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피라미드 바벨의 도서관 21
아서 매켄 지음, 이한음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검은 인장 이야기(라이스터 스퀘어의 젊은 숙녀)>, <하얀 가루>, <불타는 피라미드>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 편 다 추리소설과 공포소설이 섞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구체적으로 공포의 진원지를 밝히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넘어간 건 좀 아쉬웠다.

 

 

* 검은 인장 이야기

 

  랠리 양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어떤 젊은 숙녀가 자신이 겪은 일(그레그 교수 실종사건의 진실)을 필립스 씨에게 말해주는 이야기.

 

  랠리 양은 그레그 교수 아이들의 가정교사이자, 그의 비서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그레그 교수는 민속학의 권위자였는데, 자신이 심중에 품고 있는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듯한 몇 가지 사소한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그 교수는 어느 날 휴가라면서 어느 산골마을로 간다. 랠리 양이 우연히 교수가 가진 검은 인장(육십석)에 대해 적힌 책을 발견하면서 그레그 교수는 묘하게 변화하고 랠리 양은 두려움을 느낀다. 교수는 갑자기 집안일 도울 소년이라며 쉭쉭거리는 소리만 내는 저능아를 데려오고, 도저히 꺼낼 수 없는 곳에 있던 흉상이 책상으로 내려와 있는 등 이상한 징후가 보이는데.......

 

p. 71.

그리고 이런 전승들 속의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요소는 진화의 장엄한 행군에서 탈락한 종족이 우리에게 기적으로 보일 어떤 힘을 생존력으로 지녔을 수도 있다는 가설로 설명이 되리라 생각했다.

 

  전반적인 흐름으로 보아 랠리 양이 사실을 알아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실은 그레그 교수가 실종되고 그의 유언장이 발견되면서 알려진다. 다만 그레그 교수가 왜 산책에서 사라져야 했는지, 육십석은 무엇이었는지, '작은 인간들'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아 추측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 추측을 할 단서도 그리 충분하지는 않다. 그저 뭔가 무서운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로 끝날 뿐이다.

 

  '작은 인간들'에 대한 그레그 교수의 가설은 재미있고, 뭔지 모를 일들에 랠리 양이 두려움을 느끼는 과정은 좋았다. 수상쩍은 현상을 말해 호기심을 높이고, 사건의 목격자가 진술하게 함으로써 신뢰를 느끼게 하는 건 성공했는데 마무리가 좀 약했다는 느낌이다.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많으니 무섭기보다 되려 김이 빠지는 느낌이랄까. 

 

 

* 하얀 가루

 

  헬렌 레스터라는 아가씨가 자신의 동생에게 일어난 일을 서술한다.

 

  헬렌에게는 프랜시스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대법관이 되기 위해 밤낮없이 공부한다. 헬렌은 동생을 염려해 해버든 의사를 데려오고, 의사를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라며 처방전을 써 준다. 동생은 그 처방전을 가지고 근처에 있는 구식 약국의 늙은 약제사에게 가서 약을 지어온다. 하얀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면서 동생은 유쾌해지고 헬렌은 처음에 동생의 변화를 반기지만, 점점 동생이 낯설어지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낀다.

 

  제일 재미있었던 단편. 프랜시스의 변화와 그에 따른 헬렌의 반응이 강렬하다. 변화에 대한 반가움이 두려움으로 바뀌면서 고조되어가던 긴장이, 마지막에 프랜시스의 방에서 헬렌의 방으로 검은 물이 떨어지고 프랜시스의 방에서 '악취를 내뿜는 검은 덩어리'를 발견하며 절정에 이른다.

 

  프랜시스의 변화를 보면 하얀 가루의 정체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하얀 가루의 정체는 경악할 것이지만 그 과정은 좀 두루뭉실하게 적혀 있다. 오랫동안 방치한 약이 다양한 온도 변화를 겪으며 어느 순간 악마의 연회에 쓰이는 포도주, 비눔 사바티 Vimum Sabbati의 제조에 쓰이는 가루로 변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약물의 오남용이 얼마나 나쁜지 경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검은 인장>보다 짧았지만 훨씬 오싹했다.

 

 

* 불타는 피라미드

 

  세 편의 단편 중에서 제일 추리물 같은 느낌을 풍겼다. 그렇지만 끝은 역시 공포물.

 

  시골에 사는 본이 런던에 사는 다이슨을 찾아와서 자신이 겪은 이상한 일을 말한다. 첫째, 한 달 전 애니 트래버라는 소녀가 숙모를 만나러 집을 나섰다가 실종되었다. 둘째, 본의 집 앞에 돌로 그린 수상한 신호가 매일 바뀐다(12개의 부싯돌로 이루어진 직선 > 사발 > 피라미드 > 반달). 본은 값나가는 그릇을 도둑질하려는 도둑이 남긴 신호가 아닐까 걱정한다.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하려던 다이슨은 부싯돌이 독특한 종류의 화살촉임을 알아내고 흥미를 느껴 본의 집으로 간다. 부싯돌 신호는 더이상 없었지만, 본의 집 벽에는 어른의 눈높이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아몬드 모양의 눈이 그려져 있고, 아몬드 눈은 하루에 하나씩 늘어난다.

 

  결국 다이슨은 암호를 풀어내는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불타는 피라미드,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이 수많은 기괴한 형상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 그리고 근처에 놓여 있는 애니 트레버의 브로치를 발견했을 뿐이다.

 

  읽으면서 공포보다는 호기심이 더 들었다. 사실 마지막에 초현실적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냥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클라이막스를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넘어간 것이 오히려 더 기괴한 느낌을 준 것 같다.

 

 

  세 편의 단편 모두 전체적으로 모난 곳 없이 안정된 느낌이다. 스토리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대충 짐작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 다만 공포의 극한까지 몰아가지 않고 진실을 끝까지 알려주지 않은 채 중간 정도에서 멈춰버리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 특징이라면 민간전승에 나오는 존재들을 공포로 둔갑시킨다는 점이랄까.

 

  원체 이런 류를 좋아해서 그런지, 지금까지 읽은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중 제일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하는 힘은 조금 부족한 것 같다.

 

 

 

201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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