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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연의 독설 - 홀로 독 불사를 설, 가장 나답게 뜨겁게 화려하게
유수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유수연:
나는 그들이 굳이 이 사회와 완벽하게 한 몸이 되어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회가 원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그 중심을 잡기는 매우 힘들다. 굳이 착하고 완벽하게 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굳이 사회적으로 획일적인 성공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도 만족하고 사회도 인정할 만한 성공은 해야 한다.
이런 복합성들을 어떻게 삶 안에 녹일 것인가?

유수연:
내가 정의하는 자유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자유는 사회적인 기준이나 성공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고,
두 번째 자유는 그 시대의 대중들 사이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정의하는 자유는 무엇인가?
그냥 흥청망청 술퍼마시는 것이 자유인가?
그냥 아무에게도 관섭받지 않고 게임이나 하는것이 자유인가?
나쁜 짓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자유인가?
생각해 보자!!
내가 정의하는 자유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자유라고 생각한다.

마르쿠스 키케로
만약 우리가 필요한 것만 한다면 우리는 노예이다.
그 이상의 것을 할 때 우리는 자유롭다.

유수연:
사람들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맞추고 적당히 즐기며 사는 것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게 있어 자유라는 것은 내가 정해놓은 일에 집중하고 그 나머지 기준이나 구속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의미한다.
굳이 남들의 눈치를 봐가며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해야 하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대치에 맞추느라 숨 막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유수연:
인정받는 사람, 노력하는 사람, 성공한 사람들을 이런 잣대로 함부로 평가하려들진 않는다.
내 존재감이 비록 이질감을 줄지는 몰라도. 적어도 일렬로 줄지어 서 있는 무리 안에 숨어 있지는 않는다.
그렇게 정해진 줄 과 열에 맞춰진 인형들처럼 전시되는 삶에는 자유가 없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 스스로 갇히려 하지 말자.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 일뿐이다.
나만의 색을, 나 다움을 그 적당히에 묻혀버리지 말아야 한다.

어느 나라나 여중생이 욕을 가장 많이 한다고 한다.
여중생이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치고 받으며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에서는,순수하게 서로 마음을 열고 반성하거나 순하고 착한 언어로만은 살아가기 힘들다.
독설이란 '솔직하고 싶지만 무시당할까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약하고 여린 단면을 보여주는 언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여중생들이 약자인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욕을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대학진학하는 학생들은 그 언어가 순화된다는 것이 좀 불편하다.
우리 성인들은, 그런 여학생들의 욕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냥 넘어가야 하는 것인가?
" 아.. 여학생들은, 약자니까 욕을 해서 강함을 보여져야 하니까 괜찮아. " 라고 넘어가야 하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 욕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않된다.
바꿔야 한다.
성인들은, 여중생들을(여성들을) 보호하고 여성들은 욕하는 것을 되도록이면 하지 말도록 변화를 시켜야 하는게 맞지 않을까?
어려운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미래의 자식들이 욕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넘어갈 것인가?
그 여중생들이 개개인의 딸들이라고 생각해보자!
과연, 그렇게 욕을하고 다녀도 되는지 말이다!
그리고, 성인들은 자신의 미래의 딸들을 생각하면서 여성 성범죄들을 저지르지 않도록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자!

유수연:
요즘 우리 사회는 너도나도 똑똑한 사람들의 궤변들, 입만 살아 떠들어대는 동네 천재들과 지나치게 범람하는 인터넷 지식으로 혼돈 그 자체이다.
인터넷을 뒤지면 엄청난 명언과 좋은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헛 똑똑이들이 너무 많다.
아는것만 많을 뿐이다.
그것을 그 이상으로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자신의 위치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를 자각하지 못하면 영원히 망상에만 빠져 있는 채 살아갈
것이다.
유수연:
나는 내 인생에 그런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기를 바란다.
이왕 살아갈 인생을 스스로에 대한 변명과 위로만 하다 지치기 싫다.
변명보다는 차라리 몸으로 증명하는 게 속 편하다.
우리는 모두가 힘들어 한다.
그 중에서도 백이면 백 모두 자신이 제일 힘들다고 칭얼거린다.
도대체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는 것인가?!
모두 힘들다 보니, 자신들을 토닥여줄 사람들만 찾을 뿐이다.
독설과 냉정하게 자신을 깨워줄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자신의 현 위치와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위안만 받으면서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지금 당장 자신의 위치에 마주하다록 하자!
유수연:
과거의 실수는 후회하는 시간조차도 아깝다.
실패한 것은 실패한 것이다. 어떤 변명을 해도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토 달지 말고 깨끗하게 인정하면 된다.
실수나 실패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고 좋은 경험을 했다고 스스로 변명하고 위로하며 미화시키는 것은 안쓰럽다.
과거의 실패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며 억지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전시키는 것이다.
내 인생의 모토의 하나가, 후회하지 말자는 것이다.
후회는 우리의 인생에서 사치일 뿐이다.
그런 모든것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이 될 수 있다.
인정하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다.

유수연:
나는 나름대로 내게 필요한 휴식을 충분히 취한다.
나에게는 머리를 쉬는 게 가장 중요한데, 에세이를 쓰다가 지치면 토익 책을 쓰고, 방송 원고를 쓰다가 지치면 강의를 하고 동영상을 찍고..
그렇게 돌아가면서 일한다. 에세이는 창의적인 머리를 필요로 하고 토익 책은 논리적인 머리를 필요로 하고 강의는 반복되는 단순 노동이니까 그런 식으로 일을 바꿔가며 하다 보면 휴식이 되고 항상 모든 일에 새로이 집중할 수 있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 박사도 휴식과 은퇴가 없다고 했다.
그만큼 치열하면서도 즐겁게 안정적으로 독서를 하고, 글을 썼다.
죽기 전까지도 열정적으로 글을 쓰다가 눈을 감았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 열정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열정을 어디에 쏟고 있는가?
시간을 허무하게 소비하지말자.
시간은 한정된 자원일 뿐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나중에 딴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비겁하다.
최선이란, 스스로가 판단할 것이 아니다.
자기 합리화로 치부를 해버린다면 그것은 최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재정의를 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중에 딴말을 하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 일 뿐이다.

20대에게는 처음부터 겸손이 없다.
겸손이라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인데 실제로 낮아서 낮출 것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 친구들에게 겸손의 허세보다는 예의 있는 적극성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젊음에게는 겸손보다는 자신감 있는 행동력이 더 어울린다.
20대. 난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20대를 지나오면서 뒤 돌아 보니 겸손할 필요가 없었다.
20대에는 자신감이 필요하고 그 자신감으로 나아가야 했다.
자신감이 싸가지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싸가지 없는 것과 자신감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행동해야 한다.
유수연:
상대는 솔직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전혀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필요가 없거나 내 일에 관련이 없어 모르는 것에 대해 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오지랖 넓게 모든 것을 잘해야 된다? 그런 걸 다 잘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는 어쩌고? 그럴 시간에 나는 내 분야에서 나의 희소성을 높이는 쪽에 더 치중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공부 -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독서를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이든 해라!
지금 당장!!

유수연:
물론 요즘 젊은것들은 싸가지가 없고 부족하고 묵관심하고 무능력하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항상 젊은이들은 싸가지가 없고 건방졌다.
무관심하고 싸가지 없는 건 전 역사상 모든 20대들의 특징이다.
우리 때는 안 그랬다고? 그건 당신네 생각이고, 바로 위 세대가 보면 당신 때도 그랬다.
문제는 위 기세대의 시각이 얼마나 넓으냐, 자신의 편협한 시선을 전달하지 않으려고 하느냐, 즉 포용력이 관건이다.
젊은것들의 싸가지는, 우리 모두 전체 세대를 포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젊은에는 나도 포함이 되어있다.
청년일 때에 우리는 스스로 잘난맛에 사는 것이 아닐까?!
유수연:
상황이 좋으면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내가 준비되어 있으면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때 잽싸게 달려들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다.
위기 의식은, 모두가 느끼고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태평하다.
우리는 모두 무뎌져 있다.
지금은, 위기이다. 아직도 술에 취해 잠에 취해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모른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항상 위기 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날카롭게 준비를 해 둔다.
우리는 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 모두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유수연:
현실에 충실히 노력하고 경쟁력을 높였는데 미래에 가서 방향을 잃었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현실에 해놓은 게 많은데 미래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미래가 불안한 건 현재 내게 능력도 돈도 경력도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나이만 먹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능력한 나에게 내일은 불안한 미래이지만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나에게 내일은 희망이다.
미래는, 누군가에는 두려움이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이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자신일 뿐이다.

유수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그 후의 문제이다.
(생략) 뭐든 일단 잘하고 나면 뭘 할 수 있는지는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기회들이 알아서 당신을 찾아갈 테니까.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가 더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자에게도 정말 재수가 좋아서 기회가 왔을 지라도 계속 앞으로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는 흙먼지 처럼 흩날려갈 뿐이다.
지금, 무엇을 준비 하고 있는가?!
유수연:
나는 그들에게 꿈을 가지라거나 긍정적으로 살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다.
나는 긍정이라는 단어가 싫은 게 아니라 노력도 없이 몸은 못 따라가면서 말만 앞선 사람들이 싫은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동참하는 것 같아 싫다.
유수연: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에게 희망이나 긍정은 또 다른 망상일 뿐이다.
유수연:
부지런한 자는 어떤 난관에서든 스스로 길을 내고, 게으른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앉는다. 어느 직종에 있든 당신이 배고픈 것은 스스로가 주저앉아 있기 때문이다.
의지와 노력이 빈곤한 사람은 어느 직종에 갖다 놔도 항상 그 인생이 빈곤할 수박에 없다.
본인이 깨어 있지 않으면 평생을 의지박약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일이 나에게 비전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백 명이 똑같은 일을 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오나?
이게 무슨 공장인가? 똑같은 대학, 똑같은 직업, 똑같은 회사, 똑같은 업종이라고 똑같은 월급을 받는 게 아니다. 똑같은 영어 강사도 월급이 각각이고 똑같은 회계사라는 직업을 가졌어도 월급은 천차만별이다.
왜 직업을 탓하는가?
일본전산을 읽어보라!!
그 안에 기본에 대한 중요한 모든 것들이 들어 있다!
유수연:
직업을 선택할 때는 현재의 시장성과 미래의 성장성, 자신의 잠재성과 경쟁자까지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연결시켜 고민해야 한다.
그 전에, 자신의 정체성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도 중요하다.
유수연:
회사를 뜻하는 단어'COMPANY'는 라틴어로 빵을 나눈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사람들의 삶의 결제적 기반이지, 무엇을 배우러 오는 학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회사라는 곳이 어떤 곳이라 생각하는가?
회사가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곳인가?
안타깝지만, 학교에서는 암기만 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들이 빚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두둔하는 의향은 없다.
다만, 서로가 그런 작은 것 부터 변화시키지 않으면 그런 악순환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유수연:
나는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싫어한다.
시장에 가서 물건 값을 깎으려고 실랑이하는 것도 이해 못한다.
그게 꼭 나쁘다고 할 수 는 없지만, 나라면 그렇게 실랑이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해서 더 많은 돈을 벌겠다. 내 논리는 간단하다.
아쉬운 게 있으면 맞추든가 낮추든가, 그게 싫으면 확 올라가버리든가, 괜히 감정을 소비하며 실랑이를 벌이는 시간이 더 아깝다.
사람이 바라보는 관점과 생각 사고는 모두 다르다.
물건 값을 흥정을 하는 것도 있지만, 무조건 흥정만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시장에 가서 그렇게 가격을 흥정하고 하면서 서로가 정이라는 것을 나눈것이기도 하다. 그 커뮤니케이션에서 서비스라는 것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있는대로 말하기도 귀찮고, 감정을 소모하기도 싫다면 그것은 기계에 불과하지 않을까?
사람은, 감정을 표출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기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마, 다른 이들도 우리 모두 개개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해관계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모두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입장차이라는 것이다.
청년들에게만 잘못했다고 할 것이 아니다.
그 윗세대에서의 되물림이 되어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무조건 청년들에게만 잘못했다는 식의 반응은 옳지 않다.
비겁하지 않은가?
마치, 자신은 깨끗한 것처럼..
너무 안타깝다.
의식을 깨우기 위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이상 욕먹지 말자!
청년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