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국 아무에게도 상관이 없을 이런 사소한 것을 목격하고 느끼고 생각할 때, 쓰고 싶다.
그것은 아마도, 젊어서는 고통이 나의 쓰기의 동력이었다면 이제는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동력이 되어
그것은 아마도, 젊어서는 고통이 나의 쓰기의 동력이었다면 이제는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동력이 되어버린 탓은 아니었을지. 두려움이 피어나지 않는 날들이 늘어감에 하루하루 안도하면서, 그것이 행복이 되어버린 삶을 살면서.
혼자 메모장에 삐죽이 적어놓은 글들이 훨씬 더 좋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글, 보여줘선 안 될 글, 나조차도 두려워 들춰보기 어려운 그 글들이 더 좋다. 훨씬 더 좋은 글을 두고 결국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이 글을 내놓자니 이 또한 모순이고 타협이다. 역시, 돈을 미리 받지 말았어야 했다.
"야, 그렇게 쓰면 안 되는 거야?" "뭐가?" "아니, 네가 방금 말한 거 쓰라고 하니까 설명적이라서 안된다고 하고, 그럼 저번에 했던 이야기 쓰라고 하니까 너무자기연민이 심하다고 하고. 뭐 다 안 된다고 하길래. 설명적으로 쓰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솔직하게 쓰다보면 자기연민 드러날 수도 있는 거 아냐?"
"창작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하잖아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물이 끓어서 기체가 되는 것처럼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은 창작물은 아무도 모르는 거 같아요. 중요한 건 계속 끓고있다는 거죠. 물론 마감일을 정하고 관리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있으면 편집자도 있는 것처럼요."
소설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 소설이란 아무나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쓰고, 읽을 만한 문장을 쓴다고 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소설을 사랑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소설을 나만 사랑하나?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한 ‘태도‘라든가 ‘자세‘, 그것도 아니라면 ‘시선‘이 있어야 했다. 나는그것이 있나? 내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말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때까지.
쓰는 일은 결국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강건하고 온유하고, 흔들리되 부러지지는 않는 부드러운 마음. 어느 것에도 지지 않는 신축성 있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나는 오늘을 산다. 그리고 나를 돌보고 달래는 데 성공해서 지금 이렇게 앉아있다. 쓰는 사람이 될 시간이다.
그리고 좋은 영화 작가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흠, 치부까지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져야 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용기를 내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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