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람들 - 21세기 노예제, 그 현장을 가다
E. 벤저민 스키너 지음, 유강은 옮김 / 난장이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노예'는 없다. 노예라는 단어가 야기하는 끔찍함 때문인지, 이 단어는 진작 잊혀졌다. 직유법이나 비유법으로 쓰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노예'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노예라는 단어로 불리지 않는다. '일회용 사람들'이라거나 '현대판 노예제' 같이 두루뭉실한 단어들로 불린다. 입 밖으로 '노예'라고 한 번 말하고, 그 뒤 '일회용 사람들'이나 '현대판 노예제' 혹은 '더부살이'나 '인신매매'라고 불러보라. 후자의 호칭은 전자에서 주는 거부감을 많이 희석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노예라는 단어를 쓰기 꺼린다. 그리하여 21C에 존재하는 노예들은 인식 밖의 대상이 되고, 노예제는 더더욱 교묘해진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 21C 노예제 그 현장을 가다>는 현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노예들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저자는 현대의 노예들을 찾아가 그들의 모습을 그리고 인터뷰한다.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보며 노예제의 기원을 서술한다. 한 사람이 노예가 되는 과정, 노예로써의 삶, 간혹 노예에서 해방된 과정이나 모습이 순차적으로 보여지는데 세밀하게 그려진 그 과정을 보자면 토기가 올라온다. 그것은 노예다. 다른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저자는 노예 개개인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그 몇몇 사람들의 일이야'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노예제 폐지 노력의 총책임자 존 밀러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미국 정치에서 노예제를 근절하기 위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다. 전자가 줌-인을 해서 노예제 안을 침투해 노예 개개인의 사연과 배경을 파고들었다면 후자는 줌-아웃으로 미국에서 벌어지는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노예제 근절을 위한 싸움은 처참하다. 연전연패다. 가끔, 작은 전투에서의 소소한 승리가 있을 뿐이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세계는 마냥 정의롭지 않고 정의는 다면적이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하나의 국가인 이상, 인신매매라는 전인류 공통의 의제보다 국익이 우선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자는 그런 현실(국익에 의해 정의가 뒤로 밀리는 것)도 똑바로 적어낸다.

  노예의 현실이 통계의 숫자가 되는 모습은 섬뜩하다. 본문에서 나왔듯 노예들이 자신의 머릿수를 세어달라고 줄서 있지 않은 이상 노예의 숫자는 순전히 추정치에 불과하다(더구나 노예라는 단어 자체의 정의가 제각각이라서 때로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진짜' 노예들이 저임금노동자와 혼돈될 여지가 있고 때로는 너무 협소해서 다른 종류의 노예는 간과할 가능성이 있다). 숫자는 어딘지 현실감이 없고, 혐오감도 분노도 위기감도 없다. 하지만 많은 숫자 속에 일부의 삶을 들여다 보았을 때 비로소 그 숫자는 의미를 가진다. 노예는 사회의 비극에서 비롯된 개인의 비극이다.

  읽다 보면 정말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저 거대한 노예제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돈과 이익이 인권과 정의를 압도한다. 책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노예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노예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뽑거나, 더 나아가 그들을 돕는 시민단체들에게 소소한 도움을 주면 그것이 노예제 폐지를 위한 일보가 되는 것이라고. 빤히 있는 그들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지만 않는다면 희망이 있다고.

  책의 첫 장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굉장히 치밀한 자료조사와 함께 씌여졌다는 것은, 굳이 뒤에 있는 한 무더기의 참고자료목록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보며 가슴아팠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 담은 이야기는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더 많은 이야기를 수록하지 못해 아쉽다고 한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 같은데 가슴이 무거워진다.


* 미국색이 굉장히 강하다. 그래서 가끔 거북스럽기도 하다.

2009.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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