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다운 게 어딨어 -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
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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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0. 15 - 《여자다운게 어딨어》_에머 오툴 서평 (★★★★☆)


 <여자다운게 어딨어>는 연극학 박사학위를 딴 아일랜드인 에머 오툴의 책이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찾아 다니며 다음 책은 무엇을 읽을까, 하고 고민하던 중 제목에 이끌려 사게 되었다. 여자다운게 어딨냐니? 그렇지. 일단은 동의. 그러나 어디까지가 '여자다운'건지 난 정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제한적인 권리를 받도록 구조화된 이 사회가 '여자다움'을 만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젠더화된 모든 것이 '여자다운' 것인가? 아니면 극단적으로 딱 내 성기까지가 '여자다운'것인가?

원서 제목은 'Girls will be girls'인데, 직역하자면 '여자는 여성이 된다' 정도로 될 수 있겠다. 연극학 박사답게 그는(they) 인생과 젠더의 관계에 대해 연극으로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내가 왜 여성인 '에머 오툴'작가를 <그>라고 표현했으며 영어로는 <they>라고 표현했는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백 번정도 추천한다.



  1. 페미니즘을 넘어 젠더이론까지

 이 책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는 나에게 '페미니즘'과 '젠더퀴어'에 대해 분리를 시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사실 젠더퀴어와 페미니즘은 크게 보면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두 지향점은 미묘하지만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젠더에 대해 아예 무너뜨리는 것과, 젠더이분법은 존재하는 상태에서 여성의 언어로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작가인 에머 오툴은 모든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여자를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가정에서 사회화되면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똑같이 3살배기 남아와 여아가 뛰어다니다 사고를 쳤을 때 듣는 소리부터 다르다. "너는 계집애가 왜이렇게 산만하고 부산스럽니?"

 에머 오툴은 이 젠더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자유로워지기 이전까지 매우 '코르셋 꽁꽁 동여 맨'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루 1,000kcal도 안 먹는 나날들이 계속 되었고,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정도로 손목과 손가락은 말라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기어코 연극 (오페라) 도중 그녀는 기절을 하기까지 한다. 탈모가 계속 되고, 생리가 멈추는 등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으나 그렇게 그녀는 사회라는 무대에서 박수받는 '여성'을 연기해 온 것이다.

 그녀가 정확히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차차 그녀는 주디스 버틀러의 책을 읽은 이후 남성과 여성의 차이(성간 차이), 그리고 나와 옆에 있는 아주머니의 차이(성내 차이)를 비교해보기 시작했고 사실 성간 차이가 크지 않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남성의 삶은 신체도 남자답게 만드는 것이고, 여성의 삶의 방식이 신체도 여자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갈리아의 딸들>이 생각났다. 움(여성)이 강인하게 자라고 운동을 하며 큰 신체가 더 매력있는 사회인 이갈리아에서는, 여성이 더 장력이 강하며 힘이 세다. 그러나 맨움(남성)들은 타고난 신체적 힘이 어느 정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조차 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살면서 힘을 쓸 기회도 없고, 그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은 곧 그 사람의 인생이 되고, 체형도 만들며, 사고방식도 만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도 만들게 된다.

 결국 에머는 자신을 '여성'으로 규정짓지 않고, 스스로는 '성별에 국한짓지 않는 사람' 으로 정의하게 된다. 에머는 에이젠더 (성별이 남성/여성으로 국한되지 않는 젠더. 남성/여성 외의 제 3의 성이라 규정짓는 '뉴트로이스'와는 다르다.) 인 것이다.



  1. 아비뛰스 (habitus)

 논술 공부를 잠시 하던 고3시절, 많이 접했던 단어 중 하나인 '아비투스'에 대한 담론이다. 사람은 마지팬(아몬드, 설탕, 계란 흰자로 만든 부드러운 과자)처럼 가족, 학교, 교육, 문화에 의해 빚어져 아비뛰스라고 이름 붙여진다. 아비뛰스란, 개인들이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와 교류하기 위해 저마다 갖고 있는 지속적인 체계를 말한다.
 버릇, 습관을 뜻하는 단어 habit이 이 어원에서 나왔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의 습관, 행동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보여질 수 있는 '취향'까지도, 나는 이 사회 속에서 학습되고 반죽된대로 행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요즘 우리 사회에 횡횡한 문제인 '소녀 감성/로리타 컨셉'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자꾸 미디어, 콘텐츠에서 연예인들이 '소녀'컨셉으로 나오고 로리타 컨셉으로 나오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 와중, '그냥 컨셉일 뿐이다 or 소녀스러운건 나도 좋아하는건데 뭐가 문제냐' 등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에, 나는 90년대 길거리와 연예계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대 특유의 분위기와 스타일 컨셉 관련 유행은 돌고 돈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90년대 길거리에는 여자들이 쭉쭉 뻗은 나팔바지에 배를 훤히 드러낸 크롭티, 그리고 부츠 등 한참 '자유분방한' 모습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또한 눈코입 모두 각자(?) 자기 주장 강한 메이크업을 했다. 보라색 립, 버건디 립, 진하고 어두운 눈화장, 산처럼 솟은 눈썹 등. 그러나  최근 10~20년간 그런 '강한' 컨셉은 촌스럽다는 평가를 받으며 점점 더 화장이 연해져 왔다. 그러나 그 연해진 화장이 화장을 '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였다. 화장을 하되, 화장한 티를 많이 내면 안되고, 화장을 많이 하되, '쎄 보이면' 안된다.
 의상 역시 마찬가지다. 90년대의 섹시함이 '당당한 여성의 섹스어필'이었다면, 요즘의 섹시함은 '아무것도 몰라요'의 섹스어필이다. 길게 말했지만, 뭐, 간단히 말하자면 점점 여성적 섹시함의 목표는 수동적인 섹시함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대중들이 모두 어떠한 특정 컨셉을 한 대상을 보고 선호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내 주변에서도 "요새 가수 ㅇㅇㅇ 진짜 예쁘지 않아?" 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사람인 이상 늘 사회 속에 속해있게 되는데 그런 소리를 계속 듣고 학습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화다. 나 조차 무의식적으로 '가수 ㅇㅇㅇ'의 특징과 결부시켜, 그것들은 매력있는 포인트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 자신에의 투영도 하게 된다.
 개인으로서 자신이 물론 예전부터 프릴원피스와 양갈래, 연한 화장과 순한 눈썹, 볼터치, 니삭스를 좋아했을 수도 있다. 정말로 유행 전부터 좋아했을 수도 있고, 사회와 별개로 (물론 매우 적은 경우겠지만) 그 컨셉 자체가 너무 좋을 수 있다. 당연히 역코르셋은 좋지 않지만, 어느 정도 인식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추가로, 이건 사견이지만 역 코르셋은 '로리타'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어른들이 먼저 서로서로 씌워도 된다고 생각한다. 피해를 보는 것은 다큰 성인인 우리들이 아니라 교복입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다. 지난 5년 사이 아동성범죄건은 2.4배 증가했으며, 현재 아동인구 비율당 아동성범죄 건 수는 대한민국이 세계1위를 차지하고 있다. 어른들이 먼저, 아동들의 상징물들을 이용해서 성적 코드를 만들고 소비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1. 성중립적 단어의 사용

 아마도 이 이야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드라이브를 가다가 사고가 났고, 아들이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급하게 수술에 들어가야만 했는데, 수술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사가 이 아들을 보더니 자기는 '내 아들이다'라며 수술할 수 없다고 절규했다던 이야기. 어떻게 된 것일까? 라는 이 질문을 처음 접했을 때 나름 퀴어적으로 마인드가 열린 사람들은 '아버지가 게이부부였다'라고 했을 것이며, 혹은 '새아빠와 친아빠일 것이다', 등으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펼쳤을 것이고 젠더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 의사가 여자겠지." 라고 답했을 것이다.
 에머도 비슷한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아일랜드에 있는 내 친구가 아이 둘을 키우는데, 볼 때마다 걔의 인내심에 놀라. 아이들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 친구는 매번 지친 기색 없이 설명해주고, 더 알아보라고 격려해주더라고. 완전히 초인이야." 라는 말에 친구가 "와, 훌륭한 엄마인 것 같네." 라고 답하는 상황. 너무 뻔한 상황 같지만 이 '친구'는 남자였다. 그러나 아이 둘을 키우고 있으며, 아이들의 질문에도 끊임없이 초인처럼 친절하게 격려해주는 성격의 '주 양육자'는 주로 엄마일 것이다- 하는 성역할적 관념이 우리 사회로부터 주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여자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조앤 롤링(해리포터 작가) 역시 처음 데뷔할 때, 필명을 J.K로 바꾸라는 조언을 받고 성공가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이름에서 드러나는 성별, 호칭에서 드러나는 성별, 그리고 위치(직급, 직업 등) 에서 유추하는 성별을 위주로 사람을 미리 파악하곤 한다는 것이다. 에머 역시도 연극학 박사이던 시절, Miss 오툴이라는 호칭 대신 Dr.오툴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끊임없이 주변사람들에게 요청했다. 잘난척을 하려는 게 아닌, 단지 여성이라는 사실 뿐 아니라 에머가 미혼 여성인지 기혼 여성인지 페미니스트 여성인지 적시하는 것이 지긋지긋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름도 그렇고, 우리의 언어는 (서구권 언어가 특히 더 그러하지만) 대명사에서도 젠더구분적으로 단어를 사용한다. 기껏 '내 친구'라고 성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해놓고, 그 다음 문장에서는 'he' or 'she'라는 대명사로 말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에머는 'they'라는 3인칭 단수로 지칭을 해서 사용한다. they는 본래 3인칭 복수이기 때문에 문장에 들어가게 되면 문법적으로 맞지 않게 되지만, 그래도 그것이 젠더 포지션을 드러내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음에 그러했다. 


 "언어를 변화시키면 가능성과 자유가 태어난다. 차별적인 세계관이 더는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예컨대 이사장을 'they'라 칭하면, 현실적으로 남자가 그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해도, 이사장이 여성일 수 있는 언어적 공간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내가 돌보는 어린아이를 'they'라 칭하면 그 아이에게는 어린 나이부터 기대되는 성역할 바깥에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내가 데이트하는 사람을 'they'라 칭하면 사람들은 더이상 내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추측할 수 없을 것이고, 성소수자들에게는 다양한 기회가 주어진다. (이성애자가 자신의 연애생활에 대해 이런 어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대단한 연대의 행위로 비춰질 것이다.)"



  1. 나는 여자라서 집안일을 한게 아냐! 그저 엄마를 돕고 싶었을 뿐이라구

 내가 페미니즘이 뭔지 공부하게 되면서, 자꾸만 현실에서 눈에 밟히는 것들이 많아졌다. (아마도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점점 프로불편러가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 중 생활과 관련된 것은 '집안일'의 담당 영역이다. 설날, 추석 등 명절이 되면 일가 친척들이 다 모이게 되는데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들만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등의 노동을 하게 되는 현상과 관련한 이야기다.

 주로 딸들이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많이 하게 되면서, 이는 자연스럽게 '세습'이 되는 과정이다. 집에서 하던 사람들이 결국 친척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해오던 사람들이 잘 하니까 하는거지.'라는 합리적인 이유까지 붙게 된다. 엄마 외출한 동안, 아빠나 오빠, 남동생 밥 차려주라는 말을 들어본 여성들이 굉장히 많다. 색다른 경험이란 생각이 들지도 않을 정도로 많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여성이라고 해서 집안일을 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아빠와 남자형제들에게 시키세요!' 라고 설득했을때, "어차피 그들은 시켜도 <못해요>.아니면 <대충 할 거에요>. 나는 여자라서 집안일을 하는게 아니라, 내가 안하면 우리 엄마가 다 해야 하니까 돕는 차원에서 하는거라구요." 라는 답변을 받기가 쉽다. 이게 사실이라면 세상 모든 남자들은 집안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로 태어나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정말 과학적으로 부엌에 들어가면 성기가 똑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 가정의 구성원들은, 집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어디서든 배워왔을 것이다.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의 사람은 '여성이 더 자연스럽다'고. 주방에서 밥을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하고 있는 동안, 깎아져 온 과일을 TV보며 아삭거리고 먹고 있는 쪽은 '남성, 혹은 어린이들이 더 자연스럽다'고.
 그건 딱히 어느 한 쪽에 책임을 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 TV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책에서, 웹툰에서, 광고에서, 그 외 모든 콘텐츠와 미디어, 교육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그래서 교과서에 나오는 '성역할 고정'에 대한 일러스트 등이 그렇게 지탄을 받는 것이다.

 본인은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하는 것들도, 사실 알고 보면 선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면, <행위주체>로서의 발화와, <구조>에서 영향을 받은 발화는 늘 항상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이것이 무슨 소리인고 하면, "나는 나만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지만, 결국 그 행동은 내가 살아온 사회와 구조로부터 늘 학습되어져 온 선택지였다"라는 소리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나는 여성이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려 한다. 단발부터 펌, 염색, 긴머리 길이 등 많은 것을 고려해서 결국 내가 하고싶은 대로 '선택'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결국 그 선택지에 '반삭, 투블럭'조차 없다면? 이것은 사회 구조적인 영향을 받은 '선택'인 것이다. 늘 사회와 대중에게 부추겨져 온 여성의 '이미지'는 단발 그 이상의 길이를 한 머리카락이다. (*물론, 짧은 머리의 여성들이 많지만,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부추겨져 온 여성의 이미지'라는 표현의 뜻을 잘 생각해보면 된다. 넌 언제 여자처럼 하고 다닐래?)

 집안일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다. 딸은 '그냥 엄마를 돕기 위해' 내가 형제들 중 가장 집안일을 많이 했을 뿐이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집의 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무언가 의식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온전한 행위주체의 선택이란 없다. 구조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행위주체도 없다. 행위주체는 오롯이 주체가 아니다. 사회 속에서 객체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1. 여자다운 게 어딨어? 아예 없다

 여성은 여성의 삶을 행동으로 표현하며 점점 여성이 되어가고, 남성은 남성의 삶을 살아가며 점점 남성이 되어간다. 결국 날때부터 XX염색체인 사람은 있어도, 여자인 사람은 없다. 성기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결국 체형이라든가 성격, 반응, 경험, 모든 것은 내가 그 젠더(여성/남성)안에 이분법적으로 선택되어 들어감으로써 시작된다. 여자다운 것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긴 머리, 치마, 스타킹, 구두, 화장, 악세서리, 아기, 동물, 상냥한 성격, 질투, 달달한 입맛, 예민한 성격 등 이 모든 것들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프레임이며 사회적 구조이다. 에머는 모든 여성들이 이 '여자'로서 연기하는 것을 그만두어도 된다고 권유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에머는 여성의 겨드랑이털이 금기시되는 사회에 반기를 들기 위하여 온몸의 털을 기르고 제모하지 않은 채 TV에 출연한 페미니스트였다.  이 구간에서 나는 <취향>과 <금지>의 영역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꼭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장 : 여자도 겨드랑이털, 다리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반기 : 으.. 근데 나는 남자도 여자도 겨털 보는거 싫던데; 그냥 둘다 밀면 안 됨?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난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취향>과 <금지>의 영역을 아예 이해 못한 채로 떠들어 대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의 겨드랑이털과는 달리 남성의 겨드랑이털은 미디어에 노출되어도, 방송 콘텐츠에 나와도, 길거리에서 민소매로 다니는 남성이 팔을 들어도, 그 누군가의 개인에게는 '싫을지언정', 허용되는 영역 아니었는가? 하지만 여자가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보자. 어느새 '2호선 겨털녀'로 낙인 찍혀 페북스타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겠다. 이것이 취향과 금기시의 영역이다. 

 담배도 마찬가지다. "어~디 여자가 담배를 펴? 애를 낳을 몸이..." 는 금기시의 영역이다.
그러나, "아후. 아저씨들 길에서 담배 피우는 거 너무 싫어."는 취향의 영역이다.
전자는 구조적으로 힘이 있다. 골목이나 흡연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이유없이 욕을 들어먹거나 폭행까지 당한 여자들의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점점 더 여자들이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이유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구조적인 힘이 전혀 없다. 아저씨들이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지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적 없지만, 이를 규제하는 법규 역시 본 적 없다.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아닌 이상.) 물론 여자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도 '취향'관점으로 짜증이 나겠지만, 그럴 경우 몇 미터 못 걸어가 사람들에게 '어디 여자가...' 소리를 들으며 지탄받아 끄게 될 것이라는 데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다.



  1. 정리하며

에머 오툴의 <여자다운게 어딨어>는, 꾸미고 상냥해야 하며 남자답게 굴지 말아야 하는 등 여성에게 강요되는 모든 행위들이 사회라는 연극 속 '여자배역' 때문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더 이상 여자답게 구는 것,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 스스로에 대한 고찰을 충분히 하라고 다독여주고 있다.

 '넌 여자애가 왜 그러니?' / '여자애답지 않게 이런 건 하지 말지 그래?' / '넌 언제 여자처럼 행동할거야?' 등의 소리를 귀에 딱지 앉도록 들어온 우리 사회의 '머시마같은' 여자들에게, 꼭 이 책을 읽기를 두 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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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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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커뮤니티라기보단 하나의 '브랜드'로 작용을 하고 있는 '메갈리아'.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몰고 온 메갈리아의 어원이 바로 이 노르웨이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이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5년 5월 어느 날, 중동의 호흡기 질환인 메르스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오게 되면서 디씨인사이드(dcinside)에는 '메르스 갤러리'가 개설됐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숨쉬듯 여혐 댓글들이 달렸고, (ex. 분명 첫 메르스 환자는 해외 원정 가서 몸 팔고 온 우리나라 창녀겠지.) 첫 감염자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분노한 여성들이 메르스갤러리에 지금까지 있어왔던 여혐 발언들을 그대로 성별만 바꾸어 '미러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메르스갤러리는 일명 '메갤'이라 불렸고, 이내 사이트로 만들어지게 되어 새로운 이름을 '메갈리아'로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메르스 갤러리'와 '이갈리아의 딸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네이밍이었다.

 그렇다면 왜 메르스갤러리가 선택한 '이념의 길'은 하필 <이갈리아의 딸들>이었을까?
 게르드 브란튼베르 저자의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소설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서사구조의 소설이다. 현재 지구상에, 남성 중심이 아닌 여성 중심의 사회는 없다. 그러나 이갈리아는 현재의 이 사회를 정확히 뒤집어놓은 여성 중심의 사회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얼마나 많은 '남성 중심'의 것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짚어준다. 메르스 갤러리에서 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미러링'이라는 전략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1. 단어 (word)

 사실 가장 충격적이었고, 가장 먼저 다가온 충격이고, 책을 읽는 내내 머리를 가장 혼동시킨 것은  바로 이갈리아에서 사용하는 단어(언어)였다. 어릴 적 어렴풋이 배웠던 기억도 났다. policeman 대신, police officer라는 성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해야 하며, fireman 대신 fire fighter를 사용해야 한다고. 왜 '인간의 기본형'이 man이며 이는 남성을 의미하기도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한것은 유치원 때가 마지막이었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는 너무 당연했으니까.

 이갈리아에서는 man이 아닌 wom(움)이 인간의 기본형이자, 여성을 의미한다. 또한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는 manwom(맨움)이다. 앞에 접두사처럼 man-이 붙음으로써 마치 woman처럼 정확히 미러링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해 유치원 때 이후로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어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같은 원리로, '주부'를 뜻하는 housewife라는 단어도 이갈리아에서는 housebound로 쓰여, 이는 대부분 남성에게 기대되는 성역할을 지칭하고 있다. 공적인 영역 (사회 생활과 경제 활동)을 대부분의 움들이 책임지고, 중요한 사안들도 움들이 진행하고 있으며, 반대로 사적인 영역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육아, 가사 등) 은 대부분의 맨움들이 맡아서 진행하는, 그런 사회가 이갈리아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 역시, 인간의 대표상을 띠고 있는 신의 주체도 남성으로 생각했고 그의 아들도 역시 남성이지 않았는가? 이갈리아의 신은 제시카 도나, 즉 여성이다. 여성 위주의 사회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모든 지배의 온상, 개발과 개척의 주체는 인간(여성, 움)이며, 지배 당하는 상징적인 땅덩어리와 대지는 즉 남성, 맨움이다. 미국의 '주' 이름들이 모두 여성의 이름임을 감안하면 (버지니아,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등) 이를 정확히 미러링한 단어들이라고 볼 수 있다.


  1. '맨움다움' = 여성다움

 "여자들은 원래 화장하고 꾸미는 것 많이들 하고 좋아하잖아~"
 "여자들 원래 애기랑 강아지 이런거 좋아하지 않아?"
 "여자들은 친구들끼리 막 귀걸이 이런 것만 바뀌어도 바로 알아보지 않나?"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러한 '여성다움'이라는 말들에 숨겨진 맥락이란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가. '원래' 그런 인간은 없다. 더군다나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 씌워지는 프레임 역시 문제 된다. 농담 삼아 많이들 하는 '난 방금 성별을 잃었습니다' 농담도 역시, 아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리고 섬세하지 않으면 여성이 아니라는 묘한 테두리를 씌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갈리아에서는 남성(맨움)들이 수염을 길러 헤어팩을 하고, 수염에 헤어롤을 말아 치장하고, 레이스와 화려한 무늬가 달린 치마를 입는다. 반면 여성(움)들은 머리가 대부분 짧아 활동하기에 편하며, 외출하기에도 간편한 차림새를 유지한다. 따라서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고, 화장을 하는 일 역시 없다. 외모보다는 사회적으로 펼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말한다. "남성(맨움)들은 꾸미는 데만 관심이 있어서 말이지…"

 치마와 긴 머리, 그리고 화장, 렌즈, 헤어롤. 여성들이 외출을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치장 시간이 드는가. 또한 왜 여성들은 '여자답게 꾸며야' 하는가. 왜 못생긴 여성은 성형수술을 해야 하며, 살 찐 여성은 다이어트를 하는가. 이는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여자다운' 성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더 웃긴 것은 이에 따르는 남성들의 조롱이다.

 여자들은 꾸미기만 좋아해서 정작 중요한 사회의 이슈(정치, 문화, 역사)엔 관심이 없어,
여자들 성형 많이해서 괴물같은 얼굴 종종 보이는데 난 너무 싫더라,
여자들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것 꼴불견이고 진상이야…

 모두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해놓고, 그 '여성다운' 조건에 따르려 애쓰는 여성들을 조롱하는 언어들이다. 여성답다는 것은 누구 기준에서 만들어 놓은 제약인가?


  1. 페호와 브래지어, 의상

 나는 여성이다. 태어나서 자라고 보니 그냥 가슴이 나와 있었는데, 이를 가리기 위해 (혹은 처짐을 방지하기 위해) 브래지어를 착용해야 했고, 브래지어 끈이 남들에게 보이면 "큰일" 나니까 다시 민소매 속옷을 입어야 했고, 그 위에 티셔츠를 입는다.

 이런 생각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여성의 가슴은 왜 성적 대상화가 되어야 하는가? 왜 가려져야 하며 숨겨져야 하고, 왜 처져서도, 탄력을 잃어서도 안되는가? 만약 단순히 남성의 가슴보다 '돌출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남성의 목젖은 왜 숨겨지고 가려지지 않는가? 성적 대상화를 시키는 것은 젠더권력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난 놀랍게도 20여 년간 단 한번도 고찰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성적 대상화의 힘이란 놀랍다. 그것은 '남성'에게서 '여성'에게로만 향하는 권력이 아니다. 젠더 권력이 사회적으로 굳어지게 되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여성을 대상화하기 시작한다. 같은 여자끼리도 브래지어 끈이 보이면 소곤소곤 숨겨주고 가려준다. 아니, 여자가 가슴이 돌출되어 있다는 것을 설마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는가?

 이갈리아에서는 움들이 가슴에 대해 굉장히 자유롭다. 마치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가슴과 같이. 

 "따뜻한 가을날이었다. 많은 움이 셔츠를 입지 않은 채 걸어다니고 있었다. 갖가지 모양의 가슴이 주변에서 출렁거렸다. 둥글고 탄력 있는 가슴, 길고 축 늘어진 가슴, 맨움처럼 납작한 가슴, 위쪽이나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는 젖꼭지, 아이가 하도 빨아서 길어지고 원통형이 된 젖꼭지도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예전에 그는 어떻게 이런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의아스러웠다. 사실 아주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페트로니우스의 블라우스 안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중략)"

 우리 사회의 사춘기를 맞이한 여자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엄마 손을 잡고 속옷 가게로 가서 주니어 브래지어를 맞추는 모습처럼, 이갈리아에서는 사춘기를 맞이한 맨움들이 아버지 손을 잡고 각자의 음낭 사이즈에 맞는 '페호'를 맞추러 간다. 페호는 5사이즈에 B튜브, 6사이즈에 A튜브 등 사이즈가 세세히 나눠져 있다. '음낭이 보기싫게 처지면 움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한 냄새가 나거나 불결해도 움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맨움들은 늘 페호와 성기를 청결히 하고 향수도 뿌려야 한다. 묘하게도, 이 구간에서 여성청결제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갈리아에서는 페호 뿐 아니라 치마 역시 맨움들의 전유물이다. 활동하기 편한 바지는 움들이 주로 입는다. 맨움들은 성기가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신체 구조상 바지를 입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웠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배운 대로' 생각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여자는 치마, 남자는 바지.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성별 의상의 법칙 아니었던가? 그래서 화장실 가서도 순식간에 벗을 수 있게끔, 이갈리아의 맨움들은 그런 의상을 입는 움들을 부러워한다. 나도 단연컨대 소변을 보기 위해 바지 전체를 내리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신체구조를 한 번쯤은 부러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체 구조'를 부러워 한 것이지, 의상을 부러워 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의상 구조와 이데올로기는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젠더 관점에서 어떠한 성별이 더 편리하게끔 만들어졌는지는 너무나 명확했던 것이다!



  1. 신체적 차이와 섹스

 근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금 젠더 권력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와 사회의 주요한 부분을 남성이 먼저 가져갔기 때문이지, 절대적인 신체적 차이 때문이 절대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자라나는 방식'에 의해 더더욱 차이가 커지는 것도 있다. 

 운동을 좋아하던 대부분의 여아들은 사춘기 무렵 운동을 그만둔다. 그것이 '여자답기' 때문이다. 또한 생리를 시작하고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운동을 하기에 '부적합한' 신체가 된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기 때문이다. 운동은 남자아이들에게나 권유된다.
 이갈리아에서는 맨움들이 '얌전하고 조신한' 덕목을 강요받기 때문에, 치마를 입고 인형놀이나 하며 온순하고 얌전하게 자란다. 그들은 운동을 할 기회가 없고, 게다가 살 찐 맨움의 신체가 성적으로 매력이 있는 신체로 인정받기 때문에 더더욱 운동은 커녕 얌전하게 간식이나 먹으며 살을 찌운다. (심지어 체질 상 살이 찌지 않는 맨움은 인기가 없다.) 그러나 움들은 신체적으로도 강해짐에 있어 자유롭기 때문에 운동을 하여 힘을 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결국, 이갈리아에서 데이트 폭력의 피해를 받는 것은 늘 맨움이다. 맨움은 움을 때리고 공격할 생각조차 못하게 자라지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늘 젠더적인 차원으로 피해자는 여성이요 가해자는 남성임은 모두가 알고 있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워드엔 늘 남성들이 화를 내고 있지만 이는 '잠정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것으로 보이니 우선 넘어가자.) 근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다는 현실이 참혹하다. 범죄는 힘의 차이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의 결여와 상대방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음'에서 오는 것이다. 2등 시민인 여성은 '수틀리면' 언제든 때리고 죽일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여성을 상대로 하는 강력범죄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힘의 차이에서 오는 거라면, 성별 상관없이 서로 '힘 센 자'가 약한 자를 죽여야 합당하다. 남성 내에서의 힘차이, 그리고 여성 내에서의 힘차이는, 성별 간의 평균적 힘 차이보다 훨씬 그 차이가 크다. 

 이갈리아에서도 늘 성폭행을 당하는 대상은 맨움이다. 신체적 구조? 근력의 차이? 아니, 범죄를 불러오는 것은 그런 요소들이 아니다. 젠더 권력의 차이가 가장 크고, 게다가 이갈리아에서 섹스의 방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방식과는 다르다.

 "나 어제 남친이랑 완전 뜨거운 밤 보냈다. 밤새 네 번이나 했잖아."
 이 대사를 읽고 든 당신의 생각은? '네 번'이란 무엇을 '네 번' 했다는 말인가? 아마도 당신은 자연스럽게 '콘돔을 쓴 개수'라든가, '정액을 방출한 횟수'를 떠올렸을 것이다. 남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정액을 방출한다. 저 '네 번'이라는 말은 남성의 입장에서 절정에 '네 번' 도달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마치 <삽입섹스>라는 워딩과 같다. 여성 입장에선 삽입이 아니라 '흡입섹스'다. 그리고 여성의 '절정'은 어디에도 고려되지 않는다.

 이갈리아에서는 섹스의 방식이 두 가지다. 움(여성)이 임신을 원할 때에만 페니스를 질 속에 넣는 방식으로 하고, 그 외의 섹스는 온전히 움의 쾌락을 위주로 하는 방식이다. 남성(맨움)이 누워있고, 그 위에 여성(움)이 올라간다. 이는 남성들의 섹스판타지인 여성상위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맨움)의 페니스는, 여성(움)의 클리토리스에 의해 '문질러짐' 당할 뿐이다. 따라서 절정에 이르고, 섹스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오로지 여성(움)이 된다. 그 과정에 있어 페니스에 주어지는 자극으로 남성(맨움)이 절정에 다다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핵심이 아닌 부수적인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온 섹스의 방식 마저도, 얼마나 남성 위주의 언어와 시각으로 모든 과정 및 워딩을 만들어 소비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부분에서 '남성-마스터키 / 여성-자물쇠' 와 같은 농담도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여러 여자와 잔 남자는 마스터키처럼 능력남이며, 여러 남자와 잔 여자는 싸구려 자물쇠같은 걸레' 논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사회에 존재해 온 불문율이다. 섹스의 방식과 여성의 성적 대상화 때문에 생긴 인식이다. 참고로 메갈리아에서는, 이 불문율에 대해 '여러 바나나를 먹은 입은 더러운 것이 아니지만, 여러 입에 들어갔다 나온 바나나는 더럽다'라는 드립으로 미러링한 바 있다.


  1. 출산과 육아, 그리고 생리

 이갈리아에서 여성(움)의 출산은 매우 신성시된다. 악단이 악기를 연주하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여성의 컨디션을 조절하며 출산할 수 있도록 하고, 심지어 흔한 병원에서의 출산이 아닌 굉장히 출산에 있어 전문화 된 '궁전'에서 아기를 낳게 된다. 결국 이 아이를 양육하고 기르는 것은 남성(맨움)의 역할이지만, 생명을 이어가는 가장 '신성한' 일은 여성(움)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모성애/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겠지만 여성숭배도 여성혐오의 일종이다. 이갈리아에서 출산을 신성시 하는 것은 마치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집안일을 도와줬을 때의 사회 반응과도 같다. 훌륭한 일이고 신성시 되지만, 강요되지는 않는 맥락. 현재 사회는 여성에게 어머니로서의 성역할을 강조하지 않는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우리는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이는 것'이 신체 구조상 여성의 과업이기 때문에 모든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여성에게 떠맡기고 있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갈리아에서는 온전히 출산, 육아, 그리고 수유 과정이 분리가 되어있다. 여성(움)은 아이를 낳아주고 젖만 먹일 뿐, 그 외의 모든 육아 과정은 남성(맨움)이 진행한다. 집에서 아기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다가도, 아이가 배고파 칭얼거리는 시간이 되면 여성(움)이 일하고 있는 회사로 찾아와서 아이에게 수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일은 여성(움)이 다 하고, 그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잔업(집안일과 육아)은 남성(맨움)이 하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위에서 언급했듯, 자연스럽고 합당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배우며 자라왔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

 이갈리아에서는 생리 역시 굉장히 자랑스럽고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월간 행사로 간주된다. 

 "그녀는 초경을 한 기념으로 생리대를 착용하고는 페트로니우스에게 다가와 그의 가슴을 장난스럽게 쳤는데, 그때 그녀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아버지는 그를 조용히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이제는 그가 페호를 입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페트로니우스는 어머니가 그를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해 주었던 때가 바로 어머니의 생리 기간중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생리를 할 때면 사물을 아주 명쾌하게 보았다."

 조금만 예민하게 반응해도 '오늘 그날이냐'며 조롱하는 현대 사회와는 다르다. 우리 사회에선 같은 행동을 보이더라도 여성은 '예민하고' 남성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것 처럼, 그리고 여성은 '나대고 기가 쎈' 것이지만 남성은 '카리스마 있고 리더십 있는' 것처럼. 평소와 달리 조금 날카로울 수 있는 생리기간동안, 이갈리아의 여성(움)들은 사물을 아주 명쾌하게 본다고 명시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1. 맨움해방운동과 페미니즘

 <이갈리아의 딸들>의 주인공인 페트로니우스는 남성(맨움)이다. 그리고 여동생인 '바'가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양육되어지며 바와 자신간의 성차별을 경험하는 인물이고, 빼빼 마른 체격으로 흔히 말하는 '사랑받는 맨움'이 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그로'라는 여성을 사랑하기도 하고, 남성인 발드리안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팔루리안(=게이)'이기도 하다. 그는 사회가 젠더적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맨움해방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마치 가부장제 사회에서 젠더권력의 불균형을 느끼고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는 여성들의 모습과 같다. 

 각 사회에서 맨움해방운동 (masculinism)과 페미니즘운동 (Feminism)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비슷하다. '그들은 이성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비뚤어진 사람들로 자주 묘사되곤 한다. 수세기 전 유럽에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던 서프러제트는 어떠했는가. 참정권을 달라고 시위하는 여성들은 모두 못생기고 뚱뚱해서 매력도 없는 여자들이라고 묘사되던 것이, 마치 현시대의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페트로니우스와 친구들은 맨움해방운동을 하기 위해, 이갈리아에 존재하는 성차별적인 행사들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곤 한다. 연간 행사 중 하나인 <메이드맨의 파티>, 그리고 <월경 축제> 등의 행사들이 그것이다. 세상을 바꿔놓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겠다는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럴 때마다 오히려 실패만 거듭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페트로니우스가 콘텐츠를 만들게 된다. 소설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관련 내용은 이 책을 꼭 끝까지 다 읽어야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니 줄거리는 쓰지 않겠지만, 나 자신이 콘텐츠로써 세상을 젠더적 관점에서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고자 하는 비전이 있다보니 더더욱 와닿는 부분이었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면서, 당신도 모르는 새 페트로니우스의 맨움해방운동을 지지하고 있다면, 올바르게 본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일일히 찝어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의 미러링이 가끔은 더 큰 효과를 가져오곤 한다.


  1. "결국,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야" vs "결국, 아이를 보는 것은 맨움이야"

 "결국,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야." vs "결국, 아이를 보는 것은 맨움이야"

 이 두 말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젠더권력의 불균형은 '어쩔 수 없는' 신체적 차이나 자연의 섭리가 아닌, 이데올로기에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결국엔 그래도 여자가 아이를 낳기 때문에' 몸조심을 해야 하고, 공적인 영역에 나가 사회생활과 경제 활동을 하는 것보다 집에서 육아/가사노동에 힘써야 하며, 모성애를 길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갈리아에서는 움이 출산과 수유까지 담당하기 때문에 '결국엔 맨움이 아이를 봐야 하고', 따라서 맨움들은 몸조심을 해야 하며 움에게 사랑받아야 하고, 공적인 영역에 나가는 것보다 집에서 육아/가사 노동에 힘써야 하며, 부성애를 길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이 젠더 권력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여성이고 남성이고, 이 사회가 맨박스(MAN BOX)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 상자에서 벗어난 것은 모두 자연스럽게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으로 인식되며, 이것에서 나타나는 젠더 불평등이 있음을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조금 더 나아가 젠더 권력이 있다는 것 까지 눈치 챈 사람들은 있으나, 이게 신체적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혹자는, 우리가 원시 시대때 남성이 사냥을 하고 여성이 채집/육아 위주의 생활을 했다고 이 역시 당연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요인들이 아닌, 권력을 먼저 잡아버린 쪽의 위주로 역사는 쓰여졌으며 만들어져 왔고, 기록되어 왔다. 가장 큰 것은 이데올로기를 계승해 온 것 역시 특정 젠더의 시각과 입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이 이데올로기와 젠더 불평등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 버린 '미러링 문학'이다. 이 책을 덮은 이후 부터 세상을 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이 보이게 되는 책이다. 하다 못해 노래 가사부터, 유명 명소에 세워진 동상들과 전설들,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의 일상 잡담들까지, 세상 곳곳 어디에서도 젠더권력이 드러나지 않은 곳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몰랐던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에 두려워한다면 절대로 읽어서는 안 될 책이다. 웬만한 어쭙잖은 각오로는 절대 읽기를 추천하지 않는다. 당신이 남성이기 때문에 정말로 '여성들이 어떤 차별을 겪는지' 단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고 싶은 것이라면, 조금 더 각오를 다져오고 읽기를 추천한다. 아마 당신이 누리고 있던 권력이 어떠한 것임을 명확히 알게 된다면 더더욱 젠더 권력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질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렇게 불편해진 만큼 당신은 확실히 젠더적인 측면에서 사회/역사/학문 등 다양한 분야를 보는 시야가 넓어짐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일상의 것들에서 새로운 시야를 갖고 생각을 하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난 이 책에 처음으로 별점 다섯개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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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레버 2017-02-19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글을 보았는데 정말 명쾌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