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일도 연극도 늘 실망만 안겨주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 결국 내가 마음을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게 보상이지 뭐. 안 그래? 연극도 마찬가지고,
- 네. 이름이 에이미예요. 같은 반이고요. 밤색 단발머리예요. 걔도 저를 좋아해요. 그런데 또 다른 애를 좋아하기도 한대요. - 그게 싫어요? - 아니요. 왜요? 에이미가 좋아하는 애 이름은 마르땅이에요. 마르땅도 꽤 괜찮아요. 그래서 상관없어요. 그리고 그건 에이미 마음이니까.
나는 두부를 좋아한다. 아버지의 오른손, 검은 봉지 속에 들어 있는 국산콩 두부를 가장 좋아한다. 아침에 막 나와서 따끈한 그 두부는 올리브유도 발사믹 소스도 김치도 필요 없다. 고기를 잘 안 먹어서 그 모양이라는 머퉁이를먹고, 또 잔소리라고 질색을 하면서도 숟가락 가득 퍼먹는 두부는 고소하다. 그 투박한 손이 내미는 하얀 두부는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내 속을 데운다. 검은 물 같은 것은 들이지 말고, 하얗고 뽀얗게 살라고 내미는 그 두부는 식탁을 떠나고 나서야 내 속을 울린다. 그러니 늦기 전에 나도 안아 줘야지. 두부를, 검은 봉지를, 검은 손을, 60년 넘게 한결같이 그 길을 걷는 사내를,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여기 아닌 다른 곳,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착각인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 먼 곳까지 떠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은 알고 있을까? ‘다른 곳‘이 금세 ‘여기‘가 된다는 것을, 아무리 멀리 달아나 봐야 내 안의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멜라니는 조금 일찍 깨우친 모양이다.
바다에서 사는 일은 견디는 일이었어요. 육지에 갈 날을 기다리면서, 손꼽으면서. 그런데 육지에서 사는 일은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여름을 기다려요. 이 조용한 팸폴에도 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죠. 기다리며 사는 데 너무 익숙해진 것 같아요.
- 갑작스럽게 제안한 인터뷰인데 응해줘서 고마워요. - 나도 고마워요. 그런데 나 부탁이 있어요. 한국에 가면 내게 엽서 한 장만 보내 줄 수 있어요? 사진 엽서면 좋겠는데… - 그럼요. 그런데 한국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신 거라면 메일로 사진을 보내 줄 수 있어요. - 나는 메일 없어요. 그리고 엽서면 돼요. 한국 주소가 적힌 엽서면 충분해요. - 그럴게요. 약속해요. -그럼 나는 또 그 엽서를 기다리면서 지낼 수 있겠네요. 가능하면 천천히 도착하는 우편으로 보내 줘요. 오래 기다리고 싶으니까.
마음이 있는 얼굴을 하고 나를 보다니! 가만히 만지면 누군가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것은 매개였다. 마음을 받을 수도 전달할 수도 있는 매개.
건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 물건의 이름과 사연과 시간을 소개할 때마다 나는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물건은 매개였다. 그것을 잡으면, 그것을 만지면 우리는 어떤 시간의 어떤 마음에 이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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