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저 | 역사비평사 | 2000년 07월

 

 

 

 

 

  

광해군은,

   폐주& 폭군 혹은 외교정책과 백성들을 사랑했던 왕 인가?

 

1623년 인조반정을 만나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 명분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것. " . " 명의 은혜를 배반 한 것." 등이었다.

 

과연 그랬을까?
역사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들과 모략과 왜곡, 음모가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때 정황을 직접 목격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라는 것은 분명 어느 입장에서 기록이 남겨 졌느냐에 따라서 분명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래 동화처럼 전해져 오는 것이고 기록이라는 것도 수정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아무리 정교 하다 할 지라도.. 100%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조정이라는 곳, 우리 현재 정치세계처럼.. 무언가 서로를 감시하고 없는 것도 만들려 하는 세력들이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100% 신뢰하지 않는다.
어느정도의 의문과 의심을 두고 봐고 듣고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알아보려 했다.

왜!?
광해군은 폭군으로 폐주가 되어 몰락했는가?!
그리고 패륜아라는 오명-(?) 씌우게 되었을까?!


우선, 광해군에 대해서 아는것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광해군과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닐거라 생각한다.

 

진실은, 역사 속에 그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만 보고 판단하는거라 생각든다.
말 한마디에 '아'다르고 '어'다르듯이 누가 어떻게 어떠한 관점으로 기준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하지만, 분명한 것은 100명의 신하들이 있었다면 그 100명의 신하들 모두가 광해군에게서 돌아섰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광해군이 폐주,폭군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부분들은 내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려 한다.
물론 그 분석은 한정된 부분이니 그 점은 유념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난 전문가가 아니고 내가 바라보는 광해를 정리하고 싶을 뿐인 것이다.

인조반정 - 반정이란, 발난세반제정 이라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 구절에서 나온말이며,
올바른 상태로 복귀를 뜻하는 것이다.

 

 


지지받는 광해

우선, 처음 관해군이 세자에 착봉되고 했던 기록들을 보면 광해는 어릴 때 부터 아주 총명하고 학문에 전념했던것으로 전해져 왔다.
그리고 역사의 기록에서는 세자 광해는 호평과 긍정적이다.
그가 즐겨 읽었던 종류의 서적들은 역사서들이었다.
역사들을 통해서 앞시대의 사실이나 고사 등을 인용하면서 아주 해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임지왜란이 일어나고, 인조는 야비하게도 한 나라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도주 하였다.
그리고서는, 나름의 한 나라의 왕이랍시고는 자신의 신임하던 세자인 광해를 왕세자임을 분명하게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에게는 인사권과 상벌권을 넘기기까지 했다.
'분조'를 이행 하였다.
분조란,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광해는, 임시 정부였던 셈이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아버지이자, 한 나라의 왕으로써 그가 택했던 선택이 과연 그 것뿐이었을까?!
굳이 그렇게 까지 했어야 했을까?

여기서 나는, 광해가 폭군이라는 오명을 썼을수 도 진짜일 수도 있겠지만..
선조는 정말 야비했던 아버지 이자, 왕으로 그를 몰락 시켰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권력의 맛이 얼마나 달콤 했던지 그 권력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그렇게까지 해서 권력을 움켜 지려 했던 걸까?
그래서 광해보다는 선조가 더 비겁한 왕으로 각인되어버렸다.

임지왜란이 일어나면서 분조를 하게 됨으로써, 광해는 전방에서 왜군을 무찌르면서 그의 명성은 백성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치켜세워지기까지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다른 왕자들의 거처들은 모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백성들이.
단, 광해의 집만은 무사했다고 하니 이러한 경우를 보아도 그때까지만 해도 칭송받는 세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기서 부터 시작된 것 같다.
모든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나갈쯔음, 광해는 아버지 선조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눈치를 불과 13년 정도 이어졌다고 한다.

그 13년동안 눈치를 보느라, 그의 성격이 우유부단해 졌다는 설도 있다.

명나라에서는 광해를 세자책봉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에 대한 명분은 단순했다.
그가 둘째라는 이유와 첩의 자식이라는 명분이었다.
다른 이유로서는 명 황제가 아직 황태자를 세우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을 집었다.

여기서 나는 다르게 생각든다.
아니, 물론 그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겠지만, 임진왜란 때 광해의 활약 때문에 광해가 두려웠기에 미리 손을 쓰려 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조선과 광해군을 흔들어 길들이려는 측면도 있었다는 예측이다.
애초에 조선의 구원 요청을 못 들은 척 한다.
갈수록 조선은 곤경에 빠지고 그럴수록 명에 대한 구원 요청은 절박해진다.
막판에 허우적거리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할 때 비로소 군대를 보낸다. 그런 상황에서의 명나라 원군은 그야말로 구세주로 대접받게 된다.

광해군은 둘재이자 첩의 자식이므로 애초부터 승인 할 수 없다는 '원칙'을 제시한다.
조선 조정은 몸이 달아버린다.
계속 사신을 보내 승이해 달라고 호소한다.
명은 계속 거부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못 이기는 척' 광해군을 승인해 준다.
"명나라는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승인해 주었다!" 그것보다 더한 은계가 어디 있는가? "

이런 예측도 있다는 것이다.

 

선조는 결국 숨을 거둔다.
유서의 내용은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말라. 는 것만 두고
광해를 왕으로 임명하고 죽는다.
인목대비는 광해를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자신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자신이 최고의 어른임에도 그 이유는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은 애기일 뿐이었으므로 말이다.

이귀와 정인홍은 선조 말년 이래 앙숙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인홍이 유배에 있을 때 광해에게 풀어달라고 상소를 올렸는데..

그런 앙숙이 왜 풀어달라고 상소를 올렸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앙숙이라 하면, 대부분 서로 먼저 죽이려 하는것이 관례라면 관례였던 것인데 말이다.

 

 


몰락하는 광해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서, 광해는 몰락해 간다.
우선, 광해는 건축업에 빠져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건축을 계속 해왔다.
그덕분에 궁이 많이 생겨나고 건축업에서는 발전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반면에는 백성들의 허리는 더욱 휘었으며 밥 한끼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들이, 그리고 정치 세력들의 의도로 인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몰락해 갔다.

 

 

광해의 외교정책

왜군과 명나라 후금의 싸움.그런 상황에서도 광해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외교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때로는 명나라를, 때로는 후금을 지지하는 중심에 서 있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아마, 그런 상황에서 광해는 잘 선택 했던 것같다.
광해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에 관한 각 나라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거에 맞게
그 시기에 맞게 대응을 잘 했다고 한다.

아니, 잘 한것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말이다.
이후, 인조가 왕위로 등극한 후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지 않았는가!
결국, 그런 무능하고 야비한 아버지와 광해를 몰아내고 왕위로 등극한 인조역시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왕.
즉, 꼭두각시에 불과한 왕일 뿐이었다.


광해와 사람들

몰락 했을 당시 인조반정을 일으키고자 했던 사람들에 '유몽인'이라는 사람이 반대의사를

표하고자 노래를 지은 것이 있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안방을 지키며 홀로 산다네
여사의 시구도 익히 읽었고
임사의 가르침도 자못 아는데
이웃에선 다시 시집가라 권하네
남자의 얼굴이 꽃과 같다나
백발에 화장을 하다니
정녕 바른 분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 시로 인하여 '유몽인'은 결국 '반혁명 행위자'로 낙인 찍혀 그들에게 눈밖에 나 결국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모든 이들이 등을 돌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몽인은 광해군이 주름잡던 시절에 광해군에게 특별히 총애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한다.
이러한 점을 보면, 유몽인의 생각과 행동에서 광해군은 무조건적으로 폭군이 아니었다는 뜻으로 해석이 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짧막한 정리를 했다.


물론 더 많은 방대한(?) 역사 기록들과 견해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다.

마지막 내 생각을 짧게 정리하자면,
광해는 폭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광해는, 분명 어진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대를 잘못만나는것이 죄라면 죄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아버지의 눈치를 보게 되고, 후금과 명나라의 싸움으로 나라는 점점 흉흉해져가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줄 수 밖에 없었고, 광해를 도우려는 신하들 보다는 오히려 적들이 포진되었던 점.
그런 부분들이 광해를 심리적으로 옥죄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아쉬운 점은 건축업에 집착 했다는 것이다.
아마 나라가 조금만 그나마 전쟁이 없었더라면 광해도 정조처럼 수원산성을 건출 할 때 백성들에게 일당을 준 것처 운영을 했다면
상황은 분명하게 달라 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기를 잘 못만난 광해는 그럴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왕으로써 백성을 사랑했다는 점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100이면 100 모두를 끌어 안을 수는 없었다는 점.
아마, 세종대왕 때에도 그랬을 것이다.
다만, 그나마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다른 왕들보다는 더욱 나았기 때문에 돋보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무튼 한가지 사물을 똑같이 보아도 모두 각기 다른 생각들을 하는 것 처럼..
다 다른 의견이 있을 것이다.

다른 책을 보면, 광해는 폭군으로 무섭게 묘사 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사의 기록은 만들어 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는것은, 단편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한 것 사실, 그때 당시만해도 전쟁에 납세에 찌들어 있던 백성들은 그 하나만으로도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편한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실시함으로써 그나마 말이다..그나마...


광해는 외로웠을 것이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위고 눈치를 보고 혼자라는 생각을 더 들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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