. 새하얀 꽃들이 나무를 뒤덮으면 마르고 갈라진 나무껍질은 보드라운 꽃잎에 가려 보이지도 않겠지. 벅차게 흐드러진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며 코끝에 매화 향이 날아노느 듯했다. 바람이 불면 새하얀 꽃잎들이 나비처럼 팔랑일 것이다. 그러다 못 이기고 한꺼번에 떨어져 함박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그때 하얀 눈송이 하나가 날아와 가지 끝에 앉았다. 꽃잎 같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송이들이 느리게 내려오고 있었다. 눈이 꼭 꽃 같네, 꽃잎 같네. 언니는 꽃이 지기 전에 오라고 자주 말했었다. 꽃이 피어 있을 때도, 꽃이 다 떨어진 후에도 그랬다.
이제 알겠다. 금주 언니야, 나도 이제야 알았어.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언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