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바트 D. 에르만 지음, 박철현 옮김 / 이제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동그라미 하나와 긴 작대기에 작은 작대기 하나 붙였을 뿐인데 넙치가 납치가 되고 밤이 범이 된다. 사소한 차이로 뜻이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언어만이 아닌 듯 하다. 고대 기독교의 다양성을 알려주는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을 읽다보니 같은 재료로 얼마나 다양한 요리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아는 기독교는 사도신경을 읊고 주기도문을 읊고 삼위일체설을 믿고 정경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기독교다. 그 외의 다른 기독교는 사실,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때로 궁금하긴 했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1.7%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던 고대에도 문맹률이 그렇게 적었을까? 다시 말하자면 사도들은 모두 글자를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었을까? 바울의 경우에는 그 시대의 내노라 하는 엘리트였으니 이해가 가지만, 어부와 같은 생업을 가지고 있던 사도들이 복음을 글로 적어서 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신약 성경을 사도들이 직접 쓴 게 맞을까, 하는 작은 의문같은 것 말이다. 게다가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당시의 풍경을 각각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소한 차이는 때로 성경책을 들춘 나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잠시 솟아올랐다가 곧 잠잠해졌고 내가 아는 것 이외의 다른 형태의 기독교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머리가 굳어서 그 쪽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은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 정도로 다양한 고대 기독교 형태와 그들 사이에 일어난 치열한 교리전쟁, 그리고 다양한 위서(외경)와 정경화 작업에 대해서 늘어놓는다. 어떻게 해서 기독교가 지금의 형태가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혹시 다른 기독교가 되었다면 현재 세계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을 던진다. 도저히 같은 기독교라고 믿기 힘든 교리도 있고 이런 식으로 상상할 수도 있구나 신기한 교리도 있고, 여하튼 교리의 도가니탕을 보자면 고대 세계에 기독교를 둘러싸고 그 당시의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다 '기독교 인'이었고 각자 이해한 방식으로 기독교를 믿었다.

  하나를 둘러싼 여러가지 생각이 존재하면 혼란만이 가중될 뿐이니, 교리 싸움은 필요했을 것이다. 어느 것이 기독교인가? 라고 말했을 때 10명이면 10명이 다 다른 기독교를 얘기한다면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읽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으로 번진다. 가장 순수한 폭력은 믿음에서 나온다고 누가 했던가.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위서를 만들고, 자신의 생각을 경서에 첨가하거나 삭제하고, 상대를 비난하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옛날도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 안에 씁쓸함을 남겼다. 가장 종교적인 것을 두고 벌인 전쟁이 가장 세속적인 방법을 떠올리게 하다니 아이러니다. 이긴 자는 처음부터 이긴 자의 생각만이 존재했다는 듯 진 자를 철저하게 땅에 묻었다. 고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기독교 형태의 윤곽이나마 알게 된 것은 최근에 들어서다. 예기치 않은 문서의 발견과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으로 고대 기독교의 다양한 모습과 그들의 교리가 드러난 것이다.

  편협한 종교라고 알려진 기독교의 초기 모습, 그 어마어마한 다양함을 보고 머리가 멍했다. 도저히 같은 기독교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생소한, 그러나 논거를 가만 들어보면 왜 그들이 그 교리를 믿었는지 납득이 가는, 그런 다양한 형태가 고대에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다니. 지금의 기독교만 보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알고 있던 것이 낯설어지는 것은 재미있는 감각이다.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을 읽으면서 그러한 재미를 느꼈다. 이제는 잊혀진 기독교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읽고 보면서, 뻣뻣한 시각이 조금쯤 말랑해졌다고 할까. 믿고 있던 것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보니 머리 속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진 것 같다. 패배당하여 억압되었던 옛 기독교 형태도, 그렇게 억눌렀음에도 어느 정도는 지금의 기독교의 형태에 스며들어 기독교에 일조한 것처럼, 관용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에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관용이란, 받아들임이란, 융화란 무엇인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2009.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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