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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귤이 없었단다
김인정 지음 / 아작 / 2025년 2월
평점 :
그냥 쓰지 않고 그냥 읽지 않는 평범한 하루가 일상이다. 억지로 눈을 뜨고 겨우 일어나 인파에 꽉 껴 지하철을 타고, 찰나의 기회를 잡아 자리에 앉으면 가방에 애써 챙긴 책을 꺼내기는커녕 그대로 고개를 처박고 졸고 만다. 간신히 다시 한번 눈을 뜨고 일어나 도착한 회사에서 온종일을 버티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유난히 무거운 가방 구석에서 책을 발견한다. 새파란 표지에 새콤달콤 귤이 하나, 둘, 셋, … 일곱. 럭키 세븐!
<그때는 귤이 없었단다>는 열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김인정 작가의 소설집이다. 김인정 작가는 독자를 여우와 선녀와 용, 마법사가 마구 뒤섞인 지구 어디쯤인지 상상도 어려울 만큼 먼 세계로 데려갔다가, 불현듯 홍대 골목길에 데려다 놓는다. 내가 스쳐 지나간 이가 실은 두더지였던 선녀일 수도, 여우구슬을 삼켰다가 뱉어낸 소녀일지도, 기억을 잃은 채 마법사에게 달려가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하나같이 개성 넘치는 인물들은 벼락처럼 영문도 모른 채 내리꽂힌 절망을 멀거니 바라본다, 울지도 않고. 어찌저찌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긴 하는데, 전형적인 주인공처럼 씩씩하게 이겨내지는 못한다.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어쩔 수 없어서 꾸역꾸역 해낸다. 바로 그래서, 나는 참 좋았다.
내일도 오늘과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흘려보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해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거창한 모험의 주인공은 차라리 할 수 있겠는데, 일상이란 균형을 깨며 사소한 모험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건 참 어렵다.
귤이 없던 세계에 귤이 생기고, 초콜릿을 냉큼 먹어버린 마법사를 생각하고, 은빛을 남기며 떠난 용을 바라보고, 기억을 잊은 마법사의 연인을 안타까워하고, 아침을 부르는 마법사의 텅 빈 곁을 쓸쓸해하고, 여우와 뛰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웃다가. 아니라고 하는 당신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나와 박평수가 얼마치 닮았는지 고민하고 반성하다, ‘세계를 부술 듯 상처 헤집으며 끝나버린 사랑(p.236)’이 얼마나 붉은지, 쏟아지는 폭우 속에 살기로 다짐한 아이들을 차마 보내지 못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 내내 사랑을 했다.
‘피꽃 난만한 이 세계를 힘껏 살아(p.236)’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힘껏 읽다 보면, 방금까지 삭막하던 지하철 구석에서 슬그머니 귤이 하나 굴러 나온다. 이 책을 읽기 ‘전의 세계에는 이 작고 말랑말랑한 과일이 존재(p.19)’하지 않았다.
김인정 작가는 삭막한 일상을 살던 내 손에 귤을 쥐여주었다. 이제 ‘여기 귤이 있다(p.19).’ 이제 나는 ‘이야기만큼 씩씩하고 예술만큼 너그럽고 또한 우리들 일상의 모든 순간만큼 용감한 독자(p.305)’가 될 수 있다. 이제는 내게 귤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