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자다운 게 어딨어 -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
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16년 8월
평점 :
■ 2016. 10. 15 - 《여자다운게 어딨어》_에머 오툴 서평 (★★★★☆)
<여자다운게 어딨어>는 연극학 박사학위를 딴 아일랜드인 에머 오툴의 책이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찾아 다니며 다음 책은 무엇을 읽을까, 하고 고민하던 중 제목에 이끌려 사게 되었다. 여자다운게 어딨냐니? 그렇지. 일단은 동의. 그러나 어디까지가 '여자다운'건지 난 정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제한적인 권리를 받도록 구조화된 이 사회가 '여자다움'을 만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젠더화된 모든 것이 '여자다운' 것인가? 아니면 극단적으로 딱 내 성기까지가 '여자다운'것인가?
원서 제목은 'Girls will be girls'인데, 직역하자면 '여자는 여성이 된다' 정도로 될 수 있겠다. 연극학 박사답게 그는(they) 인생과 젠더의 관계에 대해 연극으로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내가 왜 여성인 '에머 오툴'작가를 <그>라고 표현했으며 영어로는 <they>라고 표현했는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백 번정도 추천한다.
- 페미니즘을 넘어 젠더이론까지
이 책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는 나에게 '페미니즘'과 '젠더퀴어'에 대해 분리를 시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사실 젠더퀴어와 페미니즘은 크게 보면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두 지향점은 미묘하지만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젠더에 대해 아예 무너뜨리는 것과, 젠더이분법은 존재하는 상태에서 여성의 언어로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작가인 에머 오툴은 모든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여자를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가정에서 사회화되면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똑같이 3살배기 남아와 여아가 뛰어다니다 사고를 쳤을 때 듣는 소리부터 다르다. "너는 계집애가 왜이렇게 산만하고 부산스럽니?"
에머 오툴은 이 젠더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자유로워지기 이전까지 매우 '코르셋 꽁꽁 동여 맨'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루 1,000kcal도 안 먹는 나날들이 계속 되었고,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정도로 손목과 손가락은 말라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기어코 연극 (오페라) 도중 그녀는 기절을 하기까지 한다. 탈모가 계속 되고, 생리가 멈추는 등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으나 그렇게 그녀는 사회라는 무대에서 박수받는 '여성'을 연기해 온 것이다.
그녀가 정확히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차차 그녀는 주디스 버틀러의 책을 읽은 이후 남성과 여성의 차이(성간 차이), 그리고 나와 옆에 있는 아주머니의 차이(성내 차이)를 비교해보기 시작했고 사실 성간 차이가 크지 않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남성의 삶은 신체도 남자답게 만드는 것이고, 여성의 삶의 방식이 신체도 여자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갈리아의 딸들>이 생각났다. 움(여성)이 강인하게 자라고 운동을 하며 큰 신체가 더 매력있는 사회인 이갈리아에서는, 여성이 더 장력이 강하며 힘이 세다. 그러나 맨움(남성)들은 타고난 신체적 힘이 어느 정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조차 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살면서 힘을 쓸 기회도 없고, 그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은 곧 그 사람의 인생이 되고, 체형도 만들며, 사고방식도 만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도 만들게 된다.
결국 에머는 자신을 '여성'으로 규정짓지 않고, 스스로는 '성별에 국한짓지 않는 사람' 으로 정의하게 된다. 에머는 에이젠더 (성별이 남성/여성으로 국한되지 않는 젠더. 남성/여성 외의 제 3의 성이라 규정짓는 '뉴트로이스'와는 다르다.) 인 것이다.
- 아비뛰스 (habitus)
논술 공부를 잠시 하던 고3시절, 많이 접했던 단어 중 하나인 '아비투스'에 대한 담론이다. 사람은 마지팬(아몬드, 설탕, 계란 흰자로 만든 부드러운 과자)처럼 가족, 학교, 교육, 문화에 의해 빚어져 아비뛰스라고 이름 붙여진다. 아비뛰스란, 개인들이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와 교류하기 위해 저마다 갖고 있는 지속적인 체계를 말한다.
버릇, 습관을 뜻하는 단어 habit이 이 어원에서 나왔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의 습관, 행동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보여질 수 있는 '취향'까지도, 나는 이 사회 속에서 학습되고 반죽된대로 행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요즘 우리 사회에 횡횡한 문제인 '소녀 감성/로리타 컨셉'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자꾸 미디어, 콘텐츠에서 연예인들이 '소녀'컨셉으로 나오고 로리타 컨셉으로 나오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 와중, '그냥 컨셉일 뿐이다 or 소녀스러운건 나도 좋아하는건데 뭐가 문제냐' 등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에, 나는 90년대 길거리와 연예계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대 특유의 분위기와 스타일 컨셉 관련 유행은 돌고 돈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90년대 길거리에는 여자들이 쭉쭉 뻗은 나팔바지에 배를 훤히 드러낸 크롭티, 그리고 부츠 등 한참 '자유분방한' 모습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또한 눈코입 모두 각자(?) 자기 주장 강한 메이크업을 했다. 보라색 립, 버건디 립, 진하고 어두운 눈화장, 산처럼 솟은 눈썹 등. 그러나 최근 10~20년간 그런 '강한' 컨셉은 촌스럽다는 평가를 받으며 점점 더 화장이 연해져 왔다. 그러나 그 연해진 화장이 화장을 '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였다. 화장을 하되, 화장한 티를 많이 내면 안되고, 화장을 많이 하되, '쎄 보이면' 안된다.
의상 역시 마찬가지다. 90년대의 섹시함이 '당당한 여성의 섹스어필'이었다면, 요즘의 섹시함은 '아무것도 몰라요'의 섹스어필이다. 길게 말했지만, 뭐, 간단히 말하자면 점점 여성적 섹시함의 목표는 수동적인 섹시함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대중들이 모두 어떠한 특정 컨셉을 한 대상을 보고 선호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내 주변에서도 "요새 가수 ㅇㅇㅇ 진짜 예쁘지 않아?" 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사람인 이상 늘 사회 속에 속해있게 되는데 그런 소리를 계속 듣고 학습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화다. 나 조차 무의식적으로 '가수 ㅇㅇㅇ'의 특징과 결부시켜, 그것들은 매력있는 포인트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 자신에의 투영도 하게 된다.
개인으로서 자신이 물론 예전부터 프릴원피스와 양갈래, 연한 화장과 순한 눈썹, 볼터치, 니삭스를 좋아했을 수도 있다. 정말로 유행 전부터 좋아했을 수도 있고, 사회와 별개로 (물론 매우 적은 경우겠지만) 그 컨셉 자체가 너무 좋을 수 있다. 당연히 역코르셋은 좋지 않지만, 어느 정도 인식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추가로, 이건 사견이지만 역 코르셋은 '로리타'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어른들이 먼저 서로서로 씌워도 된다고 생각한다. 피해를 보는 것은 다큰 성인인 우리들이 아니라 교복입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다. 지난 5년 사이 아동성범죄건은 2.4배 증가했으며, 현재 아동인구 비율당 아동성범죄 건 수는 대한민국이 세계1위를 차지하고 있다. 어른들이 먼저, 아동들의 상징물들을 이용해서 성적 코드를 만들고 소비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 성중립적 단어의 사용
아마도 이 이야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드라이브를 가다가 사고가 났고, 아들이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급하게 수술에 들어가야만 했는데, 수술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사가 이 아들을 보더니 자기는 '내 아들이다'라며 수술할 수 없다고 절규했다던 이야기. 어떻게 된 것일까? 라는 이 질문을 처음 접했을 때 나름 퀴어적으로 마인드가 열린 사람들은 '아버지가 게이부부였다'라고 했을 것이며, 혹은 '새아빠와 친아빠일 것이다', 등으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펼쳤을 것이고 젠더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 의사가 여자겠지." 라고 답했을 것이다.
에머도 비슷한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아일랜드에 있는 내 친구가 아이 둘을 키우는데, 볼 때마다 걔의 인내심에 놀라. 아이들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 친구는 매번 지친 기색 없이 설명해주고, 더 알아보라고 격려해주더라고. 완전히 초인이야." 라는 말에 친구가 "와, 훌륭한 엄마인 것 같네." 라고 답하는 상황. 너무 뻔한 상황 같지만 이 '친구'는 남자였다. 그러나 아이 둘을 키우고 있으며, 아이들의 질문에도 끊임없이 초인처럼 친절하게 격려해주는 성격의 '주 양육자'는 주로 엄마일 것이다- 하는 성역할적 관념이 우리 사회로부터 주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여자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조앤 롤링(해리포터 작가) 역시 처음 데뷔할 때, 필명을 J.K로 바꾸라는 조언을 받고 성공가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이름에서 드러나는 성별, 호칭에서 드러나는 성별, 그리고 위치(직급, 직업 등) 에서 유추하는 성별을 위주로 사람을 미리 파악하곤 한다는 것이다. 에머 역시도 연극학 박사이던 시절, Miss 오툴이라는 호칭 대신 Dr.오툴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끊임없이 주변사람들에게 요청했다. 잘난척을 하려는 게 아닌, 단지 여성이라는 사실 뿐 아니라 에머가 미혼 여성인지 기혼 여성인지 페미니스트 여성인지 적시하는 것이 지긋지긋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름도 그렇고, 우리의 언어는 (서구권 언어가 특히 더 그러하지만) 대명사에서도 젠더구분적으로 단어를 사용한다. 기껏 '내 친구'라고 성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해놓고, 그 다음 문장에서는 'he' or 'she'라는 대명사로 말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에머는 'they'라는 3인칭 단수로 지칭을 해서 사용한다. they는 본래 3인칭 복수이기 때문에 문장에 들어가게 되면 문법적으로 맞지 않게 되지만, 그래도 그것이 젠더 포지션을 드러내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음에 그러했다.
"언어를 변화시키면 가능성과 자유가 태어난다. 차별적인 세계관이 더는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예컨대 이사장을 'they'라 칭하면, 현실적으로 남자가 그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해도, 이사장이 여성일 수 있는 언어적 공간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내가 돌보는 어린아이를 'they'라 칭하면 그 아이에게는 어린 나이부터 기대되는 성역할 바깥에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내가 데이트하는 사람을 'they'라 칭하면 사람들은 더이상 내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추측할 수 없을 것이고, 성소수자들에게는 다양한 기회가 주어진다. (이성애자가 자신의 연애생활에 대해 이런 어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대단한 연대의 행위로 비춰질 것이다.)"
- 나는 여자라서 집안일을 한게 아냐! 그저 엄마를 돕고 싶었을 뿐이라구
내가 페미니즘이 뭔지 공부하게 되면서, 자꾸만 현실에서 눈에 밟히는 것들이 많아졌다. (아마도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점점 프로불편러가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 중 생활과 관련된 것은 '집안일'의 담당 영역이다. 설날, 추석 등 명절이 되면 일가 친척들이 다 모이게 되는데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들만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등의 노동을 하게 되는 현상과 관련한 이야기다.
주로 딸들이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많이 하게 되면서, 이는 자연스럽게 '세습'이 되는 과정이다. 집에서 하던 사람들이 결국 친척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해오던 사람들이 잘 하니까 하는거지.'라는 합리적인 이유까지 붙게 된다. 엄마 외출한 동안, 아빠나 오빠, 남동생 밥 차려주라는 말을 들어본 여성들이 굉장히 많다. 색다른 경험이란 생각이 들지도 않을 정도로 많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여성이라고 해서 집안일을 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아빠와 남자형제들에게 시키세요!' 라고 설득했을때, "어차피 그들은 시켜도 <못해요>.아니면 <대충 할 거에요>. 나는 여자라서 집안일을 하는게 아니라, 내가 안하면 우리 엄마가 다 해야 하니까 돕는 차원에서 하는거라구요." 라는 답변을 받기가 쉽다. 이게 사실이라면 세상 모든 남자들은 집안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로 태어나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정말 과학적으로 부엌에 들어가면 성기가 똑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 가정의 구성원들은, 집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어디서든 배워왔을 것이다.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의 사람은 '여성이 더 자연스럽다'고. 주방에서 밥을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하고 있는 동안, 깎아져 온 과일을 TV보며 아삭거리고 먹고 있는 쪽은 '남성, 혹은 어린이들이 더 자연스럽다'고.
그건 딱히 어느 한 쪽에 책임을 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 TV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책에서, 웹툰에서, 광고에서, 그 외 모든 콘텐츠와 미디어, 교육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그래서 교과서에 나오는 '성역할 고정'에 대한 일러스트 등이 그렇게 지탄을 받는 것이다.
본인은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하는 것들도, 사실 알고 보면 선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면, <행위주체>로서의 발화와, <구조>에서 영향을 받은 발화는 늘 항상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이것이 무슨 소리인고 하면, "나는 나만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지만, 결국 그 행동은 내가 살아온 사회와 구조로부터 늘 학습되어져 온 선택지였다"라는 소리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나는 여성이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려 한다. 단발부터 펌, 염색, 긴머리 길이 등 많은 것을 고려해서 결국 내가 하고싶은 대로 '선택'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결국 그 선택지에 '반삭, 투블럭'조차 없다면? 이것은 사회 구조적인 영향을 받은 '선택'인 것이다. 늘 사회와 대중에게 부추겨져 온 여성의 '이미지'는 단발 그 이상의 길이를 한 머리카락이다. (*물론, 짧은 머리의 여성들이 많지만,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부추겨져 온 여성의 이미지'라는 표현의 뜻을 잘 생각해보면 된다. 넌 언제 여자처럼 하고 다닐래?)
집안일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다. 딸은 '그냥 엄마를 돕기 위해' 내가 형제들 중 가장 집안일을 많이 했을 뿐이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집의 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무언가 의식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온전한 행위주체의 선택이란 없다. 구조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행위주체도 없다. 행위주체는 오롯이 주체가 아니다. 사회 속에서 객체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 여자다운 게 어딨어? 아예 없다
여성은 여성의 삶을 행동으로 표현하며 점점 여성이 되어가고, 남성은 남성의 삶을 살아가며 점점 남성이 되어간다. 결국 날때부터 XX염색체인 사람은 있어도, 여자인 사람은 없다. 성기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결국 체형이라든가 성격, 반응, 경험, 모든 것은 내가 그 젠더(여성/남성)안에 이분법적으로 선택되어 들어감으로써 시작된다. 여자다운 것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긴 머리, 치마, 스타킹, 구두, 화장, 악세서리, 아기, 동물, 상냥한 성격, 질투, 달달한 입맛, 예민한 성격 등 이 모든 것들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프레임이며 사회적 구조이다. 에머는 모든 여성들이 이 '여자'로서 연기하는 것을 그만두어도 된다고 권유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에머는 여성의 겨드랑이털이 금기시되는 사회에 반기를 들기 위하여 온몸의 털을 기르고 제모하지 않은 채 TV에 출연한 페미니스트였다. 이 구간에서 나는 <취향>과 <금지>의 영역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꼭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장 : 여자도 겨드랑이털, 다리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반기 : 으.. 근데 나는 남자도 여자도 겨털 보는거 싫던데; 그냥 둘다 밀면 안 됨?
|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난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취향>과 <금지>의 영역을 아예 이해 못한 채로 떠들어 대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의 겨드랑이털과는 달리 남성의 겨드랑이털은 미디어에 노출되어도, 방송 콘텐츠에 나와도, 길거리에서 민소매로 다니는 남성이 팔을 들어도, 그 누군가의 개인에게는 '싫을지언정', 허용되는 영역 아니었는가? 하지만 여자가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보자. 어느새 '2호선 겨털녀'로 낙인 찍혀 페북스타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겠다. 이것이 취향과 금기시의 영역이다.
담배도 마찬가지다. "어~디 여자가 담배를 펴? 애를 낳을 몸이..." 는 금기시의 영역이다.
그러나, "아후. 아저씨들 길에서 담배 피우는 거 너무 싫어."는 취향의 영역이다.
전자는 구조적으로 힘이 있다. 골목이나 흡연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이유없이 욕을 들어먹거나 폭행까지 당한 여자들의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점점 더 여자들이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이유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구조적인 힘이 전혀 없다. 아저씨들이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지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적 없지만, 이를 규제하는 법규 역시 본 적 없다.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아닌 이상.) 물론 여자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도 '취향'관점으로 짜증이 나겠지만, 그럴 경우 몇 미터 못 걸어가 사람들에게 '어디 여자가...' 소리를 들으며 지탄받아 끄게 될 것이라는 데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다.
- 정리하며
에머 오툴의 <여자다운게 어딨어>는, 꾸미고 상냥해야 하며 남자답게 굴지 말아야 하는 등 여성에게 강요되는 모든 행위들이 사회라는 연극 속 '여자배역' 때문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더 이상 여자답게 구는 것,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 스스로에 대한 고찰을 충분히 하라고 다독여주고 있다.
'넌 여자애가 왜 그러니?' / '여자애답지 않게 이런 건 하지 말지 그래?' / '넌 언제 여자처럼 행동할거야?' 등의 소리를 귀에 딱지 앉도록 들어온 우리 사회의 '머시마같은' 여자들에게, 꼭 이 책을 읽기를 두 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