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장 섬진강 기슭에서

 기적을 울리며 멈춘 종착역, 쏟아져나온 사람들 속에 송관수의 유해를 안은 영광과 영선네도 잇었다. 그들은 진주 시내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후주레한 짚베 치마 저고리를 입고 흰 댕기를 감은 쪽에 나무비녀를 찌른 영선네는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없이 아들 등뒤 숨듯 걷는다. 얼마 만에 찾아오는가. 그러나 영광에게 진주는 낯선 고장이었다. 남의 땅, 하염없이 송화강 강가에 안장 있곤했던 기림보다 멀고 스스러워지는 진주, 참으로 얼마 만인가. 저녁노을에 잠긴 남강은 아름다웠다. 둥지를 찾아가는지 무리지어 우짖으며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남강 다리 위에서 영광은 과연 저 강물에서 어릴 적에 개구리헤엄을 치며 놀았는지 의심스러웠다. 초석루와 이헤미 바위를 오가던 기억, 일렁이는 강가 대숲에 과연 어린 날의 꿈이 실려 있는가 의심스러웠다. 그런 심정은 영선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니 그는 더더욱 가슴이 메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 고향이 없는 것과도 같았다. 그것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틀 자리가 없었다는 뜻도 된다.
 시내로 들어온 영광은 사람들에게 물어서 남강여관을 찾아갔다. 거리엔 더러 전등불이 나돋은 그런 시각이었다. 여관 입구에는 조그마한 사무실 같은 것이 있었다. 오십 세 안팎으로 뵈는 사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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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읽고 있다가 얼굴을 들었다. 유해를 안은 영광은 보는 순간 사내 얼굴에는 눈에 띄게 경련이 일었다. 그는 다름아닌 장연학이었다. 오 년 전에 연학은 최씨집을 떠나 독립을 했다. 그리고 여관업을 시작한 것이다. 외견상 그는 최씨네와 소원해진 듯 보였지만 그들의 밀접하고 은밀한 유대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미 연학은 영광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서울서 전갈을 받았던 것이다. 영광이 역시 서울역에서 잠시 동안 환국을 만났고 남강여관을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시선을 멀리 둔 연학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주서 왔제?”
 “네.”
 “항구야! 항구야!”
 소년이 뛰어왔다.
 “칠호실로 손님 안내해라.”
 그러고는 연학이 문이라도 닫아버린 듯 신문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안내된 방은 깨끗했고 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영광은 상 위에 유해를 내려놓고 윗도리를 벗어 벽에 건 뒤 슬그머니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두 손을 깍지끼고 방바닥을 내려다본다. 영선네는 보따리를 끄르고 수건을 꺼내어 비로소 땀을 닦는다.
 “고단하시지요.”
 방바닥을 내려다본 채 영광이 말했다.
 “아니다.”
 그러고는 모자간의 대화는 끊겼다. 옆방에는 손님이 들지 않았는지 사람의 기척이 없고 소년이 켜주고 간 전등 주변을 하루살이가 날고 있었다.
 영선네도 그랬지만 영광이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양볼이 홀쪽해졌고 눈동자는 빛을 잃고 있었다. 보름 가까이 이들은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다. 이제는 슬픔과 고통에도 지쳐버린 상태였다. 홍이가 동분서주, 모든 일을 처리해주었으나 호열자로 사망했기 때문에 관수의 시신이 화장터에 가는 데 시간이 걸렸고 사림 정리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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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간이 걸렸다. 반넋이 나간 영선네는 울지도 못했고 아무 일도 못했다. 웃보따리를 샀다간 풀고 쌌다간 풀고, 결국 영광이 자신을 타이르고 다스려가며 영구와 함께 짐을 챙겼다. 그리고 영구를 남겨둔 채 신경을 떠났던 것이다. 영선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일이란 신경역에서 꼬깃꼬깃 접은 십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아가, 상의야 공부 잘해라.”
하면서 전송나온 상의 손에 쥐여준 그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영선네는 눈물을 흘리고 울었다.
 “좀 누워보시지요.”
 영광이 말했다.
 “아니다. 괜찮다!”
 다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저녁상이 들어왔다. 여름인데 미역국이 놓인 밥상이었다.
 “산에까지 갈려면 많이 걸어야 하는데 밥 좀 들어보세요.”
 “나는 괜찮다.”
 영광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영선네 앞에 놓아준다.
 “자아 어머니.”
 영선네는 영광이 말아준 밥을 다 먹었다. 영광이도 오래간만에 밥그릇을 비웠다. 상을 물리고 또다시 모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연학이 향로와 향을 들고 들어왔다. 유해 앞에 향을 피워놓고 연학은 엎드렸다.
 “형님 이런 형상하고 돌아올라고 갔십디까.”
 현학은 흐느꼈다. 영선네와 영광은 놀라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형님! 용서하이소. 너무 억울합니다. 왜 그렇게 가야 했십니까.”
 연학은 한참 동안 흐느꼈다. 눈물을 닦고 연학은 영선네에게 절을 했고 상주인 영광에게도 절을 했다. 그의 눈에는 또 눈물이 흘렀다.
 “고생 많이 하셨지요.”
 연학이 영선네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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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닙니다.”
 영선네는 당황하고 낯설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지가 다 압니다. 옛날에 진주 기실 때 한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영광이가 조맨할 때.”
 영선네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는 뜻인 모양이다. 영광은 방바닥에 두 손을 짚으며
 “고맙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인다.
 “그런 말 마라. 그라믄 내가 부끄러버서 우짜노.”
 “아닙니다. 아버지가.”
 하다 말고 목이 메는지 말을 끝맺지 못한다.
 “우리는 살아 있고, 그래 우리는 살아 있는데, 젤 고생 많이 한 형님이 먼저 갔으니 원통하고 억울하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살아있으니 죄인 아니가.”
 연학은 길상이 한 것과 꼭 같음 말을 했다.
 “사람이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병으로 그리 됐는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모를 기구마. 우리들 맴을 모를 기다.”
 부지런하고 지혜로우며 온갖 뒤처리를 도맡아 해온 연학이. 냉정하고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것으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는데 그 둑이 터진 듯 주체하질 못한다. 그러한 자신을 추스르듯
 “하여간에 이야기는 두었다 하기로 하고 내일 아침 일찍이 출발해야 할 기다.”
 “차편은 어떻게 됩니까.”
 “자동차로 하동까지 가서, 거기서 나룻배를 타믄 된다. 그라고 화개에 가믄은 아마 사람이 나와 있을 성싶다. 사람을 못 만날 경우를 생각해서 일러두는데 찾아갈 곳은 도솔암이다. 알겄제?”
 “네.”
 “기별이 갔이니께 통영 사는 사우하고 딸도 하마 내일 저녁때쯤 당도할 상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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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이라는 말에 영선네는 움찔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주뼛거리다만다.
 “그라믄 내일 생각을 해서 일찍이 주무시이소.”
 연학은 영선네에게 말하고 나갔다.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모자는 계속 잠만 잤다. 늪에 가라앉듯, 덮쳐오는 수마였다. 극도에 이른 신경들이 일시에 와해되어 기능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꿈도 없는 먹빛과도 같은 잠이었다. 그러나 여관방에서 불을 끄고 드러누웠지만 모자는 다같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괴롭고 긴 밤이었다. 막상 깨어 이쓴데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간에 일어났던 일이 모두 꿈만 같았다. 현실 같지가 않았다.
 “어머니 주무십니까.”
 “아니다.”
 “어미.”
 “……”
 “지를 용서 안 하시지요.”
 “그런 말을 와 하노.”
 새벽녘에 살풋 잠이 들었다가 모자는 놀라서 일어났고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연학은 조그마한 사무실 같은 곳에 앉아서 어제 들어올 때와 같이 여관의 주인으로서 손님 대하듯, 여관비도 받았고 떠나는 모자 뒷모습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그들 모습이 사라진 뒤 연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동까지 간 모자는 연학이 말한 대로 나룻배를 탔다. 이들에게는 초행인 고장이며 처음 보는 산천이었다. 강물을 거슬러 나룻배는 상류를 향해서 간다. 구성진 뱃사공의 노래를 들으며 장돌뱅이들의 수군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술집 작부인 듯, 머리를 지지고 눈썹을 그린 젊은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들으며, 강은 유장했다. 잔물결이 햇빛에 부서지며 희번덕거렸다. 뱃전에 부딪쳐오는 물살, 영광은 갑자기 아버지가 이 강을 얼마나 많이 오르내렸을까 하고 생각했다. 동학란에 죽었다는 친할아버지는 또 얼마나 이 나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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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탔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유해를 안고서 왜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목이 뿌러져 죽을 놈이 내 신세를 요모양 요꼴로 만들었지. 술집에 나를 팔아묵고 그러고는 종무소식이라. 어디서 뒤졌다는 소분도 없는 거를 보믄 살아 있기는 한 모양인데, 어찌 내가 꿈엔들 그놈을 잊겠나.”
 방금 간드러지게 웃던 작부풍의 여자는 제 또래의 여자를 상대로 신세타령이었다.
 “소나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라. 늙고 젊고 할 것 없이…… 계집은 한번 허방에 발 디디놓으믄 그것으로 끝장이고 무신 희망이 있노. 빚만 없이믄 만주 가서 돈이라도 벌겠는데.”
 어느덧 배는 화개에 닿았다. 영광은 보따리를 든 영선네를 한손으로 부축하며 배에서 내렸다. 내렸는데 그들 앞에 다가선 사람은 강쇠였다.
 “아저씨!”
 “운냐. 온다고 욕봤제. 아지매 오래간만이오.”
 강쇠는 유해를 외면하며 덤덤히 말했다.
 영광이 아저씨라 한 것도 강쇠가 아지매라 한 것도 다 틀린 호칭이다. 사돈지간에 그러는 법이 없는데 이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아짐시, 아저씨 하다가 이들이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 십 년 넘게, 사돈으로서 어디 상면 한번 했던가. 산놈한테 맡긴다 하며 관수가 딸을 데리고 가는 것을 영선네는 보았을 뿐, 그것이 마지막이었고 영광은 훨씬 훗날에 영선이 시집갔다는 얘기를 뉘한테서 들었는지, 그나마 기억이 희미했다.
 “아짐씨 보따리 이리 주이소.”
 강쇠는 영선네한테서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이번에는 아지매가 아니고 아짐씨라 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강쇠 마음속에서는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 친구, 오랜 동지, 생사를 같이 한 쌍두마차였고 분신이었던 김강쇠와 송관수, 장연학이 유해 앞에서 흐느껴 울었지만 강쇠의 슬픔, 충격에 비할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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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따라오니라.”
 영광에게 말하고 강쇠는 앞장서서 간다.
 나루터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은 다름아닌 민지연이었다. 삼베였지만 깨끗한 고의적삼에 흰 모시 조끼까지 입고 대님을 쳤으며 검정고무신을 신은 강쇠의 모습, 후주레한 짚베 치마저고리에 나무비녀를 꽂은 영선네, 그리고 유해를 안은 영광이, 누가보아도 객사한 사람의 유골을 절로 모시고 가는구나 하고 짐작했을 것이지만 지연의 짐작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유해를 안은 도시풍의 잘생긴 남자가 맘에 걸렸다. 왜 강쇠가 일상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객사한 사람일 거라는 짐작이 지연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뭐 하나 확실히 잡히는 것은 없었지만 무엇인지 모르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의혹의 짙은 안개가 그의 심장을 죄는 것이다. 
 사십을 겨우 넘긴 지연은 아직 지리산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떠나지 않아다기보다 아주 붙박아 살고 있었다. 머리만 깎지 않았다뿐이지 그는 중옷 차림이었고 은젓가락같이 가는 손에 염주를 들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 여름 햇볕에 그을리기는 했으나 야들야들하고 아리송하고 권태스러움이 감도는 얼굴에 구심점과도 같은 붉은 입술, 신기하게도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것 같지가 않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도 비단실같이 부드러운 게 옛날 그대로였다.
 어느덧 나룻배는 상류를 향해 떠나고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하늘에 까마귀떼가 날고 있었다.
 “소사야 가자.”
 소사 역시 중옷 차림이었다. 읍내에 나가 장을 보아온 소사는 짐꾸러미를 들고 말없이 지연을 따랐다. 지연은 나루터에서 소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소사를 기다렸다기보다 할 일이 없이도 지연은 나루터에 곧잘 나와 있곤 했다.
 여러 해전에, 지연이 간청하여 친정에서 암자를 하나 지어주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랬던 것이 친정 부모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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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는지 모른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산에 있느니 차라리 형식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세상을 버리고 산에 있는 편이 낫다 생각했을 것이다. 외사촌 오라비 소지감이 있는 곳이니 마음을 놓고 암자를 지어주었을 것이다.
 “소사야 오늘이 며칠이냐?”
 산길을 오르며 물었다.
 “글쎄요. 양력으로 스무엿샛날인지 이레인지요.”
 “좀 있으면 여름도 가겠구나.”
 “가지요.”
 “너도 가고 싶지?”
 “지금 가서 뭣하겠습니까. 이제는 아씨가 가라 하셔도 갈 곳이 없습니다.”
 “너만 그러냐? 나도 이 산말고 있을 곳이 없다.”
 “그것은 아씨가 청하신 일 아니었습니까?”
 “그래. 너는 안 그렇다 그 말이지?”
 “저야 뭐 아씨 분부에 따랐을 뿐이지요.”
 “원망하는구나.”
 “원망 같은 것 없습니다.”
 나이 훨씬 젊은 소사가 지연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손은 거칠었고 살갗은 꺼실꺼실했다. 삼십을 갓 넘긴 그는 본시 민씨집 내림종의 딸이었으니 갈곳이 없다 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주종간에 주거니 받거니, 오늘 처음 해본 말도 아니었다. 단순한 산중 생활 속에서 별 지겨움 없이 되풀이되어온 얘기의 내용이었다. 
 “소사야.”
 “예.”
 “아까 그 사람들 말이다.”
 “누구 말씀입니까.”
 “나루터에서 너랑 함께 내린 사람들 말이야.”
 “아아 예, 유골 가지고 온 사람들 말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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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김장사말고는 낯선 사람이데요.”
 “그렇지? 못 본 사람들이지? 어디서 왔을까.”
 지연은 갑자기 흥분했다.
 “이 근동 사람이겠지요. 영가를 천도하는 법사 때문에 절에 오는 길 아니겠어요?”
 절 변두리에 살다보니 소사도 들은 풍월이 있어 제법 유식하게 말했고 나이 탓인지 말주변도 늘었으며 상전을 어려워하는 기색도 준 것 같았다.
 “아니다. 그렇지가 않아. 근동 사람이면 어째 유골을 안고 오니?”
 “객사했으면 그렇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게 뭐 이상해서 그러세요?”
 “객사를 해도 그렇지. 아주 먼 곳이 아니면 시신을 옮겨왔을 거구.”
 “이 한여름에요?”
 지연은 소사를 상대해서 말한다기보다 생각을 더듬고 생각을 꿰어맞추어 어떤 사실에 접근해보려고 열중해 있었다.
 “젊은 남자 보았지?”
 “예.”
 지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보이든?”
 “잘생겼대요. 그리고 다리가 좀 성찮은 것 같구요.”
 “그게 아니야, 도시 사람, 그것도 아주 큰 도시에 살았을 것 같애.”
 “말씀을 듣고 보니 근동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데 김장사가 왜 마중을 나왔을까?”
 “아씨도 참, 남의 일에 뭘 그리 깊이 생각하세요?”
 “김장사가 마중나온 걸 보면 도솔암으로 갔을 거야.”
 지연의 눈이 반짝였다.
 “만주서 왔을까? 왔을지도! 그래 그게 틀림없을……”
 말끝을 맺지 못하고 양 어깨가 축 늘어진다.
 “아씨 어서 가세요. 짐이 무거워 죽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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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가자.”
 지연은 가끔 일진이 만주로 갔을 거란 말을 해왔다. 만주로 찾아가겠다는 말도 했었다. 소사는 걸음을 빨리한다. 일진에 관한 얘기라면 참을성 있는 소사도 이제 넌더리가 났던 것이다.
 암자에 돌아온 지연은 해가 깜박 넘어갈 때까지 꼼짝없이 소나무 밑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있었다. 열심히 염불을 하고 염주를 굴리다가도 어떤 계기가 있으면 지연의 병은 도진다. 그것을 알기에 소사는 모르는 척 못 본 척 제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오늘 밤엔 잠 설치겠다.’
 소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지연은 저렇게 꼼짝없이 앉아 있는 날이면 밤새 소사를 상대로 넋두리를 했으며 새벽녘에 통곡을 하다가 흐느껴 울다가 잠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미신과도 같았고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혼약한대로 혼인의 의식만이라도 거행해달라, 그같은 지연의 의지는 미신같이 완명했고 신앙같이 절대적이었다. 출가한 일진에게 그것을 요구하기 위하여 지연은 지리산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일진이 모습을 감춘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그 집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제는 다만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이 되고 말았으니, 어쩌면 그것은 지연이 살아가는 지렛대 같은 것인지 모르고 삶의 정열 같은 것인지 모른다.
 해가 지는 산속에는 새 소리, 짐승 울음이 적막을 깨뜨리곤 한다. 싸 하고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맞은편 산허리는 붉게 타고 있었다.
 한편 도솔암으로 간 일행은 그곳에서 해도사와 소지감을 만났는데, 영광의 모자와는 초면이었지만, 놀라운 일은 소지감이 삭발을 하고 승려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도솔암의 주지였다. 일단 절에 들었다가 강쇠는 영광이만 남겨둔 채 영선네를 데리고 거처로 돌아왔다.
 “아이구 사돈!”
 휘의 모친이 맨발로 뛰어나왔다. 비로소 강쇠 내외와 영선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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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돈으로 대면하며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휘의 모친은 영선네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울기는 와 우노. 그 더러분 놈 생각하지도 마라. 나쁜 놈!”
 “보소 그래도 되는 겁니까? 사돈한테.”
 눈물을 훔치다가 휘이 모친은 질겁을 하며 말했다.
 “사돈이고 오돈이고, 숭악한 놈이다. 사람우 가심에 못을 박아도 유분수, 지 혼자 편할라꼬 저승에 가버린 놈, 생각하믄 머하노.”
 하며 씩씩거리는데
 “어무이! 어무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아이를 업은 영선이 들어섰고 휘와 딸아이가 뒤따라 들어섰다.
 “영선아!”
 영선네의 고함은 차라리 산짐승의 포효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제물에 놀라 뚝 그치더니 영선에게
 “씨어른한테 인사는 안 하고.”
 낮은 소리로 일깨운다.
 “밖에서 이럴 기이 아니라 방에 들어가입시다.”
 강쇠는 병아리 몰 듯 팔을 벌렸고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면서도 어른들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간다.
 “장모님한테 먼저 절 올리라. 애기도 어무이한테 절하고오.”
 강쇠 말이 떨어지자 딸과 사위는 이별의 긴 세월을 잡아당기듯 마음을 다하여 절을 했다. 주눅이 든 영선네는 처음 만난 사위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한다.
 “장모님 볼 낯이 없십니다. 용서하시이소. 이렇게 상면하게 된 것이 한스럽십니다.”
 귀밑에서 턱밑까지 면도자국이 파란 휘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네. 우, 우리가 무신 부모 할 짓을 했다고 절을 받나.”
 간신히 말한 영선네는 꼬깃꼬깃 접어진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울음을 삼킨다.
 “이분에는 선아하고 선구가 외할무이한테 절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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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도사가 이름을 지어준 선아 선구, 열한 살의 계집아이와 네 살바기 사내아이, 어줍은 몸짓으로 아이들은 절을 했다. 마당의 밀보리를 늘어놓은 멍석 옆에 짝쇠와 안서방이 쭈뼛쭈볏하며 서 있었고 그들의 댁네들도 장독가에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띄엄띄엄 세 가구가 사는, 물소리 바람 소리 까마귀 울음을 벗삼는 첩첩산중의 수수깡 갈대로 덮은 산막, 산사람들의 인륜지사는 대강 그 정도로 끝이 났다.
 “절에는 안 가고 바로 왔나?”
 휘의 모친이 아들에게 물었다.
 “잠깐 들리서 처남을 보고 왔십니다.”
 “이자 우리는 도솔암으로 내리가자.”
 강쇠가 일어서며 아들을 돌아보았다.
 “사돈은 저녁 잡숫고 눈 좀 붙이이소.”
 영선네한테 말하고 부자는 종종걸음으로 산길을 내려간다. 그들이 가고 난 뒤
 “어무이 저녁을 어찌할까요?”
 영선이 시어머니한테 물었다.
 “저녁은 내가 다 해놨네라. 채리기만 해서 가지오니라.”
 “예.”
 “그라고 깨미움을 좀 쑤어놨인께 그것도 한 그릇 상에 올리서 가지오고.”
 “예.”
 “선아야, 니도 나가서 엄니 거들어라.”
 “예 할무이.”
 선아는 어미 치마꼬리를 잡고 방에서 나간다.
 “사돈.”
 “예.”
 “이자는 그만 우리하고 사입시다.”
 “그, 그렇지마는.”
“다 잊아뿌리고 도솔암에 댕기믄서 저승길이나 딲업시다. 살믄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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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얼매나 살겄소.”
 “……”
 “십여 년 전에 우리 선아에미 놔두고 가심서, 맴이 아파 그랫겄지요, 한분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든 바깥사돈이 지금도 눈에 삼삼합니다.”
 “……”
 “언젠가는 식구들이 모이서 옛말하고 살 기다, 하고 생각했더마는 천지신명이 무상하요.”
 “원망하믄 머하겄십니까. 다 소용이 없는 일이라예. 생각하믄 야속하믄서도 불쌍하고.”
 처음으로 영선네는 제대로 된 말을 했다. 딸을 만나 마음이 한결 진정된 것 같았다.
 “단 하루도 편키 못 살고 갔인께요.”
 “와 아니라. 그거는 나도 아요.”
 “사고무친한 곳에서 임종에 아무도 없이, 어, 어떻게 혼자 떠났는지…… 그기이 젤 서럽소.”
 붙었던 입이 떨어진 듯 겹겹이 싸인 한을 찢어내듯 영선네는 스스럽게 울고 휘의 모친도 눈nf을 닦는다.
 “선아할배가 말하더마뇨. 가솔의 일이라 카믄 그렇게 애살스럽울 수가 없고 자개는 거기 비하믄 벅수라 캄서, 식구들 남기놓고 참말이제 우찌 눈을 감았일꼬.”
 “집에서는 그렇지도 않았십니다.”
 “아무튼지간에 사우도 자식 아닙니까. 아들이라 믿고 의지하고 사입시다. 산 사람은 살아야 안 하겄소.”
 “예. 밥 묵고 잠자고 금수만도 못합니다.”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영선네는 깨미음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입속이 마르는지 숭늉만 마셨다.
 설거지를 끝내고 영선이 손을 닦으며 방에 들어왔을 때 사방에서 어둠이 밀려왔다. 배를 타고 차를 타고 걷고 해서 고단했는지 선구는 할머니 무릎에서 어느덧 잠이 들었다. 선아는 등잔에 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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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힌다. 지치고 여위어 눈만 퀭하니 뚫린 영선네 얼굴이 벽을 등지고 있었다.
 “어이구 내 새끼, 떨어졌구나.”
 휘의 모친이 선구를 안고 일어선다.
 “그라믄 애딸이 그 동안 쌓인 얘기나 하시이소. 선아야 니도 가자. 할매랑 함께 자자.”
 아이들과 시어머니가 나간 뒤
 “엄니!”
 영선은 어미에게 몸을 던졌다.
 “엄니!”
 “운냐, 운냐.”
 영선네는 딸의 등을 쓸어준다.
 “불쌍한 울아부지!”
 소리를 죽이며 운다.
 한동안 모녀는 하염없이 울었다. 산에서도 소쩍새가 구슬피 울고 있었다.
 “영선아.” 
 “엄니.”
 “울지 마라. 이자 그만 울어라. 어디 얼굴 한분 보자.”
 영선네는 치맛자락을 걷어서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딸 얼굴의 눈물을 닦아준다.
 “그 동안 얼매나 고생을 했노.”
 “엄니한테 비하믄 내가 한 고생이사 머.”
 “통영서 아아들 애비는 머를 하고 사노.”
 “소목일이요.”
 “그것 해가지고 살 만하나?”
 “밥은 안 굶소 오두막도 하나 장만했고, 처음에는 좀 고생했지만.”
 “사람은 우떻노.”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고학을 읽어서 사리에 밝고 근실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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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니한테 잘해주나.”
 “야.”
 “니 오래비하고 니를 만내는 것이 내 소원이더마는, 우째 소원이 이렇기 이루어지는지 모리겄다. 내가 죽고 니 아부지가 살아야 하는 긴데.”
 “이제는 엄니라도 오래 살아주어야 한이 없으 깁니다.‘
 “살고 접잖다.”
 “그런 소리 마이소. 울고 갈 친정도 없었던 생각을 하믄, 그기이 얼매나 서럽고 외로운지 엄니는 모를 기요.”
 “……”
 “그런데 엄니 영구는 와 안 데리고 왔십니까.”
 “그 아는 핵교 댕긴께 대학교를 댕긴께.”
 “대학교를요?”
 “운냐, 공부를 잘해서 들어갔는데 니 오래비 몫까지 해야 안 하겄나?영구도 따라올라고 하더라마는, 모두가 의논을 해서 영구는 남아 있기로 했다.”
 “학비는 어쩌고.”
 “그기이, 학비가 별로 안 드는 핵교고, 기숙사가 있어서 묵고 자는 데는 지장이 없고, 또 책임을 져줄 사램이 잇어서 그 아 걱정은 안한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니 아부지하고 태생이 같고 공장도 하고, 그 얘기는 차차로 하자. 그런데 니는 터울이 와 그리 늦노.”
 “하나 잃어부맀십니다.”
 “우짜다가?”
 “홍역 끝에 그만.”
 소쩍새는 여전히 울었다. 쉬었다가는 또 울고. 모녀도 흔들리는 호롱ㄹ불 밑에서 얘기를 하다간 울고 울다간 얘기하고, 밤은 깊어갔다.
 도솔암에서는 늦게까지, 소지감이 영가를 위하여 목탁을 치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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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백골이 되어 돌아온 지난날의 동지, 아니 친구,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친구일 수도 없었고 둥지일 수도 없었던 이상한 만남으로 이루어졌던 교류를 생각하면서 소지감은 목탁을 두드리고 독경을 하는 것이었다. 진보적 사회주의자였던 이종 최범준, 그가 진주의 형평사운동에 가담하면서 동지가 된 송관수, 그 인연으로 하여 알게 된 송관수와 소지감, 살아온 역정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생리적으로도 친구가 될 수 없었으며 더더구나 동지도 될 수 없었던 사이, 그런 그들의 교류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민족의 동질감이었을 것이다. 운동권 밖에 있었던 소지감이 십여 년 전 군자금 강탈 사건에 미약하나마 가담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민족의 동질감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소지감이 산 사람이 된 데는 해도사의 존재도 컸지만 송관수와의 만남이 무관하다 할 수 없고 삭발하고 가사 걸친 중으로 변신한 것에는 군자금 강탈 사건의 영향이 컸던 것을 부인 못한다. 소지감은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토록 긴 방랑, 그토록 깊은 고뇌를 끝내고 젊은 날 입산한 일이 없었던 그 자리로 돌아와 지금 목탁을 치고 있는 것이다. 소지감의 마음은 비통하지 않았다. 평화스러웠다. 소지감의 마음은 서글프고 쓸쓸하지가 않았다. 평화스러웠다. 소지감의 마음은 서글프고 쓸쓸하지가 않았다. 평화스러웠다. 소지감의 마음은 서글프고 쓸쓸하지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도 송관수를 위해서도 어딘지 모를 뿌듯함이 있었고 교류가 아닌 합류를 느끼는 것이다.
 “아따 참 길기도 하다. 대강 하믄 좋겄구마는.”
 강쇠는 혀를 찼다. 강쇠의 추도하는 방법은 목탁이나 염불이 아니었다. 그는 고함 지르고 소란을 한바탕 피우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밤은 깊을 대로 깊었고 법당 문을 열고 소지감이 나오자 송영관과 휘는 절방으로 들어갔고 가사와 장삼을 벗은 소지감 해도사 강쇠는 도솔암 가까이 새 둥지를 틀어놓은 해도사 산막을 향해 마치 개구쟁이들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술과 안주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땡땡이중이라 카는데 무슨 염불을 그리키 오래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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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쇠가 허두를 텄다.
“무식한 귀신은 진언도 못 듣는다 했소이다.”
 “그라믄 내가 진언도 못 듣는다 그 말이오?”
 “아암, 그러니 김장사는 죽어서 혼백이 절 근처에 떠돌아도 법의 보시를 못 받는다 그 말이오.”
 “그런께 저승으로 못 가고 거릿구신으로 떠돈다 그 말이오?”
 “그렇지요.”
 하자 해도사가
 “걱정 마시오 김장사, 어차피 저승으로 간다면 지옥밖에 갈 곳이 없을 것인즉, 이곳에 남아 있는 편이 백번 낫지.”
하고 실실 웃는다.
 “하자마는 해도사 소지감선상이 모두 지옥으로 가부리고 나믄 나 혼자 심심해서 안 될 긴데.”
 술잔이 돌았다. 반백머리의 해도사는 희미해 보였다. 나무 옆에 있으면 나무 같을 것 같았고 바위 옆에 있으면 바위 일부일 것 같았고 물가에 있어도 눈에 뛸 것 같지가 않았다. 소지감은 깡말라서 팔다리가 길어 버마재비 같았고 눈은 아주 맑게 갠 하늘 같았다. 강쇠만은 머리가 비교적 검고 잔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살빛이 흰 턱택인지 늙은 푼수가 꽤 괜찮았다.
 “그것은 염려 놓으시오. 내가 옆에 끼고 가리다. 원하면 말씀이오.”
 “되잖은 소리 하지도 마소. 아아니 이 김장사 거구를 우떠허게 잔내비 겉은 해도사가 끼고 간단 말이오. 서천 쇠가 웃겄소.”
 “허허어, 저러니 무식한 귀신은 진언도 못 듣는다는 말을 듣지. 혼백한테 무슨 놈의 무게가 있단 말이오. 자아 사례 들지 않을 만큼 천천히 술 마시고 울든지, 웃든지, 한바탕 분탕질을 치든지 해야 할 것 아니오.”
 “흥! 울기는 와 우노. 뭐가 서러바서, 사내 대장부가 울믄 산천초목이 흔들린다 카는데 그 귀한 울음을 내가 울 상싶소? 뒤쫓아가서 그 숭악한 놈, 다리몽댕이 뿌루고 눈두덩이 터지게 주먹질 못하는 게 한인데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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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언젠가 한번 그런 일 있었지요?”
 소지감 말에 해도사가
 “구례 길노인 생신 때 한바탕 붙었지요?”
 “맞소. 그때는 누구 눈두덩이 터졌든가?”
 “말하믄 잔소리지. 그때 내가 개 패듯 그놈을 패주었지요.”
 “나 땜에 그랬지요? 애꿎인 송형이 당했지.”
 “아직 그 꼬투리가 남아 있소?”
 “머리 깎을 때 버렸소이다.”
 “허 참, 그때까지 그라믄 유갬이 있었다 그 말이구마는.”
 “나를 친 거나 진배없는데 꿀먹은 벙어리 냉가슴 앓았으니 그게 그리 쉽게 잊을 일이든가.”
 “그릇이 제법 큰 줄 알았는데 형편없구마. 왜놈 술종지요 술종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먹으며 강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산밑에서는 사람들이 소선상보고 땡땡이중이라 캄서 숭들을 보는데, 그 염불이라는 기이 진언이오? 하기시 부시기 어매야 아배야 그냥 주워삼키는 말 아니오?”
 “하시기 부시기지 뭐.”
 “그럴기요. 몇십 년을 중질 해도 나무아미타불하고 관세음보살밖에 못하는 중이 많다 카든데 벼락치기로 중이 된 소선상이 무신 진언인가, 머 지신 밟는 소린가 그걸 하겄소.”
 “부처님 같은 말씀 하시네.”
 “야? 뭐라 캤소?”
 “부처님 같은 말씀 한다 했소이다.”
 “그기이 무신 소리요? 답대비 유식꾼들은 바람 소리 겉은 말을 한께로 종잡을 수가 있어야제.”
 “허허어. 김장사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오. 본시 아무것도 없거든. 아무것도 없단 말씀이오.”
 해도사가 또 실실 웃으며 말했다.
 “하믄은 중질은 와 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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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어질려고 하는 거 아니오, 하핫핫핫.”
소지감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또 불사나 받아서 묵고 살라고 그러는 줄 알았지. 없어질라카믄, 그기이 머가 어렵어서 관수 그놈맨치로 불간에 들어가믄 될거 아니오. 안 그렇소?”
 “없어지기는커녕 지금 법당에 와서 딱 앉아 있질 않소?”
 “내일 강물로 들어가믄 고기밥 되지.”
 하는데 강쇠 목소리는 또 한번 힘이 빠진다.
 “송형 아들 말씀인데.”
 해도사가 말머리를 돌렸다. 순간 강쇠는 표정이 달라지면서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천고가 든 상호더구먼.”
 “그런 말은 와 하요.”
 퉁명스럽게 매우 불쾌해하는 투로 강쇠는 말했다.
 “무슨 악의가 있어 한 말은 아니오. 그럴 리도 없고 그것이 반드시 나쁘다는 뜻만은 아니외다. 가슴이 아파서 한 말이었소.”
 “한치 밖을 모리는 기이 사람인데 그런 말 마소.”
 심각해지면서 강쇠는 강하게 말했다.
 “가슴이 아프다 하니 기분이 좋잖았던 모양인데, 하 참 저러니 무식한 귀신 진언도 못 듣는다는 말 들을밖에.”
 “한판 붙어볼라요?”
 “아아 천만에 사양하겠소이다. 분탕질하는데 이 산막은 내놓았소만 나는 아니오.”
 해도사는 팔을 휘휘 내저었다.
 강쇠가 더 이상 응수하지 않고 술을 마시니 방안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울어도 할 수 없고 웃어도 할 수 없고 사람이란 명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 명대로…… 김휘도 그렇고 몽치놈도 그렇고 송형의 아들, 영광이라 했든가? 세 사람 모두가 범속하지 아니 한 것 또한 웃어도 울어도 할 수 없는 명운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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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도사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렸다. 강쇠는 여전히 응수하지 않았고 소지감은 개의치 않겠다는 듯 술잔을 들었다.
 “범속하지 않은 명운이란 사람에게만 한한 것은 아니며 천지만물 억조창생, 생을 받은 그 모든 것에도 해당이 되는 것인즉, 천년을 사는 거목의 신령함이 있는가 하면 같은 나무로 태어나서 진작부터 베어져 불간으로 들어가는 불운이 있고 동네 어귀에서 세상 구경, 귀가 시끄러운 나무가 있는가 하면 벼랑 끝에 홀로 있기도 하고.”
 “어디서 많이 든든 풍월이긴 한데, 해도사, 자다가 봉창 뚜디리는 거요?”
 소지감이 핀잔을 주었지만 해도사도 개의치 않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날짐승 들짐승 벌레며 초목 미물에 이르기까지, 물속에서 기고 헤엄치는 목숨들, 생을 받은 억조창생 그 수없는 것의 명운이 어찌 그다지도 신묘하게 같지 아니한지, 연이나 각기 다르되 각기의 순환, 운동은 한결같이 같으니 그 조화가 대체 무엇일꼬. 운동은 시간의 연속이라, 하면은 유구한 시간을 돌아서 사람이 되는 시점이 있고 짐승이 되는 시점이 있고 초목이 되는 시점이 있고, 재앙의 자리 홍복의 자리도 번갈아서 오고가는 것, 그것이 법일진대 그 법을 짜놓은 존재는 대체 무엇일꼬. 조물주라고도 하고 창조주라고도 하고 신이라고도 하고.”
 하늘의 별과 산막에서 새나간 불빛밖에 없는 심산유곡의 깊은밤, 물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데 이따금 고라니 울음도 들려오는 듯한데 주연이라 할까 송관수의 추도회라 할까, 그것 자체가 괴이쩍은 일이거늘 소지감이 ‘자다 봉창 뚜디리느냐’, 했듯이 해도사의 모습이야말로 한층 기괴스럽고 주술적이다.
 “그 조물주의 무자비함이야말로 목숨 속에 깃들여진 원초의 두려움이요 슬픔이라. 허나 그 무자비함이 공평인 것을 어쩌랴. 여지 없는 순환은 선악의 인으로서 과로 통하고 물의 정연함과 더불어 영 또한 정연하니 오늘과 같은 말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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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도 새 법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고 정연한 순환에 따라 말법은 썩어서 새것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흔적 없이 되는 것이, 병든 목숨이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 하여 우주는 나요 나는 우주라. 홍복도 내 자신의 것이요 재앙도 내 자신의 것이며 벌레인들 내 자신 아니라 못하리. 날짐승 들짐승도 내 자신이며 간 사람도 내 자신이며 오는 사람도 내 자신, 모든 것은 일체요 또한 낱낱이라. 일체가 같은 것이라면 낱낱은 다른 것, 이 무궁무진함을 어찌 인간이 헤아리고 가늠하리.”  
 “보소 해도사!”
하다가 강쇠는 목이 따가웠는지 캑캑 기침을 했다. 
 “사레 들지 않게 천천히 술 마시라 하지 않았소.”
 해도사는 지금껏 한 자신이 말을 두동강이로 분지르듯 어세를 바꾸고 농치듯 말했다.
 “개대가리 죽쑤어 묵고 옴대가리 찜쪄 묵는 그 따우 소리 그만 못하겄소!”
 “김장사 죽어서 절 근처를 맴돌 때 법의 포시라도 받으라고 지감법사 대신으로 해본 말이 아니오. 또 세 사람 젊으니 명운 얘기를 했던 거구요. 뭐 잘못되었소?”
 “김장사 그 따위 잡설에 귀기울일 것 없소. 성도를 포기한 가짜 도사의 말이 뭐 그리 대수겠소, 하하핫핫……”
 소지감의 웃음 소리는 아까보다 컸지만 맥이 쑥 빠져 있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짖는다 하더니 불과를 포기한 땡땡이중이 할 말은 아닌 듯싶소이다.”
 “흥! 놀고 있네. 점쟁이 땡땡이중, 죽이 맞구마는. 보소 해도사, 머라 캤소? 세 사람 젊은이의 명운 얘길 했소? 앵이꼽고 참말로 가소롭다. 애비 에미 없이 산중에 떨어진 몽치놈이나 산놈으로 태어나서 숯을 굽다가 도방으로 나간 내 아들놈이나 백정의 피를 받고.”
 또 기침을 한다.
 “범속인지 굴속인지 팔자가 사나울 것은 까막눈 졸때기, 살강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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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드나드는 생쥐도 알 만한 일, 유식한 문자 써가믄서 말할 것도 없는 기라. 본시 문자라는 그기이 알쏭달쏭해서 점치러 온 사람주머니 털어묵기 십상이고 자고로 그것 가지고 백성들 가르치기보다 등쳐서 간 뽑아묵는 데 쓰여오기는 했지마는 대나깨나 대가리디미는 거 아니라고. 가아들 앞날이 고생바가지라는 거는 태어날적부터 점지된 거를 새삼스럽게 나베어살 것 머 있소? 오장 뒤집히서 술맛 떨어지게끔.”
 소지감은 삭발한 머리를 슬슬 긁으며 웃고 있었다. 해도사는 안주를 집다 말고 젓가락을 상 위에 탁! 놓으며
 “등쳐서 간 뽑아먹는데 쓰이는 그놈의 글, 술병 들고 눈길 헤치며 찾아와서 아들놈한테 글 가르쳐달라, 내게 너부죽 절한 사람이 누구더라?지리산 중놈이던가?”
 “그거야 머, 간 뽑아묵은 놈 실개 씹으라고 그랬제.”
 강쇠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허허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식자한테 무슨 놈의 쓸개가 있누. 쓸개, 간 다 뽑아버린 지가 이미 오랜 옛일인데. 허나 오늘은 그 얘기 일단 접어두기로 합시다. 불끈불끈 성질낸 까닭을 잉제사 겨우 알게 되었으니, 해서 하는 말인데 이보시오 김장사, 아까 내가 송형 아들한테 천고가 들었다고 했는데 그 말을 꼬깝게 생각한 모양이오만 그건 오해요. 그런 거쯤은 아녀자들도 알고 있는 일이라 설명을 아니 했던 것이 잘못이었소.”
하면서 해도산느 사팔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강쇠 얼굴을 슬쩍 쳐다본다.
 “그 천고의 고짜는 괴로울 고가 아니며 홀로 고란 말씀이오. 그러니까 알기 쉽게 말을 하자면 고생상이 아니라 외로울 상이다 그 말이오.”
 “그거나 저거나, 메치나 엎어치나 매일반 아니요! 맘고는 고가 아닌가? 사람이 외롭지 않다믄 멋 땜에 고생을 하겄소.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손가락만 물리믄 젖이 절로 나와서 그거를 빨아묵고 컨다는 천상의 아아들 이야기는 들었지마는 이 풍진세상 천애고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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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없이 자랐다는 말 듣도 보도 못했소!”
 “제법 귀동냥은 했구먼.”
 “머이 어째요?”
 “지감법사와 나를 보시오. 지감법사는 백정 혈통도 아니구 숯 굽는 산놈 자손도 아니오 나 역시 물배나 채우는 가난뱅이 자손도 아니었소. 허나 지감이나 나는 천고성이오.” 
 “그래서 우떻단 말이오.”
 “지감께서는 고생을 했소이까?”
 해도사가 넌지시 묻는데 소지감은 또 음흉스럽게
 “글쎄올시다, 흐리멍텅하게 살아놔서, 어느 만큼을 고생이라 하는지. 자로. 재볼 수도 없고 그러나 굶주린 일은 없었고 모진 일 해본적은 없었소.”
 “거 보시오. 쓸 고와 홀로 고가 다르지 않소?”
 “이거 머 아아들 동전 갖고 노는 기가? 와 이라노.”
 “천고도 모르는 사람 알기 쉽게 하는 거요. 송형 아들한테 천고가 들었다 하니 김장사는 쪽박차고 빌어먹는 것으로 알았소?”
 강쇠의 낯빛이 싹 변한다.
 “영광이는 내 아들과 진배없소. 그런 말 함부러 해도 되는 기요?”
 “함부러 한 게 뭐 있소? 쪽박차는 팔자 아니라는데 어재 징을 내시오? 여하튼 오늘은 김장사한테 몽땅 내놨으니 한껏 핏대 올려보시오. 왜요? 하든 지랄도 멍석 깔아놓으면 안 한다 하더니 말이 막혔소?”
 “집어치아라! 양반 소반 안 부럽다! 그 따우 졸부 안 부럽다! 씨도 못 받은 주제에 세상 나온 값도 못한 주제에, 니깟것들 사람 사는 기이 먼지 알기나 하나? 사람 사는 기이 멋꼬! 유식한 것들 어디 말 좀 해보라고! 돈푼 있는 놈, 문벌이 있어서 덕분에 식자깨나 얻어걸치고 그것 밑천 삼아 입치레하고 살아온 것들이 머 어쩌고 어째? 몸으로 때운 기이 머 하나 있다고 잘난 소리 하노 말이다. 매맞고 걷어채이고 손바닥이 논바닥 되게 일을 해도 못 묵고 굶는데 일 안 하고 안 굶은 기이 자랑가! 그기이 호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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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쇠는 펄펄 뛰며 악을 썼다.
 “낱낱이 다 맞는 말이오. 허허헛헛 맞는 말이고말고. 한데 김장사 말로는 그러지만 어째 화를 내시오? 겁을 내고 있는 것 아니오? 자랑스럽지 못한, 잘먹고 잘사는 꿈 그 따윈 잊어버리시오.”
 태연하게 해도사는 말했으나 그 말 속에는 준열함이 있었다. 말이 막힌 강쇠는 입을 실룩거리다가 슬그머니 한다는 말이
 “자식 없는 것들이 어디 사람가. 우찌 부모 맴을 알 기고.”
하고는 술을 퍼마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강쇠가 어찌 그들 마음을 몰랐겠는가. 하루 이틀 사귄 사이도 아니요 십여 년을 산에서 함께 살면서 서로가 서로의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처지, 신분의 차이라든지 식자유무 따위는 벌써 옛날에 헐어버린 담이었다. 그것은 강쇠가 인간으로서 그릇이 크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청춘을 다 바쳐 그림자같이 따라다녔던 김환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강쇠의 판단력, 사고의 깊이는 본래의 소박함, 우직을 능가했고 한 우두머리의 풍모를 엿볼 수 있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들의 노는 푼수가 그러했고 유독 오늘 밤 강쇠 비위를 긁은 것은 말하자면 참담한 일에 대한 살풀이 같은 것이라 할까. 송관수의 죽음은 사실 죽음 그 이상의 의미로서 이들을 응축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술잔을 메어치고 강쇠는 밖으로 나왔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무작정 걷는데 가슴이 타는 듯했다. 입속이 바싹 말라서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발에 익은 산길을 한참 지나서 개울가까지 온 강쇠는 엉덩이를 치켜드록 물을 굴컥굴컥 들이켰다. 손바닥으로 입가를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별안간 중천에 떠 있는 서늘한 달이 슬렁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마치 밤바다에 떠 있는 차디찬 해파리처럼. 동시에 산기운이 싸! 하고 전신을 감싸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한기가 든다. 그러나 얼굴은 뜨거웠다. 목에서는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개울가에 있는 썩은 등걸나무에 걸터앉은 강쇠는 옷 앞자락을 끌어당겨 얼굴을 문질러본다.
 ‘다아 끝장난 기라. 끝장이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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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끼 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어 붙여 문다. 소쩍새가 자지러지게 울어쌌는다.
 ‘내 한평생도 이자 끝이 난 셈이고 간 사람 남은 사람, 와 이렇기 모두 허망하노 말이다. 끝간 데 없는 이 깊은 산이 나를 미치게 하네.’
 순간 강쇠 귀에 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억서억 칼 가는 소리, 김환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고 죽은 뒤, 그를 밀고한 지삼만을 죽이려고 ㅎ나밤에 강쇠는 칼을 갈았다. 그러나 그때 생각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해도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술병 들고 눈길을 헤치며 찾아와서 아들놈한테 글 가르쳐달라, 내게 너부죽 절한 사람이 누구더라?’
 강쇠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의 정경 하나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상을 뒤덮은 하얀 눈에서 시작된다. 눈이 내린 뒤, 산속은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서 나뭇가지에 실린 눈은 설화이기보다 빙화였었다. 끝없는 빙화의 수림 속을 헤매듯, 미끄러지며 걸으며 떨어뜨려서 깨지 않으려고 해도사에게 가져가는 술병을 신주 모시듯, 가다가 한 구절밖에 모르는 노래「한 오백년」을 되풀이하여 불렀는가 하면 흐느껴 울었고 고함을 치기도 했었다. 딸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렇게 혼자 발광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실로 놀라운 일을 경험했던 것이다. 죽은 김환과의 산중문답 그것인데 강쇠로서는 아직도 설명이 안 되는 신령스런 경험이었다. 그 후반을 되새겨보면 다음과 같다.
 ……만물이 본시 혼자인데 기쁨이란 잠시, 잠시 쉬어가는 고개요 슬픔만이 끝없는 길이네. 저 창공을 나는 외로운 도요새가 짝을 만나 미치는 이치를 생각해보아라. 외로움과 슬픔의 멍에를 쓰지 않았던들 그토록 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강줄기 같은 행로의 황홀한 꿈일 뿐이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란 말도 못 들었보았느냐?……
 ‘그거는 머, 다 하는 얘기 아니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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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는 대자대비라 하였고 예수는 사랑이라 하였고 공자는 인이라 했느니라. 세 가지 중에는 대자대비가 으뜸이라. 큰 슬픔 없이 사랑도 인도 자비도 있을 수 있겠느냐? 어찌하여 대비라 하였는고. 공이요 무이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육신으로 진실로 빈자이니 쉬어갈 고개가 대자요 사랑이요 인이라. 쉬어갈 고개도 없는 저 안일지옥의 무리들이 어찌하여 사람이며 생명이겠는가……
 ……마음으로 육신으로 고통받는 자만이 누더기를 벗고 깨끗해질 것이며 뱃가죽에 비계 낀 저 눈물 없는 무리들이 언제 그 누더기를 벗을꼬. 고달픈 육신을 탓하지 마라. 고통의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지 마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우리몸이 유리알같이 맑아졌을 때일까…… 그 만남의 일순이 영원일까. 강쇠야 그것은 나도 모르겠네……
 ‘참 내, 무신 그런 말이 있소. 그렇다믄, 성님 말씸에 따르자믄 성님은 후회도 여한도 없거구마요. 그러크럼 고달프고 고통시럽게 살다가 갔인께요. 무신 후회가 있으며 한이 남았겄소.’
 ……하하핫 하핫핫 후회라, 후회, 후회는 없겠구나. 내 생전에도 후회는 아니 했으니, 한이야 지가 어디로 가겠나……
 ‘우째서 한이 남소? 후회 없이믄 한도 없제요.’
 ……한이야 후회하든 아니 하든, 원하든 원치 않든, 모르는 곳에서 생명과더불어, 내가 모르는 곳, 사람 모두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생명의 응어리다. 밀쳐도 싸워도 끌어안고 울어도, ㅅ애명과 함께 어디서 그것이 왔을꼬? 배고파서 외롭고 헐벗어서 외롭고 억울하여 외롭고 병들어서 외롭고 늙어서 외롭고 이별하여 외롭고 혼자 떠나는 황천길이 외롭고 죽어서 어디로 가며 저 무수한 밤하늘의 별같이 혼자 떠도는 영혼, 그게 다 한이지 뭐겠나. 참으로 생사가 모두 한이로다……
 그때 강쇠는 자신이 저승, 삼도천 강가를 지나가고 있는 것 같은 환각에 빠졌었고 정신을 차린 뒤에는 김환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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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눈에 덮인 산의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튿날.
 도솔암 법당에서는 새벽부터 지감의 독경 소리가 들려왔고 날이 희뿌옇게 밝아왔을 때 상좌 일봉이 빗자루를 들고 나와 절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일휴는 도솔암에서 사미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해인사에서 수도중이었다. 도솔암에는 주지 지감과 상좌 일봉, 공양주인 늙은이 세 사람이 있었다. 큰 불사가 있을 때는 산밑 마을의 신도들이 와서 거들어주는 형편인데, 길노인은 세상을 떠났고 소지감이 술을 마시며 속인과 같은 행동을 곧잘 해서 땡땡이 중이란 말을 듣기는 했으나 학식이 깊었고 경전에 능하며 가사를 걸치고 목탁을 들 때 그 위엄이 예사롭지가 않아 불사를 맡기는 신도가 적지 않았다. 해서 도솔암은 길노인이 공양미를 대주던 시절과는 사정이 달랐다.
 “일봉아, 일봉아.”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누구요.”
일봉이 돌아보았을 때 소사가 팔짱을 끼고 새벽이슬에 젖어 오종종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침 일찍 웬일입니까.”
 툼명스럽게 말했다.
 “어제 유골 모시고 온 손님 말이다.”
 “……?”
 “그 소님 어디서 오셨니?”
 “그거는 왜요?”
 “글쎄 어디서 오셨느냐구.”
 “부산서요.” 
 “김장사가 마중나온 걸 봤는데 그 사람들 누구지?”
 “참 별걸 다 묻소.”
 “일봉아 얘기해봐.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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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사 사돈이래요.”
 역시 퉁명스럽고 귀찮다는 듯 말했다.
 “사돈……”
 소사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지연이 가서 알아보고 오라는 성화에 못 이겨 투덜거리고 나온 소사였으나, 또 지연이 희망을 걸고 있는 그같은 실마리가 있을 리 만무이며 부질없는 짓, 언제 그 병에서 풀려나나, 짜증을 부리기도 했던 소사였으나 일진이 만주로 갔을 거란 지연의 믿음이 어느덧 소사에게 반영이 되어 알게 모르게 그도 믿었는지 모른다. 그유골이 만주에서 왔다면 일진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란 지연의 생각도 어느새 소사 의식속에 옮겨져 있었는지 모른다. 여자의 직감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지연의 추리는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볼 때 그것은 황당한 것이었고 지연이 자신조차 구우일모의 가능성에 집착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위하고 덧없이 가는 시간 속의 몸부림이며 고인 물을 흔들어 파도치게 하려는 충동이었는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앉은 산고양이가 반딧불에도 덤벼보는 그같은 심사였느지, 여하튼 소사는 실망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사돈이라 하는데는 더 이상 뭣을 물어보겠는가.
 날씨는 청명했다. 늦더위가 남아 있었지만 습기 없는 산들바람이 사람들 살갗을 쾌적하게 스쳐가곤 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유해는 도솔암을 나섰다. 목탁을 치며 독경을 하며 지감이 앞장서서 유래를 인도했고 유해를 뒤따른 사람은 영선이와 영선네, 휘의 모친 그리고 휘와 강쇠 해도사 짝쇠 안서방이었다. 가파로운 곳에서는 목탁과 독경 소리가 멎었고 순탄한 길에선 목탁이 울리고 독경 소리가 울렸다. 일렬종대로 가는 일행을 떡갈나무 그늘이 사로잡았다가는 놓아주곤 한다. 하늘이 숨었다가는 나타나곤 했다.
 강가에 당도한 일행은 그곳에서 멈추었고 미리 얻어놓은 작은 배에 유해를 실었다. 형광과 김휘가 승선하자 사공은 노를 저었다. 지감은 눈을 감고 힘찬 목소리로 독경했으며 여자 세 사람은 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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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나머지는 배를 바라보았다. 강심을 향해 멀어져가는 배를.
 망자의 아들과 사위가 유골을 강물에 뿌리기 시작했다. 휘는 굳은 침묵으로 그 일을 행하였고 영광은 아이처럼 흐느끼며 아버지를 불렀다. 그 일이 다 끝났을 때 휘는 먼산을 바라보았으며 영광은 뱃바닥에 엎드려 뱃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강물은 무심히 흐르고 하늘의 실구름도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도솔암으로 돌아온 일행은 절마당 여기저기 흩어져 우두커니 서 있다가 여자들과 안서방 짝쇠는 집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다섯 명의 사내들은 절방에 모여 앉았다. 앞으로의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시종 말이 없었더 영광이 호주머니 속에서 접은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먼저, 이것을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저씨.”
 봉투를 강쇠에게 건네주려 하자
 “아저씨라니, 사돈어른이라 해야지.”
 해도사가 나무라듯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저씨믄 우떻고 아부지믄 우떻노. 괜찮다, 한데 이기이 멋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홍이형님한테 남긴 유서입니다.‘
 “그래?”
 언해는 겨우 해독하는 강쇠가 봉투 속에 든 것을 꺼내었다.
 
 홍이 보아라. 내가 아무래도 심상찮은 병에 걸린 것 겉다. 신경으로 돌아가자니 심상찮은 병 때문에 어러불 것 겉고 가다가 죽어도 곤란한께, 아무튼지 만일을 생각해서 한자 적기로 했다. 자손한테 물리줄 전답 한때기 없는 처지에 무신 놈의 유서인가 할지 모리겄다마는 이대로 내가 가믄 남은 사람들 가심에 한을 심을 것 같애서…… 와 이렇게 맴이 담담한지 참 내가 생각해도 이상타. 내가 죽으믄 모두 고생만 하다가 갔다 할 기고 특히 영광이 가심에는 못이 박힐 기다. 그러나 나는 안 그리 생각한다. 그라고 후회도 없다. 이만하믄 괜찮기 살았다는 생각이고, 장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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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이로 장바닥을 돌믄서 투전판이나 기웃거릴 놈이, 하늘 밑의 헐헐단신 계집이나 어디 하나 얻어걸리겄나. 그렇다믄 많이 출세한 거 아니가. 새삼시럽게 지나온 길을 돌아보이 정말 괜찮기 살았구나 싶다. 넘한테 큰 실수 안 하고 이렇기 가는 것도 다행 아니겄나. 이것은 진정이다. 여한이 엇다. 자식들은 제 갈길 갈 것이고 다만 내 모친이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싰는지 자식 된 도리, 신신이 어느 산천에 묻혔는가 모리고 가는 것이 나한테 남은 응어리다. 그라고 내 내자가 불쌍할 뿐이다. 그러나 본시 심성이 착하고 가는베 재놓은 듯키 말이 없는 사람이니 크게 남한테 폐가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사람을 당부한다고 전해주라. 홍이 니한테는 신세 많이 졌다. 고향 산천이 보고 싶고 작별하고 싶은 얼굴도 많다마는 어차피 사람은 혼자 가는 거 아니겄나. 
 
 강쇠는 옆에 앉은 해도사에게 편지를 넘겨주고 나서 담배를 붙여 물었다. 몇 모금 피우다가
 “빌어묵을 놈.”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모두가 돌려가면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강쇠에게 돌아왔다. 강쇠는 편지를 영광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펜지는 최씨댁 그 사람도 보아야 할 기다. 연학이한테 주믄은 그리로 갈 기구마.”
 영광은 평사리로 가서 환국을 만난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비밀로 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라믄 이제부터 사부인을 어디 계시게 할지 일단 우리끼리 의논을 해봐야 안 하겄나.”
 “그건 당연히 제가 뫼시야지요.”
 영광이 의외란 듯 말했다.
 “니는 미장가의 몸이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니.”
 “거처라면 서울 가서 마련할 수도 있고 그만한 준비는 저도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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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그라믄 장개부터 들어라.”
 “그거는 차차……”
 “처남이 가정을 가질 때까지 장모님이 통영 우리 집에 와 계시믄 안 되겄십니까?”
 처음으로 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출가외인인데 그럴 수는 없지.”
 영광이 강한 어세로 말했다.
 “그럴 기이 아니라 당분간 안정이 될 때까지 우리랑 기시믄 안 되겄나?”
 강쇠가 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일은 가족끼리 모여서 의논하는 것이 옮지 않을까요? 송형의 부인 의사가 중요하니.”
 해도사 말이었다.
 “그건 그렇네.”
 강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쇠 부자와 영광이 집으로 갔을 때 마당에선 선일이는 안서방 외손자랑 함께 놀고 있었다. 영선과 휘가 혼인할 적에 죽네 사네 했던 순이는 그 후 산밑마을 농사꾼한테 시집을 가서 잘살고 잇었다. 얼마 전에 출산을 하여 산후 뒷바라지를 하러 갔던 안서방댁네가 돌아오는 길에 아우본 외손자를 데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멀찌감치 짝쇠가 얼쩡거리고 있다가 사위 아들을 거느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강쇠를 바라본다.
 방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양편 식구들은 영선네 거취 문제를 놓고 각기 저네들 생각을 개진했다. 절에서 말했던 것처럼 영광을 따라 서울로 가느냐, 당분간 통영의 영선이집에 가 있느냐, 아니면 산에 남아 정양을 하느냐, 말없이 의견을 듣고 있던 영선네는
 “나는 그만 절에서 공양주하고 함께 있었으믄 싶습니다.”
하고 말했다. 영광과 영선은 비로소 모친이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것을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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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돈댁도 가깝고 오며 가며.”
 영광과 연선은 그러는 어미를 설득하려 했지만 자식들 집에 가서 살지 않겠다는 영선네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것도 마 괜찮겄십니다. 당분간 절에 기시믄서 관수 명복도 빌고 그러는 기이 신양에 좋을 깁니다. 너거들도 너무 우기지 마라. 어무이가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기라.”
 강쇠는 단을 내리듯 말했다. 영광과 영선은 서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자식들과는 함께 살지 않으려 하는가, 영선이나 영광은 알고 있었다. 자식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영선네 결심을. 어쩌면 그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그의 출생의 멍에는 무겁고도 가혹한 것이었다.
 영광은 산에서 이틀을 더 묵었다. 그러는 동안 매부 김휘와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고 산속을 헤매어 다니기도 했다.
 산에 남은 영선네와 그곳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산을 떠날 때는 영선의 식구들과 함께였다. 그들도 통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화개까지 나와 강가에서 나룻배를 타고 하구를 향해 배가 내려갈 때
 “처남 이거 받아두소.”
 하며 휘가 접은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통영 우리집 주소요.”
 영광은 그것을 받아 호주머니 속에 간직한다.
 “오빠 꼭 한번 오이소. 우리 사는 것도 보고.”
 아이를 안고 옆에 있던 영선이 말했다.
 “그래 갈게.”
 “오빠.”
 “……”
 “부디…… 엄니를 잊으믄 안 될 기요. 불쌍한 울엄니, 찾아보기가 어러부믄 편지라도 자주 하이소.”
 “알았다.”
 “엄니가 말을 안 했지만 오빠 형상 보고 맘속으로 많이 울었일 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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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
 “잘난 내 아들, 잘난 내 아들 하믄서 울든 엄니 생각이 나요.”
 “불편할 것도 없는데 뭘.”
 “만나믄 할말이 태산이라 생각했는데 한마디도 못하고……”
 “사람이 할말 다 하고 살 수 있나. 나 같은 놈, 오라비로 생각해주는 것만도 과남하지.”
 “그런 말 와 합니까.”
 “내 잘한 것 없지. 식구들 가슴에 못만 박았지.”
 “그러고 싶어 그랬겄소.”
 나룻배가 평사리에 가까워졌을 때 영광은 조카 선일을 영선한테서 받아 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비비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나룻배에서 내릴 적에는 선아의 머리를 쓸어주고 호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돈을 꺼내어 쥐여준다. 
 “오빠!”
 “그럼 잘 가아.”
 “처남 꼭 한번 오소.”
 휘가 말했다.
 “그러지. 매부도 몸조심하구.”
 하동을 향해 떠나는 배 위에서 두 내외는 강가에 선 영광을 멀어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는 것이었다.
 영광은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마을길로 들어서지 않고 강을 따라 천천히 걸어올라간다. 강물에 씻기고 햇빛에 바래어 하얀 자갈을 밟으며. 강언덕 아래 널찍한 바위 하나가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은 영광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불며 강 건너 산을 바라본다. 마을에서 상당히 덜어졌는지 인적기가 없었다. 눈에 비치는 것은 푸른 하늘, 강 건너 푸른 산, 그리고 청록색 강물이었다.
 너무 조용했다. 공간이 유리처럼 눈부시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남강여관에서도 그렇게 느꼈지만 꿈 같기만 했다. 방금 헤어진 누이 영선, 세파에 시달린 그러나 옛모습을 간직한 그를 꿈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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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처럼 느껴졌다. 남강 다리 위를 유해를 안고 걸었던 일이며 법당의 독경 소리, 지감에게 인도되어 일렬종대로 내려가던 산길, 그 푸름의 공간도 꿈길에 있었던 일만 같았다. 그런가 하면 이십일 넘게 진행되었던 일들이 모조리 선명하게 상세하게,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과도 같이 마음속에서 펄러덕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 강가 바위가 종착역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에 대한 강렬한 유혹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진정 자신의 삶에 후회가 없었을까?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후회 없게 했을까?’
 물새 한 마리가 돌팔매처럼 강물 수면 위로 핑! 핑 건너지르다가 날아오른다. 뗏목 하나가 하류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서울 가면 혜숙을 찾아볼까? 혜숙과의 관계를 되돌려볼까? 그 여자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서로 의지하며.’
 영광은 다시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며 쓰디쓰게 웃는다. 웃던 얼굴은 차츰 일그러졌다. 타산과 냉혹함, 자신의 추악한 부분이 구역질나게 싫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자신이 걸터앉은 널찍하고 편안한 바위가 종착역같이 느껴졌다. 아까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죽어버릴까…… 저 강물에 들어가서 드러누워버릴까.’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영광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나는 벌써부터 어머니한테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슬픔에서 놓여나기를 원하고 있다. 나쁜 놈!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 혼자만의 동굴을 찾고 있다. 그것이 추방이든 도망이든 죽음이든.’
 바로 옆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운동화를 신은 여자의 발이 맨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날씬한 종아리, 주름진 꽃무늬치마, 녹색 계통이었다. 미색 브라우스, 미색 블라우스를 느꼈을 때 그것은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여자, 우선은 인기척을 낼 겨를도 없을 만큼 놀랐지만 영광은 뭔지 침해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별안간 돌팔매가 날아와서 의식세계가 찢겨져버린 듯 당혹스럽고 화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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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그런 기분인데 그보다 인적 없는 곳에 여자가, 그것도 이런 시골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도시풍의 젊은 여자가 세련된 양장 차림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영광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여자는 영광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바위 옆을 지나갔는데, 그러니까 영광이 앉은 언덕 밑 바로 옆에 강으로 내려오는 좁은 길이 있었던 것이다. 흰빛 보랏빛의 과꽃을 예브게 묶은 꽃다발을 여자는 들고 있었다. 천천히 물가까지 간 그는 무슨 말인지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강물을 향해 꽃다발을 휙! 던지고 다시 누군가를 애절하게 부르는 것 같은 음성이 들렸다. 이상한 그 행동은 어떤 무속적 의미를 담은 의식같이 느껴졌다. 한밤에 소지를 사르며 천지신명에게 소망을 고하는 소복의 여인과도 같은 엄숙하고 신비스러우며 절실한 염원을 느끼게 하는 모습, 어느 덧 여자는 망부석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고 말도 없었다. 강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옷자락을 휘날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영광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인기척을 내자니 이미 시기를 놓쳤고 또 인기척을 낼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영광은 시간 속에 밀폐된 것 같았다. 결박을 당한 것 같았다.
 여자는 몸을 굽히며 앉았다. 엎드려서 두 손에 물을 걷어올리며 얼굴을 씻는다. 아마 그는 울었던 모양이다. 꽤 오랜 시간 얼굴을 씻는 뒤 머리를 묶은 손수건을 풀었다. 소담스런 머리칼이 양 어깨위에 물결칟읏 흔들렸다. 얼굴을 닦고 일어선 그는 손수건을 펴서 비쳐보고 두세 번 털더니 다시 접어서 흩어진 머리를 모아 묶는다. 영광의 가슴은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이제는 현장을 들키는 순서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남의 은밀한 행동을 지켜보게 된 무례한 사내로서, 어느덧 영광은 가해자 입장이 되어 있었다.
 여자는 돌아섰다. 고개를 숙이고 몇 발짝 걷다가 얼굴을 들었다. 순간 영광의 눈과 영자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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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연실색하여 멍해 있던 여자 얼굴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격렬한 분노의 눈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영광의 옆을 스쳐갈 때 그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영광은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영자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양현이었다. 최양현, 아니 이양현이었다. 환국이와 함께 서울서 내려왔으나 따로 볼일이 있어 진주에 머물렀던 양현은 환국이보다 하루 늦게, 어제 평사리에 도착했던 것이다.
 ‘봉변도 보통 봉변이 아니구나.’
 분노의 눈동자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목례를 하고 갔는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만한 나이의 젊은 여자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옆을 지나가는 것을 용서하라, 실례한다, 그런 뜻의 소위 교양을 나타낸 것이었을까. 무례한 사내에게 예절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 어느편이든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무례한 정도가 아니라 여자의 은밀한 행동을 지켜본 치한 취급을 당한대도 별도리가 없었다.
 ‘이럴 경우를 두고 꼬지는 타고 고기는 설다 하는가? 아니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이 수 없다 하는 편이 들어맞겠구나. 허 참.’
 한 마리 현란한 새가 날아왔다가 떠난 자리처럼 풍경은 본시로 돌아갔다. 영광의 마음도 본시로 돌아갔다. 바위에 죽치고 앉아서 그는 다시 혜숙이 생각을 한다.
 ‘결혼을 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미고 어머니랑 함께 살아본다? 무엇이든 일정한 직업이 있어야겠지. 장사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부탁하면 환국이 아버님께서 도와주실 거구. 양품점? 문방구? 아니 책방, 레코드 가게는 어떨까? 자본금은 얼마나 들까? 혜숙이 양재점을 하니까 최소한도의 생활은 보장이 돼 있는 거구.’
하다가 영광은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미친놈, 어떻게 하면 최소한도의 나를 깎아주고 최소한도 주변을 조용하게 할까 궁리하는 좀생이 같은 놈! 네놈이 그 생활에 견딜 것 같으냐? 일 벌여놓고 밤낮 도망갈 궁리만 할 게 뻔한데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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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잠꼬대 같은 생각을 하누.’
 다시 자기 자신한테 심한 혐오를 느낀다. 영선네는 자식들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그 결심을 굽힐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영광이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왜 그같은 생각을 해보는지. 말하자면 일종의 모형이었다. 모형이나마 만들어보면서 자신의 반윤리적 의식을 엄폐하려는 자기 기만, 영광은 자신의 그 심보가 한심스럽고 슬펐다.
 담배를 붙여 물고 엉덩이를 털면서 영광은 일어섰다.
 물가까지 가서 강물을 따라 걷는다. 강물은 포구를 향해 흐르고 영광은 흐름을 거슬러 걷는다. 물결이 다가오고 밀려갔으며 축축히 젖은 고운 모래를 밟는 발이 무거웠다. 발자국을 남기면 물결이 와서 지워버리곤 한다. 보랏빛 흰빛의 과꽃을 묶은 꽃다발이 지금 어디메쯤 떠내려가고 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과 동시 영광은 자신의 장례식을 눈앞에 본 듯한 환각에 빠진다.
 ‘방금 본 여자가 어쩌면 현실의 사람이 아니고 환상이었을까? 아니 죽음의 여신이었을까? 그것은 현란한 저승의 새였는지 모른다. 한발짝 한발짝 이렇게 내가 걷고 있는데 ㄱ자로 꺾으면 저 푸른 강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강심을 향해 걷다가 드러누우면 영원히 잠들 것이다.’
 졸음같이 달콤한 죽음의 유혹이 또다시 영광에게 스며들었다. 소년 시절에 겪었던 죽음에 대한 센티멘털, 그 미숙한 동경에 삼십 장년이 휘청거린다. 아무 희망도 없었다. 정열과 그리움도 없었다. 세월에 바래어지고 마모된 것 같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초라한 모습에서 느낀 것은 슬픔이나 애달픔보다 세월의 찬바람이었고 움츠려지는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뼛가루를 강물에 흩뿌리고 뱃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지만 그 순간이 었을 뿐, 모든 것은 슬픔조차 남기지 않았고 마음은 사막이 되고 말았다. 어린 조카들의 눈망울만이 한방울 이슬같이 가슴에 남아있을 뿐.
 ‘세상에 나와서 뭘 했으며 뭘 알았는가. 별로 한 일이 없고 깨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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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없고 날건달이지 뭐.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것과 끝난다는 것, 아버지처럼 백골이 되어 강물에 뿌려지고 그리고 사라져버린다는 것, ……확실하지, 그것만은 확실해. 통속 시인 사이조 야소가 뭐랬지? 장려한 장례?장려한 죽음의 행렬? 그런 시구절이 있었던가? 에에라 순 날도둑놈! 긴란돈스(금실과 비단실로 짠 직물)를 걸친 막대기 같은 얘기다. 죽음은 현란한 환상의 새도, 장려한 행렬도 아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만장도 아니며 꽃상여도 아니다. 슬픈 상두가도 아니다. 다만 초라할 뿐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살아 잇는 모든 것,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죽음은 다만 초라할 뿐이다.’
 초라하다 했으나 실상 영광은 장려한 행렬과도 같은, 현란한 환상의 새와도 같은 죽음의 그 짙푸른 색채에 쫓기듯 맞이하듯 평사리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계속 걷고 있었으며 마을과의 거리는 차츰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강을 따라서 곧장 걸어가노라면 아까 내가 나루터에서 떠나온 화개라는 마을에 당도하겠지. 거기 가서 산으로 되돌아간다? 산으로 가면 어머니가 몹시도 낯설어하며 계실 것이다. 거미같이 여윈 어머니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엷은 가슴, 가랑잎같이 된 그 엷은 가슴으로 나는 돌아가야 한다. 그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없이 회전하고 또 회전했던 심경에 비쳐진 상황중에서 가장 강렬하고 충돌적인 감정이었다.
 ‘어머니랑 함께 세상을 등지고 산다, 얼마나 좋은가. 평생 세상과 등지고 싶어했던 어머니, 밤낮 달아나는 꿈을 꾸었던 나. 조그마한 초막을 짓고 나무꾼으로 살아본다, c을 굽고 약초를 캐며 살아본다, 영을 넘나들며 산짐승을 잡으며 살알본다, 아아 그 자유는 얼마나 싱그러운 것이냐.’
 그러나 영광은 얼마 가지 않아서 방향을 바꾸었다. 강언덕을 향해 달음박질쳤으며 강언덕에 올라선 그는 평사리 마을을 향해 급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마치 생각의 허울을 훌랑 벗어버린 듯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을 어귀에 들어섰을 때 위풍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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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와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곽과도 같은 그 집을 바라보며 영광은 마을 길로 접어들었다. 자전거를 탄 사내가 그의 옆을 지나갔다. 사내는 자전거를 타고 앞서가면서 몇 번인가 돌아보았다. 음험한 눈빛이었다. 도전적인 표정이었다. 그는 단꾸바지에 카키색 군민복 윗도리를 입고 있었는데 행색에 밀단 관서의 직원 같았다.
 기와집 가까이까지 갔을 때 길은 오르막이었고 대문간에 이르기까지 길 양편에는 보릿빛 흰빛, 그리고 분홍빛의 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
 걷다 말고 영광은 꽃을 내려다본다. 벌들이 닝닝거리고 있었다.
 ‘그 꽃다발엔 분홍꽃이 없었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선 영광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현란한 저승의 새인지 모른다고 생각한 환상의 여자가 등을 보이고 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주본 자리에서 낚시도구를 챙기고 있던 윤국이 얼굴을 들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형!”
 외침과 함께 양현이 돌아보았다. 양현과 영광은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쩔쩔맬 뿐이다. 윤국은 의아해하며 당황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웬일이오? 형.”
 했으나 아까보다 윤국의 어세는 처져 있었다.
 “오래간만이구나. 몇 해 만이야?”
 윤국이 묻는 말에는 대꾸 없이 딴전을 폈다.
 “이삼 년 됐지요. 형은 악극단에 그냥 계세요?” 
 “응.”
 “작곡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조금.”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윤국의 물음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는 물음과 혹 양현과는 아는 사이가 아니냐는 물음이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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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되어 있었다.
 “좀 그럴 일이 있었다.”
 영광이 역시 모호하긴 했으나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한 대답이었다. 윤국의 표정에 의혹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양현아, 사랑에 가서 손님 오셨다고 형님보고 말해.”
 약간 신경질적이다.
 “알았어, 오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양현은 도망치듯 급히 사랑으로 달려간다. 영광은 마루에 가서 걸터앉으며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그는 웃음이 터질 것만 같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 이들 형제에게 누이동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했으나 그러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호보니 멀쩡한 이 집의 딸을 두고 비현실적 상상을 했던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윤국은 영광이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유해를 가지고 지리산 절에까지 왔다가.”
 “유해라니요!”
 “일 단 보고 가는 길에 들른 거야. 환국이하고 약속도 있고 해서.”
 영광의 어투는 딱딱했다. 이들 누이동생인 것이 밝혀져 꽃다발을 던진 여자에 대한 망상은 깨어졌으나 그의 이상한 행동을 생각하니 쉽게 발설할 수 없었고 그 일은 양현이라 하는 여자의 형편 따라 그쪽에서 밝힐 일이라 생각했으며 놀라고 당황한 자기 태도에 대한 해명을 못하니까 자연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아버지께서.”
 “세상 떴어.”
 “그렇게 됐군요.”
 윤국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릴 적에 집에 드나들던 송관수를 윤국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것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 만주서……”
 하다가 말을 끝맺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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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모습이 말이 아니오.”
 “……”
 “상심이 컸겠소.”
 애도하는 마음은 깊었지만 석연찮은 기분은 남는다.
 “어떻게 그리 됐어요?”
 “호열자로.”
 “더 사셔야 했는데, 뭐라 할말이 없군요.”
 “왔어?”
 환국이 나타났다. 영광은 담뱃재를 떨며 일어섰다.
 “고생 많았지?”
  환국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며 영광은 희미하게 웃었다.
 “다 그런 거지 뭐.”
 “행색이 말이 아니군. 어머님께서는 건강이 어떠신지 걱정이군나.”
 양현은 환국이 등뒤에 숨듯 서 있었다.
 “비교적 잘 견디시는 것 같더군.”
 “들어가자. 가서 자세한 얘기 듣기로 하고.”
 환국은 영광의 등을 밀었다. 두 사람은 사랑으로 들어갔다.
 “오빠 저 사람 누구예요? 이상한 사람이네.”
 양현이 숨가쁘게 물었다.
 “이상한 사람? 어째서?”
 “글쎄, 하여간 이상해요.”
 “다리가 그래서?”
 “다리도 좀 이상하긴 해요.”
 “왜놈들한테 뚜딜게 맞아서 뿌러졌던 거야.”
 “아까 강가에서 보았어요.”
 “강가에서?”
 “바위에 앉아 있었어요. 마치 돌부처같이 말예요.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래? 해서 두 사람이 당황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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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윤국은 양현이 혼자 강가에 가는 이유를 알고 있엇다. 꽃다발을 만들어 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양현이도 식구들에게 구태여 비밀로 하고 있지는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았다뿐이지.
 “한데 그 사람 누구지요?”
 “형 친구야. 동경 있을 때 만난 친구.”
 의혹을 푼 윤국은 가볍게 말했다.
 “양현이 너 안 갈래? 낚시하러 가자.”
 “싫어요. 햇볕이 따가워서요. 작년에 오빠 따라 다니다가 얼굴 껍질이 다 벗겨지고 혼났는데.”
 지금은 양현이 빛이라면 강가에서의 양현은 그늘이라 할까.
 “엄살 부리지 마.”
 “엄살 아니에요. 정말 그랬단 말예요. 어머니가 야단치시던데, 어딜 쏘다녀 얼굴이 그 모양이냐구.”
 “고명딸 시집 못 갈까봐서?”
 “오빠두 참, 나 시집 같은 것 안 가아.”
 “두고보자, 가는가 안 가는가.”
 “남 얘기 말구 오빠 걱정이나 하세요. 가고 싶어도 오빠 땜에 못가요.”
 “나 땜에? 왜.”
 윤국은 양현을 쳐다본다.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하지만 나 시집 안 가요.”
 “혼자 살 거야?”
 “어머니하고 살지요.”
 “저러니 이 집의 며느리가 점술 못 따지.”
 “치이.”
 “그럼 어디 설설 나가볼까?”
 윤국이는 낚시 도구를 들고 나가려다가 돌아보았다.
 “양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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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요?”
 “사랑에 차라도 내가.”
 “나, 민망해서 어떡허지?”
 “건이엄마 시키지 말고 너가 해. 형한텐 소중한 손님이야.”
 “알았어요.”
 윤국은 집을 나섰다. 그는 환국이만큼 영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 경음악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자 문제도 있어서 건전치 못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무시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언젠가 그는 환국이를 보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영광이 그 형, 지적 콤플렉스가 있었다면 결코 형하고 친해지지는 않았을 거요.”
 그것은 영광을 인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형의 감성에는 우리하고 전혀 다른 게 있는 것 같아. 그로테스크하다 할까.”
했을 때 환국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너 영광이 혈통에 대한 선입관에서 하는 말 아니냐?”
 “형! 나 그런 것 없어. 정말이오. 언젠가 영광형이 베르드랑의『밤의 가스파르』를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영광형한테서 느낀 그 묘한 것이 규명된 듯싶었단 말이오.”
 “이른바 그로테스크냐? 그게.”
 “물론 그것만은 아니지. 환상적인 면도 있지만 악마적이고 괴기적인 것도 사실이잖아.”
 “나도 한때는 베르드랑에 끌린 적이 있었다. 시심으로 그리며 화심으로 시를 쓴다는 그의 예술세계는 일단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어. 일본에서도 히나쓰 고노스케를 위시하여 고답파 시인들이 베르드랑을 많이 모방했다. 물론 속빈 껍데기였지만. 영광의 경우도 옛날에 베르드랑을 한번 통과해본 것뿐인데 하필 넌 너 자신이 부정하는 면만 들추어 영광을 거기다 끼워보는 것은 경우에 따라 악의적이라 할 수도 있어. 영광의 성장과정에 대한 편견이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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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형,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싫어. 그것에 무슨 생명이 있어. 청동의 시체 같은 것.”
 “그건 얘기가 다르지 않아. 나도 영과이도 좋다 하진 않았다.”
 “영광형은 한때 경도됐었다는 말을 했어.”
 “한때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일이며 그래서 통과라 했다. 나 역시 통과했고.”
 “형은 지나치게 영광형을 옹호하는 것 같아요.”
 “너는 지나치게 사실로 보고 있어.”
 베르드랑은 19세기 프랑스 파르나시앵에 속하는 시인이며 그의 댄디즘과 환상적 악마 취미는 보들레르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람이다. 『밤의 가스파르』는 그의 유일한 시집이다.
 ‘선입간 때문이라 해도 그렇다. 그의 배경의 칼과 피를 연상하기 때문에 그렇다 해도 역시 나는 그 형에게서 전해지는 악마 취향, 그게 허무주의와 상통한 것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그것을 부정 못하겠다.’
 윤국은 마을길로 들어서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낚시하러 갑니까?”
 남자치고는 좀 높은 음성의 사내가 자전거를 끌며 윤국이 옆에 바싹 다가섰다.
 “아아.”
 윤국은 그를 외면하며 내키지 않아 했다. 상대도 이미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눈을 내리깔며 곁눈질을 했다. 아까 영광을 음험한 눈으로 돌아보고 하며 자전거를 타고 가던 그 사내다.
 “비가 좀 와야지, 그래야 낚시질도 할 만하지요.”
 “……”
 “학교 졸업은 아직 멀었습니까?”
 윤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싸움 끝에 낫에 찔려 죽은 우서방 둘째아들이었다. 전 같으면 먼 발치에서 인사나 하고 지나갔을 것인데 친숙한 체 얘기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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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오는 데는 그럴 만한 그 나름이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은 우서방의 셋째아들 재동이 작년 가을, 자원병으로 나가게 되면서 둘째 개동이가 면소 서기로 취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유세를 부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씨 집안에 대해서조차 무슨 감시병이나 된 것처럼 당당해진 것이다. 우서방 일가는 조상 대대로 평사리에 살았던 농사꾼은 아니었다. 조준구가 최참판댁 살림을 통째 들어먹은 후, 군대 해산이 있었던 그해 평사리에서는 마을 장정들이 들고 일어났고 김훈장과 목수 윤보를 따라 산으로 들어가는 등, 마을 전체가 큰 변동을 겪었을 무렵, 슬그머니 흘러들어온 뜨내기가 우서방 일가였떤 것이다. 해서 마을 사람과 최참판댁의 인습적인 주종 관계에서는 비켜선 처지이기는 했다.
 “면소말고 주재소 순사라도 됐이믄 사람을 잡아도 몇은 잡았일 기다. 세상에 사람 영악한 것겉이 무서븐 기이 어디 있노. 그 악종들은 건디리지 않는 게 상수라.”
 “엽이네 처지가 기막히제. 까막소에서 나온 오서방이사 진작 식솔데리고 떠낫이니 빌어묵든 얻어묵든 다리 뻗고 자끼다마는.”
 “떠나고 싶어 떠났나아? 우가놈의 식구들, 밤낮없이 직이겄다고 굿을 치는데 견딜 재간 있든가? 그 억울한 사정, 다 말 못하지. 적반하장이라 카더마는 우가놈이 오서방 직이겄다, 낫을 들고 나왔는데 그라믄 가만히 앉아서 당하겄나? 안 죽을라고 실갱이를 하다보이, 그리 된 긴데 전생에 무신 원수가 졌일꼬.”
 “오서방이사 당사자니께 그렇다치더라도 엽이네가 무신 할 짓인고. 본 대로 증언하지 그라믄 저거들 원하는 대로 거짓말 해서 오서방을 죽게 하겄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운수불길이지. 말도 마라. 일일이 말할라 카믄 해질 기다마는 콩밭에 소를 몰아놓질 않나, 울타리를 걷어차서 망가뜨리질 않나, 앵구 목을 짤라 마당에 던져넣질 않나, 만나기만 하믄 증언 잘못해서 원수놈이 살아서 까막소 나왔다, 퍼붓고 시비 걸고.”
 “퍼붓기만 함사,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악담은 어쩌고, 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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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기조차 무서븐 말, 아이구 그런 소리 들은 날이믄 밤의 꿈자리도 시끄럽다카이.”
 “엽이네 심장이 질기서 산다.”
 “심장이 질기서 사나? 낭개도 돌에도 못 대니께 사는 기지.”
 “어지간해야 동네서 몰아내지. 그랬다가는 그놈의 식구들 동네 사람 몰살시킬라고 할 기구마. 그나마 이자는 왜놈한테 붙어서 재동이놈은 병정 가고 개동이놈은 면소 서기 되고, 날개를 얻은 기라.”
 “최참판댁에서도 이자는 다스릴 힘이 없어이.” 
 “무신 소리 하노? 어림도 없다. 벌써 상투 끝에 앉아서 쥐락펴락, 최씨집도 멀지 않았다고 큰소리 탕탕 치는 판국인데.”
 수쉬하면서도 몰래 하는 마을 사람들 말이었다.
 둘째 개동은 끝내 윤국이 말이 없자 침을 탁 뱉고는 자전거에 올라 타고 가버린다.
 “죽일놈!”
 윤국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강가로 내려간 그는 낚싯줄을 드리워놓고 고기 잡는 일보다 생각에 빠져든다.
 “그놈 꼴 보기 싫어 이제는 평사리에 못 오겠다. 오늘은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다.”
 윤국은 개동이 행투에도 화가 났지만 영광을 맞이하고 자신이 행한 태도나 심리 상태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영광과 양현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왜 그렇게 심사가 올곧지 않았는지, 거의 이성을 잃을 뻔했던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그들이 몰래 만나기라도 한 것 같은 성급한 판단은 대체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비약이었던 것이다. 양현이 영광을 강가에서 만났다 했을 때, 이상한 사람이라 했을 때 비로소 마음을 놓았고 마음이 가벼워졌던 것 역시 지금 생각하면 수치감이 솟는다. 심리적으로 영광을 양수로 본 것이며 양현을 미녀로 본 것도 이 무슨 속단인가. 어쨌거나 윤국은 여태껏 경험한 일이 없는 깊은 갈등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러나 그것을 규명하는 것이 두려웠다. 오라비로서의 보호본능인가, 양현을 누이동생이기보다 여자로서, 잠재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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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있었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윤꾸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창백해졌다가, 하늘과 강물이 마주보는 공간에 앉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운 존재로 느껴진다.
 “내일 양현이하고 하동에 가야지.”
 윤국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어머니의 이상한 변화였다. 벌써 오래전부터 양현의 이복 오라비 이시우가 요청해온 일이 있었다. 양현을 이씨 호적에다 입적시키겠다는 요청이었다. 의전을 나온 시우는 현재 진주 도립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사실을 안 이상 핏줄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주장이었고 그의 모친도 전적으로 아들과 의견이 같았다. 그러나 최서희는 단호히 그것을 거절했던 것이다. 이유는 양현의 장래를 위해서, 그렇게 문제를 끌고 왔는데 별안간 최서희는 표변했던 것이다.
 이씨집의 요청을 받아들여 양현의 호적을 옮긴 것이다. 최양현에서 이양현이 된 것이다.
 ‘어머니 심경이 변하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그렇게 갑자기 단을 내리신 걸까?’
 양현의 문제라면 당연히 아들과 상의도 했어야 했는데 일절 그런 일이 없었고 그 일에 대해서는 환국이도 의아해했다. 길상에게는 상의를 했는지 전적으로 동의한 것 같았다. 양현에 대한 애착을 알고 있는 환국이나 윤국은 그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서희가 응하지 않는 이상 이씨 집안에서도 양가의 길고긴 인연을 생각하면 강경하게 나올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 고기 몇 마리를 낚아들고 윤국은 나갈 때와는 달리 몹시 초췌한 모스으로 돌아왔다. 양현이 잡아온 고기를 들여다보며 어쩌구 저쩌구 지껄였지만 윤국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많이 못 잡았십니다.”
 건이아비가 고기를 가져가면서 말했다.
 “아가씨 저녁은 사람으로 차려갈까요.”
 언년이, 그러니까 건이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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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어떻게 해요?”
 양현은 윤국에게 물었다.
 “안채에서 함께 먹지 뭐. 그리고 건이엄마 저녁은 좀 천천히 해요.”
 “알았습니다.”
 환국과 영광의 얘기가 대강 다 된 것으로 짐작한 윤국이는 사랑으로 가서 그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다시 정식으로 영광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러고 나서
 “형, 형은 앞으로도 경음악을 계속할 겁니까.”
 불쑥 물었다.
 “내 하는 일이 밤낮 그렇지 뭐. 장담할 일이 뭐 있겠나. 세상을 핑계삼는 것 같지만 요즘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뭘까?”
 “왜 형은 보다 나은 길을 놔두고 그리로 갔습니까.”
 윤국은 영광에게 그런 식으로 단도직입적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보다 나은 길이 뭘까……”
 “형은 본래 문학을 하려 했지 않았어.”
 “문학…… 글쎄 그것을 설명하려면 철학적으로 하하핫핫…… 개똥철학이지만 말이야. 그보다 안 하는 이율 생각해본 일은 없지만 아마 샘이 말라버린 때문이 아닐까?”
 영광의 표정이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너그러웠다. 홍이를 대했을 때와는 딴판으로, 강가를 헤맬 때와도 딴판으로 평화스러움, 무장을 해제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감성 문제를 말하는 건가요?”
 윤국의 말에 환국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의 그로테스크가 나오면 어쩌냐 싶었떤 것이다.
 “감성 문제뿐이겠나.”
 “내일 하동에 갈 건가?”
 화제를 꺾듯 환국은 윤국에게 물었다.
 “왜요? 형은 안 갈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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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영광이하고 등산하기로 했다.”
 “그럼 양현이하고 저만 갔다오지요 뭐. 시우형도 없는데.”
 “양현이는 그쪽에서 묵게 되더라도 넌 당이로 돌아와야 해.”
 “알고 있어요.”
 “넌 서울에 들르지 않고 바로 갈 거냐?”
 “형님은 언제 돌아가시게요.”
 “온 김에 스케치나 좀 할 생각이다. 서울서는 답답하고, 그림이 안돼.”
 “그까짓 하교 때리치우고 그림에 전념하세요.”
 “……”
 “영광형도 그렇고 모두 답답합니다.”
 “너는 안 답답하구?”
 “하긴 그렇군요.”
 윤국은 픽 웃었다.
 “형님 서울 가실 때 저도 함께 가지요.”
 윤국은 덧붙여 말했다.
 “자네도 여기서 머물다가 우리랑 함께 서울 가자.”
 환국이 영광을 보고 말했다.
 “글쎄……”
 “시골 바람이 필요한 꼴들이야. 세상일 좀 잊고.”
 “생각해보구.”
 “그런데 형.”
 불러놓고 윤국은 마른기침을 했다.
 “거 우개동이라는 그자 알아요?”
 “아비가 낫에 찔려 죽은 그 집 아들 아닌가. 막내가 자원병으로 나갔다며?”
 “맞아요.”
 “그 얘기는 왜.”
 “아까 길에서 만났는데…… 행패가 심한 모양입니다. 상당히 마을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얘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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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이엄마가 그런 얘길 하더군.”
 “들어낼 수도 없고 골칫거리요.”
 “우리 들어내려 할 텐데 그 자를 들어내?”
 “악종도 보통 악종이 아니랍니다. 아들 삼형제와 그 어미까지.”
 “견디야지. 모든 것을 다 견뎌야 해. 이 마을뿐이겠나? 물밑에 가라앉은 것처럼, 자칫 잘못하면 영광이 저 다리꼴이 된다. 얻은 것은 없고 잃었을 뿐이지.”
 영광은 쓰게 웃었다.
 하룻밤을 이야기로 지새운 환국과 영광은 또 일찌감치 일어나 모두 함께 둘러앉아 조반을 끝낸 뒤 등산한다며 집을 떠났고 윤국은 양현을 데리고 나룻배에 올랐다. 뱃손님은 서너 명 가량, 남정네 들이었다. 낯이 익은 뱃사공이 윤국과 양현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사각모를 쓰고 제복 차림의 준수한 청년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양현 모습에 얼이 빠졌는지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남정네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윤국은 이런 처지에 부딪칠 때마다 괴로웠다. 죄의식과 자신이 도둑놈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멍하니 하늘가를 바라본다.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강물로 시선을 옮긴다. 흐린 탓인지 강물마저 우중충했다.
 “하마 한줄기 퍼붓겄네.”
 남정네들 중에 누군가가 말했으나, 그러고는 아무도 말을 잇지 않았다. 윤국은 양현을 흘끗 쳐다본다. 쓸쓸해 보였다. 낙엽이 다 떨어진 가지에 홀로 앉은 새처럼 양현은 외로워 보였다. 하동으로 갈 때마다 양현의 표정은 늘 그랬다. 어제 낚시질 갔다가 돌아온 후로는 내내 무뚝뚝했고 말이 없었던 윤국이 말을 걸었다.
 “가방에 뭐가 들었어?”
 발치에 놓인 가방을 내려다본다. 자신이 들고 왔고 별로 무겁지 않던 양현의 가방이었다.
 “갈아입을 옷하구 어머니, 또 진주 새언니가 전하라고 주신 것이 들어 있어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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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벼워서.”
 “어머니, 또 진주 새언니가 주신 게 옷감인가 봐요. 그보다 오빠.”
 “……”
 “비 오시면 어떻게 해? 등산한 큰오빠 말예요.”
 “등산은 무슨 놈의 등산, 가다가 주막에 들러 술이나 마시고 있겠지. 아니면 절에 갔거나.”
 “그럴까?”
 “이부사댁 민우가 와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양현은 이복오라비 민우가 남해 작은집에라도 가고 없었으면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동경서 만나지 않았어요?”
 “가끔 만나기는 했지.”
 이상현의 둘째아들 민우는 경성제대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지고 이듬해 경의전에서도 시험에 떨어졌다. 집안 사람들은 형인 시우 못지않게 머리가 좋고 열심히 공부도 했는데 학마가 들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두 번이나 고배를 마신 민우본인도 그랬지만 모친 박씨도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든지, 그러길 원했으나 시우가 우겨서 동경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는 현재 사립인 법정전문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시우는 일찍부터 양자로 간 숙부와 외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학업을 마친 뒤 진주 도립병원에서 일하고 잇엇으며 결혼도 했다.
 민우는 심성이 괜찮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을 하고 동경 바닥에서 보잘것없는 사립전문학교에 적을 두면서부터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최씨네 형제들에게, 심지어 여의전을 다니는 양현에게까지 그는 열등의 비애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민우가 심한 충격을 받은 것은 양현이가 자신의 이복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였다. 한번은 동경서 술에 만취가 되어 윤국의 하숙방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남들은 대학 한도 못 가는데 형은 대학을 두 개나 다니고, 팔자치고는 상팔자요. 무슨 놈의 학운이 그리도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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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많이 했군.”
 “네. 술 진탕 마셨소. 동경 하늘이 돈짝만 합니다.”
 “기분 좋게 마신 술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래?”
 “동경서 기분 좋게 술 마실 조선놈의 새끼가 있을까요? 있다면 그건 돈 쓰고 기집애 사귀는 재미로 유학 온 졸부 집구석 놈팽이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내 말 틀렸습니까? 형님!”
 “맞다.”
 “공부 방해됩니까?”
 “공부, 공부 하지 마. 나 공부벌레 아니야.”
 “일류 농과대학을 마치고 또 경제과에 들어갔는데 공부, 공부, 공부벌레 아니라 말할 수 없지요. 아무리 세상이 다 알아주는 천재기로서니.”
 “사람 민망하게 하네. 비꼬는 것도 정도껏 해라. 출세도 못하는 학문에 무슨 의미가 있어서 공부벌레가 되누. 부잣집 아들, 놈팽이가 안 될려면 공부라도 해야지. 놀고먹을 순 없잖은가. 그는 그렇고 자네는 뭣 땜네 화풀이 술을 마셨나.”
 “이유야 어디 한두 가지겠소?가련하고 불쌍한 조선 민족을 위하여 화풀이 술밖에 마실 수 없는 그놈의 지성들이 친일해서 땅마지기 생기고 친일해서 이권 나부랭이 따내고 그 따위 매국노와 한푼 다를 게 없다는 뜻에서도 술 마셨고.”
하다가 민우는 트림을 했다.
 “과연 이놈의 돌대가리, 형의 호주머니 축내가면서 공부를 계속할 필요가 있겠는가, 해서 술 마셨고, 처자를 내동댕이친 채 평생을 자신의 자유를 찾아 방랑하는 내 부친 말이오, 얼굴도 모르는 그 양반의 그 배신과 기만을 씹으며 술을 마셨고, 철저하게 속았소. 세상 떠난 억쇠할아범한테 속았고 어머님한테 속았어요. 밤이면 밤마다, 삯바느질로 지새며 한숨 쉬던 어머님의 세월, 상전이 뭐길래 뼈를 깎고 살을 저미듯, 백발이 되고 허리가 꼬부러질 때까지 봉사한 억쇠할아범, 유월이할멈, 도대체 그분들 희생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 형제가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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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그 거짓의 지릿대 때문이었소. 할아버님처럼 아버님도 나라를 위해 큰일 하신다, 하하핫핫 하하핫…… 그 큰일이 알고 보니 방탕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아버님 나름으로 고민도 하셨겠지. 글을 쓰셨잖았나.”
 “형도 생각 밖으로 속물이군요. 소설 나부랭이, 기생하고 연애하는 그 따윗 걸 썼다 해서 주색잡기는 이해하라 그 말씀이시오?”
 윤국은 할말이 없었다. 그러나 감히 말한다.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지고선은 아니지 않는가.”
 “형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사는 것만이 지고선이라 하지 않았소. 그것이 과정되고 분식 될 때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곤 했어요.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고 목적도 다르다, 그걸 모르는, 그렇게 순진한 이민우도 아닙니다. 하지만 묻겠는데요, 내 부친의 생애가 그럼 지고선에 속하는 건가요?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인가요?”
 민우는 억지를 썼지만 윤국은 할말이 없었다.
 “사나이의 풍류로서 기생과의 로맨스,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딸애도 낳을 수 있는 일이지요.”
 “듣기 거북하군.”
 “내 말이 뭐 틀렸습니까? 다만, 그렇지요, 다만 내가 분노를 느끼는 것은 늑대 울부짖는 벌판에 처자식을 내동댕이치고 떠난 사람, 형은 모를 겁니다. 가난이 어떤 것인지를, 겉은 멀쩡하면서 속으론 찬바람 굶주림에 웅크려야 했던 우리들 세월을 모를 거요. 평생을 외가의 도움, 넉넉지 못한 숙부의 도움으로 연명했던 우리들 심적 고통…… 무책임하게 비정하게 내버리고 간 부친의 목적이 무엇이며 가치관은 무엇이냐, 새삼스럽게 그걸 따지자는 건 아니오.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면에선 모질고 강한 거지요. 하면은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또 뭡니까? 기생과 동서했고 기집애까지 낳았으면.”
 민우의 어세가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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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도 독립운동하기 위해 내동댕이치고 간 건가요? 여자는 물에 빠져죽고 딸애는……”
하다가 민우는 웃었다. 숨이 막히게 웃었다.
 “배다른 누이인 줄도 모르고, 마, 만일 내가 양현이를 사랑했다면 어쩔 뻔했어요?”
 “입 닥쳐! 그 따위 모독적인 얘기 입에 담는 것 아니야!”
 “형! 그게 내 잘못이오?”
 “그런 말 하는 너 자체, 부친을 비난할 자격 없다. 누이로 순수하게 인정하는 것 이외 내 앞에서 다른 말 하지 마! 그애한테 상처주는 말 두 번 다시 했따 봐라, 가만 두지 않겠다!”
 민우는 순간 풀이 죽었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얘기죠 뭐.”
 나루터에서 내린 윤국과 양현은 읍내로 들어갔다. 장날이 아니어서 빈 장터는 썰렁했다. 비가 쏟아질 듯, 쏟아질 듯 하늘이 내려앉았으나 비는 아직 내리지 않고 목덜미에 땀이 배어날 만큼 날씨는 무더웠다.
 “오빠.”
 “음.”
 “오늘 갈 거예요?”
 “그래.”
 “나는 어떻게 해?”
 “이삼 일 묵었다 와야지.”
 “이삼 일…… 힘들어요 오빠.”
 “……”
 “낯설어서 어려워요.”
 “초행도 아닌데 뭘 그래.”
 “초행이 아닌데…… 그래도 그래요.”
 “누가 언짢게 대하든? 환영하지 않는다면 안 가도 돼.”
 윤국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쪽에서 원한 일 아니야. 정 그렇다면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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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그게 아니에요. 민우오빠가 날 미워하나 봐요.”
 “그건 부친에 대한 감정 때문이다.”
 “민우오빠말고는 다 잘해주셔요.”
 “당연하지. 호적 옮겨달라고 강경하게 말한 사람이 누군데? 기죽을 것 없다. 가고 안 가는 것ㅇ 아무도 너에게 강요할 사람 없어.” 했으나 윤국은 양현이 애처러웠다. 어떤 뜻에선 이부사댁 그 자체가 양현에게는 상처였기 때문이다.
 양현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땀을 흘려서 그런지 얼굴은 더 희고 맑았다.
 “양현아.”
 얼굴을 돌려 윤국이를 쳐다본다.
 “이제부터는 견디는 힘을 좀 길러야겠다. 너 말이야.”
 “알아요.”
 “다 컸고 넌 이미 성인이다. 앞으로 수많은 일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험하고 각박하다. 사람들의 관계도 저마다 복잡하고, 복잡하지 않는 경우란 드물어.”
 어린 계집아이한테 타이르듯 한다.
 “오빠.”
 “음.”
 “오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울한 거 아니에요. 실은 말예요, 나같이 행복한 사람 없을 거야.”
 “정말 그리 생각하냐?”
 “응, 오빠, 난 말예요. 오빨 너무 사랑해. 어머니 아버지 큰오빠, 가슴이 찢어질 만큼 사랑해. 내 인생이 지금 끝나도 난 다 누린 거예요. 앞으로 어려운 일에 부닥쳐도 억울하지 않을 거구요. 진심이야.”
 양현의 표정은 환했다. 반대로 윤국의 얼굴은 어두웠다.
 “나 이틀밤만 자고 갈게요.”
 “생각 잘했다. 꽃 같은 기집애.”
 “어어? 그건 어머니 하시는 말인데? 오빤 어릴 적에 종달새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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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쥐야, 곰새끼야 그랬지요?”
 “곰새끼는 형이 말했어.”
 “그랬나?”
 “어서 가자. 남들이 들으면 웃겠다. 어른이 다 된 멀쩡한 것들이.”
 이부사댁에 들어섰을 때 민우는 모시 고의적삼을 입고 마당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왔어?”
 마치 이웃에 사는 아이에게 하듯 양현을 바라보고 나서
 “형, 그 동안 뭘 했어요? 낚시질했구나. 얼굴이 새까만 걸 보니.”
  반갑게 말했다. 부엌어멈 순천댁이 내다보며 인사를 했다.
 “방에 들어가보아. 어머니 계셔.”
 듣기에 따라 어서 내 앞에서 사라지라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인사해야지.”
  윤국이 민우를 뿌리치듯 나서는데 마침 방에서 양현이 온 기척을 알아차린 시우의 모친 밖시가 나왔다.
 “양현이 왔구나. 윤국이도 오구. 어서 올라와.”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고 민우는 마당에 선 채 내려앉을 것만 같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윤국이와 양현이 절을 한다.
 “그래 ,집안은 두루 평안하시고, 부모님께서는 서울 계신다며?”
 “네.”
 하는데 그새를 못 참겠는지 민우는
 “형 우린 밖에 나가지요.”
 했다. 윤국이 엉거주춤하니까
 “모자하고 양복 윗도린 벗어놓고.”
  몹시 서둔다.     
  “그럴까?”
 윤국은 저도 모르게 민우가 서두는 데 따라 모자와 윗도리를 벗고 셔츠 바름으로 마루에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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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때까지 돌아오너라.”
 박씨 말에
 “그러지요.”
 대답한 민우는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윤국을 끌고 나간다.
 “순천댁.”
 박씨가 불렀다.
 “예.”
 “점심 준빌 하게.”
 “저거, 도련님 안 오실 거인디.”
 “어째서?”
 순천댁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왜 웃느냐?”
 “술생각 허시든 참에 윤국이도련님이 오셨지라, 그런게로 쉽게 들어오시겄소?”
 “기가 막혀서. 형은 술을 모르는데 그애는 누굴 닮아 그런지 모르겠구나.”
 혀를 찼으나 그럴 나이도 됐다 싶었는지 슬며시 웃는다.
 “그러면 마님허구 애기씨 점심만 헐까요잉?”
 “그래라.”
 박씨는 얼굴을 돌려 양현을 쳐다보면서
 “방학인데 안 내려오나 하고 기다렸지. 공부는 할 만하냐?”
 “힘듭니다.”
 “그럴 게다. 허나 공부 끝마치면 우리 집안에 의사가 둘이 난다. 경사지. 아무쪼록 열심히 해라.”
 “네. 이거.”
 양현은 가방에서 보자기에 싼 것을 꺼내어 박씨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냐?”
 “하나는 서울서 어머니가 주셨고 또 진주 새언니가 드리라구 해서, 옷감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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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이 많은데. 이건 두었다 양현이 출가할 때 쓰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빗방울은 이내 세찬 빗줄기로 변했다. 그리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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