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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어보진 못 했지만 『달의 제단』이라는 책으로 심윤경 작가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주로 가는 서점 사이트에서 심윤경 작가님의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책 표지가 유독 눈에 띄고 마음에 남았다. 드디어 만나게 된 『설이』.
처음엔 그저 '표지가 참 아름답다..'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네가 설이고, 또 너는 아코구나."라며 그들을 알아봐 주게 되었다.
책 표지 안쪽에 적힌 작가 소개를 읽고 알게 된 내용으로, 이 책은 심윤경 작가님의 두 번째 성장소설이라고 한다.
성장소설. 이 단어를 마주했을 땐, 왠지 나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 읽어야 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아주 잠시 스쳤으나 책의 내용과 책 뒷부분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난 지금은 심윤경 작가님의 첫 번째 성장소설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보통 책을 읽으면 좋았던 문장들은 가급적 모두 적어 두려고 애쓰는데, 이 책처럼 감정의 묘사가 좋은 경우에는 어떤 한 문장이 아니라 그 한 장면이 너무 좋아서 옮겨 적어야 할 내용이 많아진다. (적고 보니 엄청 많다.)
작가님께서 『설이』에 좋은 장면들을 너무 많이 담아 두셔서 읽는 내내 빠져들어 훅 읽었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경험하였던 어떤 일들로 인해 상처를 받고, 그것이 상처가 되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기도 하고, 알지만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것들이 내 안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고 또 그 안에서 쑥쑥 자라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으로 내 안에서 튀어나오곤 한다.
내가 그런 모습을 갖고 있는 것도 속상하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도 속상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마주할 때면 가장 먼저 '내 안에 또는 그 사람들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상처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하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고 잘 고쳐지지 않는 모습이지 싶다.
설이도, 보육원 원장님도, 곽은태 선생님도, 시헌이도.. 우린 그렇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서로가 얽히고설켜 살아가느라 참으로 힘이 든다. 또 내가 갖고 있는 문제들을 마주하는 그 순간이 버겁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더라도 용감하게 마주하며 내 모습을 살펴주고 토닥여주는 것.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래야 한뼘이라도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책의 후반부에 설이 이모가 설이에게 쓴 편지 내용과, 설이가 곽은태 선생님께 날카롭게 뱉어내는 말들에 곽은태 선생님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깨닫고 주저앉아 가슴이 터져라 우는 장면에 코끝이 찡하고 마음이 아팠다.
왜 우린 지나고 나서.. 그것도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 깨닫게 될까?
그렇게 힘들게 깨닫고 나서도 왜 우린 우리의 다짐처럼 쉽게 바뀌지 않을까?
곽은태 선생님은 시현이에게 어떤 아빠가 되어 있을까? 본인이 받았던 어린 시절의 상처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이제는 시현이가 원하는 삶은 지지해주는 아빠가 되어 있을까? 평소 그가 환자들에게 말했었던 그 모습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삶을 살고 있을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마음으로 그들의 삶을 응원한다.
눈발이 흩날리는 새해 첫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꺼낸 아이에게 원장님은 '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p 31)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부모의 부재 속에 살아야만 했고 그것은 언제나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킬 듯한 검은 안개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안으로 달려들어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야 할지, 아니면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새들은 동서남북을 가늠하는 나침반을 머릿속에 달고 태어난다고 하던데, 나는 시초부터 그 나침반이 고장 난 셈이었다. (p53)
공원에서 아이에게 목말을 태워주는 아빠들을 보면 언제나 곽은태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 어깨 위는 흔들림이라곤 찾을 수없이 너르고 편안할 거라고 생각했다. (p58)
이모를 어떻게 해야 학교 엄마들처럼 만들 수 있을까? 흰머리가 비죽비죽한 곱슬머리를 다듬고, 광택이 감도는 화장을 하고, 비싼 옷을 입히고?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이모의 모습을 바꾸어 보다가 곧 포기했다. 물통 기름통 어디에 넣었다 꺼내도 이모에게 윤기를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p67)
푸석푸석하고 부숭부숭한 이모의 손바닥이 내가 아는 인간의 감촉이었다. 이모가 아니었다면 나는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호칭들 속에 따뜻함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기운이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p78)
언제나 곰처럼 커다랗고 유쾌한 곽은태 선생님이 그렇게 비통한 얼굴로 무릎을 꿇은 모습은 우리가 결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우리는 어딘가에 몹시 아름다운 세상, 극히 고결한 사람들이 존재할 거라고 상상하고 그 세계를 몹시 소중히 여겼는데, 그 상상 속 인물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바로 곽은태 선생님이었다 (p144)
중학 진학을 앞두고 학원마다 아우성이었다. 우리는 각자 입맛에 맞는 쪽으로 미치는 길을 택했다. 나는 새로운 삶 속에서 살아남는 투쟁에 미쳤고 곽은태 선생님은 시현에게 미쳤고 시현 엄마는 와이파이에 미쳤다. 원래부터 미쳐 있었던 시현이 그나마 제일 정상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시현이는 제각각 미쳐 어쩔 줄 모르는 우리를 차갑게 비웃었다. (p167)
사람들이 나에게 화를 내지만, 그 이유가 실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다. 그걸 알고 나서 내 마음에 끼었던 먹구름이 깨끗이 사라졌다. 지금 누군가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면 고맙겠다. 그들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까지 알게 된다면, 상처는 나을 것이다. (p172)
동백리에 찾아가서 아코를 만날 것이다. 만나서 어쩌겠다는 계획은 없다. 그냥 찾아가서 보기만 하면 된다. 이모 말처럼 아코가 넓은 뜰에서 뛰놀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그걸로 좋다. 혹시 나를 원망했을지도 모르는데, 아코에게 내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고 꼭 말해주고 돌아설 것이다. (p185)
원장님은 늘 무엇을 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내가 말한 대로 했니?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들이 어린 너에게 너무 힘들었겠지. 놀랍게도 그분은 수많은 아이를 돌보는 원장님이셨는데도 어린아이들의 굳어진 어깨나 작은 한숨들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거의 없으셨어. (p197)
"와줘서 고맙다, 설아."
나를 껴안아주는 그 품은, 예전처럼 넓고 든든했다.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그간 울지 못했다. 아코가 떠나고, 원장님이 떠나고, 내 전설적인 출생의 신화가 떠나고,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내 곁을 떠났는데 한 번도 울지 못했다. 머리와 가슴이 모래로 채워진 인형처럼 무겁고 버석버석한 느낌뿐, 다 귀찮고 지겨워 울지도 못했다. (p221)
시현이도 못된 아이지만 나도 못지않다. 내 안에는 태어나자마자부터 방울방울 쌓인 억울함의 휘발유가 가득하고 그것엔 쉽사리 불이 붙어 폭발한다. (p223)
"하지만,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겠지만, 너에게 솔직히 말할게. 바보 같은 사람은,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 줄도 모른단다. 그게 거짓말인 줄 몰라서 더욱 자신 있게 큰 소리로 말하는 거야.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줄도 모르는, 목소리만 커다란 바보였어." (p224)
"우리 아버지... 술만 마셨던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춤을 잘 추셨어. 춤추는 데 정신 팔려서 가정도 인생도 다 망친 그 양반을 시현이가 닮은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어."
춤을 잘 추는 아버지와 춤을 잘 추는 시현이 사이에서 곽은태 선생님은 미움의 덫에 걸렸다. (p226)
내가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일 때 오히려 더 숨 쉬기 힘들 만큼 꽉 안아주는 것이, 그것만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이모는 잘 알고 있었다. 놀라거나 성깔이 치밀면 깔딱깔딱 숨이 넘어가던 나를 이모는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되살려냈다. 자기 아이를 길러본 적 없는 이모가 그런 것들을 혼자 깨우쳤다는 것이 나에게는 신비하게까지 느껴졌다. 자기 아이들을 낳아 키운 앤더슨 부인도 시현 엄마도 그런 것은 전혀 몰랐다. (p234)
그러고 보면 나는 이모에게서 한 번도 뭐를 해라, 하지 마라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모는 내가 뭘 하는지도 잘 몰랐고, 내가 하는 일이면 다 좋은 거려니 생각했다. 이모가 내 친부모가 아니라서 사랑과 관심이 부족해서 그랬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이모가 나에게 퍼부어준 그 많은 미소, 언제나 든든하게 안아준 팔뚝, 내가 아플 때마다 곁에서 하얗게 새운 많은 밤들, 그리고 내가 입양과 파양을 거듭하며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돌아올 때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내가 돌아온 그곳에 있어주었던 긴 세월. 친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이모가 나에게 준 것이 그보다 하찮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p241)
하지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폭발적인 눈물은 원장님과 나 사이에 사랑과 감사가 겨우 한 주먹은 아니었다고 소리 없이 속삭였다.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웠다. 사랑과 감사가, 욕심과 미움이 각각 얼마큼인지 따지는 건 의미 없다고, 하나하나 발라내서 확인하려면 어쩌면 내 인생을 다 털어 쓰고도 모자랄 만큼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눈물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p257)
나는 나도 모르게 의미 없는 덧셈과 뺄셈을 무한히 반복하곤 했다. 나에게 부모가 있었다면. 나에게 곽은태 선생님처럼 훌륭한 부모가 있었다면. 나에게 기부금이 없었다면. 나에게 그 음식물 쓰레기통이 없었다면. 가능하지도 않은 덧셈뺄셈에 병자처럼 집착해, 날마다 셈이 달랐다. 어떤 날은 부모가 없으니 다른 건 하나도 밑질 수 없다고 발악했다. 셈이 남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날은 크게 밑지고 어떤 날은 적게 밑졌다. (p260)
그런데 그런 바보같은 이모가 가끔씩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바로 이럴 때,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일의 숨은 이유들을 찾아낼 때, 나는 이 사람이 그 바보 같은 김은숙 씨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p261)
치즈와 계란이 얹힌 짜장라면을 흡입하던 시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는 자기 얼굴이 평소와 어떻게 다른지 모를 것이다. 자기 자신은 모르는 일을 남들이 더 먼저 알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p262)
하지만 이모는 곽은태 선생님 부부에게 선생님이 되어줄 자격이 충분하다. 이모가 나에게 베풀어준 한결같은 사랑은 대부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겸손함을 내포한 그 따뜻함은 그 자체로 존귀하고 드높아, 언제나 은은한 윤기를 내뿜었다. 전학 가던 첫날 나에게 충격을 주었던 귀부인들의 그 은은한 윤기와 마찬가지로, 내뿜는 당사자는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심지어 무심하기까지 하지만, 그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따라 하려 애써도 잘 되지 않는 아주 이상하고 미묘한 어떤 것이다. (p263)
곽은태 선생님의 반석 같은 어깨 위에서 엉덩이춤을 추며 자랐을 시현을 한없이 부러워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의 어깨 위도 알고 보니 멀미 나게 흔들리는 곳이었다.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다.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