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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평점 :
어디선가, 뭔가 본 듯하다. 들은 듯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난 기시감에 시달렸다. 분명 이 내용은 어디선가, 언젠가 본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 1980년 광주 민주항쟁, 영화 <감기>, 구제역 파동, 신종플루 사건 등등 두서없는 것들이 이리저리 떠오른다. 그 모든 기시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은 정유정이란 작가의 새로움이다. 문단이나 언론에서 뭐라 하든 내가 읽고 싶은 작가의 작품만 보는 나로서는 작가가 2011년 2013년 올해의 젊은 작가로 선정되었든 어쨌든 그동안 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28>은 내가 읽은 정유정의 첫 소설이다.
정유정의 <28>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 세 가지.
가장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첫째 문체!
간결하다. 명확하다. 속도감있다.
난 현학적인 문체, 길게 늘어지는 문장을 싫어한다. 고로 요상한 아폴로지를 곁들인 긴 문장들은 딱 질색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매력적이다. 접속사도 없이 오로지 짤은 문장들의 배열은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 강력한 추동력이었다.
둘째 악마로 등장하는 '박동해'라는 인물의 독특함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서재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서재형은 아이디타로드에 출전한 경험이 있는, 그 때문에 트라우마를 지니게 된 수의사로서 눈여겨볼 만하다. 하지만 중반 이후 그가 선택하게 될 결말이 뻔하게 눈에 보임으로써 독창적인 캐릭터로 나아가지 못한다. '박동해'는 다르다. 철저한 악인.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의 냉혈한이다. 물론 그가 왜 개들을 괴롭히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치부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인 줄 알았지만 부모까지도 엽기적으로 살해하는 그의 행동과 마주칠 때는 나 또한 오금이 저려왔다. 잔혹하고 끔직한 싸이코패스를 보는 듯했다.
셋째 작가의 성실성이다. 수의학, 구급대, 개썰매까지 발로 뛰고 도서관을 뒤지고 전문가를 만나 공부해야만 쓸 수 있는 내용이 도처에 있었다. 고생깨나 했을 것 같다. 어떤 것은 잘 녹아들었고, 어떤 것은 공부한 내용이 생경하게 도드라졌다. 그럼에도 큰 무리없이 잘 흘러갔다.
<28>에 아쉬운 점
첫째 한 편의 꼴라주를 보는 듯하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다. 헌데 한 편이 아니라 여러 편의 특정 부분들을 짜깁기하여 본 듯. <꽃잎>, <26년>, <감기> 등의 영화와 <페스트>, <꽃의 나라> 등의 소설들이 떠오른다.
둘째 시점의 다각화이다. 혹자는 이 부분을 장점으로 거론할지 모르겠으나 내 취향은 아니다. 이렇게 개별 인물들의 속내를 시네마토그라피 형식으로 조명하는 게 난 싫다. 상상력을 가동시킬 수 없으니까.
셋째 등장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들 혹은 우연을 가장한 스토리가 어색하다. 기준의 아내와 아이를 우연히 수진 일행을 발견하는 내용도 그렇고, 마지막 장면에 기준과 재형, 링고의 사생결단 현장에 나타난 윤주와 주환도 그렇다. 사실 모든 스토리들은 이렇게 우연을 가장하여야만 사건을 진행시킬 수 있으니 이걸 아쉽다고 투덜거려서는 안 되겠지만, 암튼 난 그렇다.
넷째 등장인물들의 묘사가 부족하다. 사건에 빠르게 전개되다 보니 재형, 윤주가 어떤 눈과 코를 가졌는지, 마른 체격인지 뚱뚱한지 알 수 없다. 영화 같은 소설이건만 대체 주인공역에 어떤 연예인을 대입시켜야 할지 끝까지 난감했다.
28일간 '화양'(난 여기서 왜 영화 <화양연화>가 떠올랐을까. 생각이 많아 탈이다.)에서 일어난 한편의 스릴러. 휴머니즘, 재미있는 소설이다. 헌데 액션과 재난을 합친 상업영화 한 편 보고 나온 듯한 이 허탈함은 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